2021-50.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3:10-14
설교일시 2021-12-12
오디오파일 s20211212.mp3 [47345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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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야 합니까?
눅 3:10-14
(2021/12/12, 대림절 제3주)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 어떤 예수를 기다리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세 번째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대설에서 동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이 이어지고 있지만, 우리 마음은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단계적 일상 회복에 대한 우리 꿈이 잿빛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고, 이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거라고 합니다. 마치 카프카가 묘사한 부조리한 세계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의 작품 <성>에 나오는 측량기사 K는 성에 들어가려고 애쓰지만 번번이 성에서 멀어지곤 합니다. 기껏 찾은 길도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으로 끝나곤 합니다. 우리 현실이 꼭 이러합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 갇힌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야 할 때입니다.

이 암울한 시기에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언제나 막연합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활동했던 펄 시스터즈의 노래 ‘커피 한 잔‘은 기다림의 안타까움을 절묘하게 보여줍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8분이 지나 9분이 오네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정말 그대를 사랑해 내 속을 태우는구려“. 1분이 지나면 정말 그는 자리를 떠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10분 더 연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다림은 고통이지만 그것은 차마 떨쳐버리기 싫은 고통입니다.

가끔 약속 장소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곳이라 생각하여 거기서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만나기로 한 사람이 오히려 수화기 저 너머에서 화가 난 목소리로 ‘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라고 물을 때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기다리는 이들은 그가 오기로 한 자리에 가서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오시겠다 말씀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베들레헴 구유는 바로 그분이 오실 장소에 대한 일종의 암시입니다. 주님은 화려한 옷을 입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사람들이 깔아놓은 붉은 카펫을 밟고 우리 가운데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 아픔과 슬픔에 잠긴 사람들, 설움이 북받쳐 올라 피울음을 삼키고 있는 이들 곁으로 다가오십니다. 주님은 그들의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주시지는 않지만 그들 곁에 머물며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우리가 주님을 기다려야 할 자리입니다.

기다리는 이들은 만날 사람의 모습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공항의 입국장 게이트에 환영의 인사말과 손님의 이름이 적힌 손 팻말을 들고 있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표식입니다. 성탄 무렵 우리도 손 팻말을 들어 예수님을 영접하면 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최근에 ‘야시피케이션yassification’이라는 낯선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 넘치는 밈(meme)의 일종입니다.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게 하려고 원본의 이미지를 많이 가공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서양 사람들이 가공한 (yassify) 예수님의 이미지를 원본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화 속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예수님의 모습은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콧날이 우뚝한 백인 남성입니다. 하지만 1세기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몇 해 전 미국의 시사 주간지인 <타임>은 표지에 실제 예수님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되는 초상화를 게재했습니다. 초상화는 조금 어두운 피부색에 뭉툭한 코 그리고 곱슬거리는 짙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눈빛 맑은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낯선 이미지에 정서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의 역사가 그분의 이미지만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교리로 박제화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고, 주류 사회가 만들어놓은 차별의 장벽을 철폐하기 위해 온 몸을 바치신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건만, 우리는 주님을 구원자로 믿고 경배하기만 하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이 근본적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 들사람의 외침
대림절이 되면 늘 떠오르는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기독교는 그를 주님 오실 길을 닦은 사자로 여깁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느른한 일상에 빠져서 하늘을 잊고 사는 이들을 깨우는 천둥소리와 같았습니다. 그는 야인 곧 들사람이었습니다. 도시적 편안함 따위는 다 내던지고 활활 타오르는 횃불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다정하게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거나,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조근조근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침없는 말로 인간의 마음을 습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친절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르고 달래는 말을 하며 사람들에게 자기 합리화의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이들에게 그가 한 말은 무섭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눅3:7-9)

그 열정, 그 가차없는 말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은 이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이란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고백은 불완전합니다. 책이 되었든 삶이 되었든 번역은 언제나 어려운 작업입니다. 저도 몇 권의 책을 번역해보았기에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압니다. 출발어와 도착어를 고루 잘해야 좋은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외국어만 잘한다고 좋은 번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말을 잘 다루지 못하면 그 번역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에 대입해 보십시오.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려면 텍스트도 잘 알아야 하지만 우리가 사는 콘텍스트 곧 현실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현실은 참 복잡하고 미묘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날마다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 때 신학자들은 ‘상황은 묻고 성경은 대답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만 성경에서 속 시원한 해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도 참 많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덮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상황에 맞는 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은 분명히 가리켜 보입니다. 참 사람이 되는 길 말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성경에 길을 물어야 합니다. 내 경험과 지식에만 의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숨이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 나눔의 실천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의 대답은 거침없습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간명하지만 강력한 말씀입니다. 나눔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독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이 말씀은 불편합니다. 좋은 말씀인 줄은 알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그렇게 해볼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일단 작은 나눔이라도 시작해 보십시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했습니다. 그 나눔은 우리를 가난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내면을 든든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와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의미와 보람은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할 때 발생합니다.

