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2. 하나님과 같은 이가 어디에 있으랴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113:1-9
설교일시 202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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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같은 이가 어디에 있으랴?
시 113:1-9
(2021/12/26, 성탄절 후 제1주)

[할렐루야.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지금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 것이다.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다. 주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어디에 있으랴? 높은 곳에 계시지만 스스로 낮추셔서,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백성의 귀한 이들과 함께 앉게 하시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조차도 한 집에서 떳떳하게 살게 하시며, 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즐거워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할렐루야.]

• 성탄절 이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다소 외롭고 쓸쓸한 성탄절이 지난 후 맞이하는 송년주일입니다. 주보에 적힌 2021-52라는 숫자가 묘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시간의 강물 위에 놓인 쉰 두개의 징검돌 가운데 이제 마지막 돌 위에 서 있습니다. 긴 기다림 끝에 맞이한 성탄절이 지나고, 우리는 또 다시 스산한 겨울바람 앞에 서 있습니다. 며칠 전 6살 손녀가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카드를 보았습니다. “산타 할아버지, 사랑해요.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 선물도 줄게요.“ 왜 ‘선물도 줄게요‘라고 썼냐고 묻자 다른 사람에게 다 주고 나면 산타 할아버지는 외로울 것 같다고 대답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우리 시대의 산타들이 생각났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곁에 함께 서고, 그들을 위해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들도 가끔은 선물을 받는 기쁨을 누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게나마 그런 마음을 표현해 보아야겠습니다.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은 성탄절 연극에서 빠지지 않는 등장인물입니다. 그들은 성탄절 분위기를 신비스럽고 목가적인 이야기로 만드는 인물들입니다. 나이 많은 현자들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에게 엎드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는 이야기는 얼마나 신비스럽습니까?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들려온 천사들의 노랫소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탄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냉엄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미만의 영아들을 학살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역사에 부합하는 현실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이 사건은 물론 출애굽기에 나오는 히브리인 남자 아이 제거 음모를 떠올리게 합니다. 역사는 늘 이런 위기 속에서 변화의 계기를 맞이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어둠에 속한 이들은 언제든 빛을 미워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언제든 불온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난민이 되어 떠도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설 땅을 찾아 헤매다가 검은 바다에 가라앉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저도 부스터 샷을 맞았습니다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백신이 제때에 공급되지 않아 위험에 노출된 채 지냅니다. 백신 제국주의가 건강의 불평등을 낳고 있습니다. 절대 빈곤에 처하게 된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고, 사람들 사이에 드리운 불안과 두려움이 타자에 대한 혐오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생태계는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성탄절 이후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주님이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십니다. 아름다운 세상의 꿈은 언제나 위태롭습니다. 희망은 일쑤 절망의 파도에 삼켜지곤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지치거나 냉소적으로 변합니다. 세상은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변하지 않는다는 비관주의가 우리를 뒤흔듭니다. 바야흐로 세상과의 타협이 시작됩니다. 이게 타락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그칠 수 없습니다. 홀로 부르는 노래는 외롭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래가 중창이 되고 합창이 되면 세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젊은 날 목이 터져라 부르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겠네/둘의 힘으로도 할 수 없겠네/둘과 둘이 모여 커단 힘이 될 때/저 굳센 장벽을 깨뜨릴 수 있네“. 신앙 공동체 혹은 믿는 이들의 연대는 그래서 소중합니다.

• 찬양받으실 이름
수난을 당하시기 전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마 26:30). 이때 부른 찬송은 유대인들이 삼대 순례 축제 때마다 불렀던 시편 113-118편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당신의 운명을 예감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울이나 공포에 사로잡히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 첫 노래인 시편 113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두 갈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존귀하심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자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의 행위입니다.

시는 제사장이 찬양대에게 주님을 찬양할 것을 요구하며 시작됩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1). 주님은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찬양의 시간은 ‘지금부터 영원까지‘이고, 찬양의 자리는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입니다. 이 대목에서 초점은 ‘주님의 이름‘입니다. 이름은 사람이나 사물을 구별하기 위해 부여한 기호입니다. 이름 명(名) 자는 ‘저녁 夕‘과 ‘입 口‘가 결합된 글자입니다. 어두워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이름을 호명함으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하지만 이름은 단순한 기호가 아닙니다. 어떤 이름이 발화되는 순간 우리 속에는 어떤 기억이나 정서가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름도 있고, 불쾌감을 자아내는 이름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앞서도 이야기 한 것처럼 찬양의 뿌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존귀하심에 대한 자각입니다. 시간 속을 바장이며 살다가도 어느 날 문득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에 속해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장엄한 세계에 눈을 뜰 때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저절로 이런 찬양이 나옵니다.

