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성탄절. 보내주신 분의 뜻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 6:34-40
설교일시 202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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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신 분의 뜻
요 6:34-40
(2021/12/25, 성탄절)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

• 사랑의 밀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성탄절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빛이신 주님이 우리 곁에 오셨고, 오고 계시고, 오실 것입니다. 빛은 작은 틈만 있어도 스며듭니다. 모든 금이 간 마음, 멍이 든 마음, 조각난 마음에도 주님의 빛이 비쳐들기를 빕니다. 사는 동안 우리가 경험한 고통, 회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며칠 전 배달된 박노해 시인의 ‘사랑의 밀사(密使)‘는 그 신비를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나는 빛의 밀사로 여기 왔다
어둠 속에 빛을 찾는 네 눈동자에

나는 사랑의 밀사로 네게 왔다
마음이 가난한 네 아픈 마음에“

빛의 밀사로 오신 분은 가만가만 다가와 우리 방문을 두드리십니다. 시린 가슴 부여안고 세상의 어둠에 잔뜩 주눅 든 우리 가슴에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그래도 사람이 맑고 선해야 한다/아파도 양심을 지키고 함께해야 한다/인간의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날마다 앞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한다“. ‘그래도’라는 단어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려는 우리 팔을 슬쩍 붙듭니다. ‘그래도’라는 말 속에 빛에 속한 사람의 삶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뭐해?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져? 너만 손해야‘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그래도’라고 말하는 것이 빛에 속한 이들의 삶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요6:33).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 6:35b).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굶주림은 두 가지입니다. 정말 절대 빈곤 속에서 굶주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세상이지만 하루 세 끼 먹기 어려운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요?’라고 묻는 우리에게 주님은 당신의 꿈에 동참한 우리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 곁에 서는 것은 교회의 자선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속합니다.

• 참 사람 예수의 길
또 다른 굶주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마름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경쟁으로 내모는 세상에서 허둥거리느라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삽니다. 허위단심으로 욕망의 언덕을 오르다 문득 돌아보면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외롭고 쓸쓸합니다. 마음에 휑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면서도 우리 얼굴에 빛이 사라진 것은 먹어야 할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람과 의미 말입니다. 보람과 의미는 우리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은 우리가 누군가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앞에 나오는 어떤 사람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 6:37). 사람을 가리면서 맞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불쾌감을 자아내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고 종교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 앞에 현전하여 있는 사람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그렇기에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상처와 아픔까지 부둥켜 안습니다. 그 사랑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요 6:38)이라는 말 속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내면에 세워진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있다면 바로 이런 확신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삶은 모호하고 복잡하기에 모든 순간에 적합한 인생의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참을 찾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기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6:39)이야말로 자신의 소명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산다면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기뻐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길이고 또한 우리의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빛도 쌓인다
성탄절을 앞두고 평범한 듯하나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로빈 월 키머러라는 생태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에 그의 가족은 고향 마을을 떠나 켄터키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그의 이웃들은 다 가난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속칭 샷건 하우스(shot gun house)라 불리는 판잣집에 사는 헤이즐 바넷이라는 늙은 이웃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밤에 당신네 불을 보는 게 좋아요. 이웃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라고 말하며 그들을 반겨주었습니다. 그 이후 두 가정은 아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살아온 이야기, 정원 이야기, 세상을 떠난 남편 이야기도 함께 나눴습니다. 헤이즐은 몇 해 전 성탄절 전날 심장 발작을 일으킨 아들 샘을 돌보기 위해 그곳에 와서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헤이즐은 두고 온 집을 늘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차가 없었기에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를 딱하게 여기던 로빈의 엄마는 어느 날 헤이즐을 차에 태워 옛집에 모시고 갔습니다. 여러 해 방치된 채 퇴락한 집은 쓸쓸한 느낌을 자아냈습니다. 주인이 없는 동안 굴뚝새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에는 헤이즐의 기억과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후 시간이 흘렀습니다. 겨울이 깊어갈 무렵 헤이즐은 자기 옛집에서 한 번만이라도 성탄절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며 슬픔에 잠겼습니다. 사람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음식을 대접하고 함께 즐겁게 캐럴을 부르던 그 때가 그리웠던 것입니다.

로빈의 엄마는 헤이즐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밀스런 성탄절 축제를 준비했습니다. 전기회사에 전화하여 헤이즐의 옛집에 며칠만이라도 전기를 연결해달라고 부탁했고, 물이 끊겼기에 차로 물을 실어와 집안을 청소하고, 손수 쓴 초대장을 이웃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성탄절 장식도 꼼꼼하게 했습니다. 붉은개잎갈나무 가지로 테이블을 장식하고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지팡이 사탕도 매달았습니다. 성탄절 아침, 로빈의 가족은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트리에 조명을 밝혔습니다. 점심 무렵, 초대받은 이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엄마는 헤이즐에게 가서 함께 갈 데가 있다고 말하며 그를 옛집으로 모셔왔습니다. 집에 도착한 헤이즐의 얼굴에 기쁨과 감사의 빛이 어렸습니다. 로빈의 아빠와 언니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했습니다. (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p.111-125) 로빈이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탄절입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다면/나는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다면/한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면/기운을 잃은 개똥지빠귀 한 마리를/둥지에 데려다 줄 수 있다면/나는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세상이 온통 난장판인데 한 사람을 돕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이 인류입니다. 주님은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애태우며 온 산을 헤매는 목자의 심정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로빈의 가족이 한 일은 헤이즐에게 큰 기쁨이었겠지만, 그 성탄절 축제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가슴에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억을 안고 고단한 세상을 통과합니다. 그런 기억은 어두운 우리 내면을 밝히는 빛입니다. 그런 빛이 조금씩 쌓여갈 때 우리는 마침내 빛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빛이 어둠의 시기에 우리를 지켜줍니다.

많은 분들이 미얀마 난민들을 돕는 일에 크고 작게 동참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어렵고 곤고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곁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우리에게 없지만, 우리 주변의 어둠은 조금씩 밝힐 수 있습니다. 여전히 강력하고 사악한 힘이 대중들을 현혹하고, 공포심을 자극함으로 사람들을 어둠 속에 가두려는 이들이 많지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윤동주는 1934년 12월 24일에 쓴 ‘초 한 대‘라는 시에서 촛불을 밝힌 자기 방에서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다고 노래했습니다. 작은 실천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아 이 세상에 오고 계십니다. 주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 마음도 머물고, 주님의 눈길이 닿는 곳에 우리의 눈길도 닿고, 주님의 발길이 닿는 곳에 우리의 발길이 닿기를 빕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기쁨과 평화를 한껏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12월 25일 11시 56분 1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