올가 머레이는 네팔에서 일하는 미국인 활동가입니다. 지금도 살아 있다면 96세가 되었을 겁니다. 그가 처음 네팔에 간 것은 60세 때였습니다. 관광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에 올라갔다가 넘어져서 뼈가 부러졌고, 셰르파의 등에 업힌 채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며칠 그곳에 묵는 동안 마을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올가는 낯설고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채 열 살이 안 된 어린 소녀들이 카트만두에서 온 버스에 실려가고 있었습니다. 중개인들이 아이들을 도시의 가정부로 넘기기 위해 가난한 아버지들로부터 소녀들을 샀던 것입니다. 나중에 올가는 팔려간 소녀들이 주인집 현관에서 자기도 하고, 주인이 남긴 음식을 먹고, 의료 지원도 받지 못하고, 학교도 가지 못하고, 강간과 폭력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올가는 자기 재산을 다 털어 가능한 한 많은 소녀들을 샀습니다. 한 명에 돼지 한 마리 값인 50달러였습니다. 올가는 그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아버지들이 다시 내다 팔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네팔 청소년재단을 만들어서 직접 소녀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25년 동안 무려 1만 2천 명을 구했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올가의 그런 노력은 결국 네팔의 문화를 바꿔냈습니다. 소녀들을 거래하는 일은 불법으로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안희경, <사피엔스의 마음>, 위즈덤 하우스, p.144-163에 나오는 ‘이사벨 아옌데‘ 인터뷰 중에서). 우리가 올가처럼 대대적으로 그런 실천에 나설 수는 없을지 몰라도 그런 일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과 연대할 수는 있습니다.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현실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눔과 돌봄에 대한 이야기 끝에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리와 군인들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을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습니다. 지금도 세금 문제는 사람들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세리들이 로마에 빌붙어 동족들을 착취하는 반역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기 일을 수행한다 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습니다. 군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군인들이 총독의 관할 하에 있던 로마군에 속한 사람인지 유대교에서 질서 업무를 맡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공권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권력의 맛은 들큼합니다. 윤흥길 선생의 소설 <완장>은 권력이 사람을 어떻게 변모시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동네 건달이었던 종술은 최사장의 꾐에 넘어가 저수지 관리인이 됩니다. 별것도 아닌 직책이지만 그는 그것을 완장腕章으로 여기며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립니다. 칼을 차면 휘두르고 싶다지요? 어쩌면 이게 인간의 버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묻는 세리들에게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라고 대답합니다. 아주 간결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세금을 과도한 부과함으로 자기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을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군인들의 질문에는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라고 대답합니다. 협박으로든, 거짓 고소를 통해서건, 속임수를 통해서건 일체의 빼앗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완장질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노자는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 가게 된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고 가르쳤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리들의 마음에 깃들기 쉬운 음험한 탐심과 군인들 마음을 지배하기 쉬운 지배욕과 탐욕에 정문일침을 놓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스스로 세례자 요한이 되어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목사에게는 아마도 ‘거룩함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독점하거나 진리를 왜곡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정치가들에게는 ‘공공에 속한 것을 사유화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집 부자들에게는 ‘집 없는 이들을 서럽게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법률가들에게는 ‘정의와 공의를 훼손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의사들에게는 ‘인생의 위기 속에 처한 환자들을 무정하게 대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언론인들에게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진실을 호도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교사들에게는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차별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어부들에게는 ‘수사원을 남획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건축가들에게는 ‘질 나쁜 자재를 사용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고용주들에게는 ‘일하는 이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수단으로 삼지 말고, 환경을 훼손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청년들에게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추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의 작가인 마루야마 겐지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회가 정한 평균적인 삶의 기준에서 아주 조금 벗어난 것만으로 허둥대고 뒤처졌다고 좌절하고 주눅 드는 것처럼 꼴사납고 우스운 일은 없다. 이게 아니고도 재미있는 인생이 얼마든지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마루야마 겐지, <사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고재운 옮김, 바다출판사, p.22)

남보다 앞섰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뒤졌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과 깊이입니다. 내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다른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특권을 내려놓는 것,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마음 쓰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반드시 붙잡아야 할 삶의 가치입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좋은 세상,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데 장애가 되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신 바를 삶으로 번역하며 사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아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12월 12일 11시 34분 0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