그러나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겪는 게 인생입니다.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때도 있었고, 광야에 홀로 선 듯 외로운 때도 있었고, 흐르는 모래에 갇힌 듯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면서 힘을 불어넣어주셨고, 좋은 이웃들을 보내 곤경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시편 40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진흙탕에서 나를 건져 주셨네.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해주시고 내 걸음을 안전하게 해주셨네“(시 40:2). 며칠 전 어느 성악가가 부르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을 들었습니다. 그는 울먹이느라 제대로 노래를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충분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행복이나 사랑이 그러하듯 감사도 언제나 반성적인 개념입니다. 당장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깨닫고 나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낮은 자를 살피시는 하나님
변화무쌍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멀미를 할 때가 많습니다. 역사는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전진과 퇴행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승리할 것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시인은 “주님은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다“(4)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패배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패배하실 리 없습니다. 그 희망은 근원적 희망입니다. 이 희망이 우리를 어둠 너머로 밀어 올립니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명랑함과 유머를 잃지 않게 합니다.

하늘보다 높으신 하나님은 저 초월의 자리에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살피시고, 개입하시고, 선한 길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십니다. 그것이 강생의 신비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탄생의 신비를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땅에 내려오심으로 설명했습니다. 어느 영어 번역본은 빌립보서 2장 7절에 나오는 이 대목을 “He made Himself nothing“이라고 옮겼습니다. 모든 나라보다 높고 그 영광이 하늘보다 높으신 분께서 철저히 자기를 ‘무’로 만드셨습니다. 이 낙차가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내려오심의 목적은 가장 낮아진 자를 들어올리기 위함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어디에 있으랴? 높은 곳에 계시지만 스스로 낮추셔서,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시 113:5-7)

세 가지 동사가 눈에 띕니다. ‘낮추다’, ‘살피다’, ‘들어올리다’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 ‘달’(dal)은 ‘낮다, 약하다‘는 뜻으로도 새길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이르는 말입니다. 궁핍한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비온(ebyown)은 억압받거나 학대당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비존재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 해 전, 홍천에서 목회를 하던 선배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예배실 전면에 걸린 십자가가 눈에 띄었습니다. 볼품도 없고, 다듬지도 않은 나무가 십자 형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아름답고 매끈한 십자가를 만들 수도 있었는데, 굳이 저런 십자가를 걸었나 싶었습니다. 제 마음을 눈치챘는지 선배는 그 십자가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거리를 걷다 보니 나무토막 한 무더기가 길가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더랍니다. 가만히 보니 새로 이식한 어린 가로수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던 버팀목 목재였습니다. 이제 나무가 스스로 설 수 있게 되자 제 구실을 다한 버팀목들은 해체되어 바닥에 그렇게 버려졌던 것입니다. 선배는 그 버팀목에서 그리스도의 처지를 읽었던 것입니다. 누군가의 기댈 언덕이 되어주고, 가끔은 버림받기도 하는 주님. 그는 그 나무를 가져다가 십자가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과 궁핍한 사람들의 버팀목이십니다.

• 변혁적 개입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렇게 천대받던 사람들이 근근이 살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당당한 주체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백성의 귀한 아들과 함께 앉게 하시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조차도 한 집에서 떳떳하게 살게 하시며, 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즐거워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할렐루야.“(시 113:8-9)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적 텍스트입니다.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힘의 질서를 뒤집어 엎으니 말입니다. 제국들이 발흥하던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왕과 귀족들만이 존귀하게 여겨지던 세상에서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광활한 영토의 궁벽한 변방에서 예수님은 영원한 것은 하나님 나라 밖에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체제의 입장에서는 불온한 존재들입니다. 바울 사도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도시에서 자기들을 지지하던 이들이 바울에게로 돌아서자,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믿는 이들을 시청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였습니다. 고발의 내용은 둘입니다. 하나는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세상을 소란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행 17:6, 7). ‘세상을 소란하게 한다‘는 말은 ‘불화를 조성한다‘는 뜻입니다. 악의적 모함이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예언자들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사도들의 가르침은 다 전복적입니다. 그들은 모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세상을 고치려 하십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이 가장 낮은 이들의 동맹자라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일입니까? 폭력과 독점의 욕망이 세상을 거칠게 휘몰아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높여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이 함께 부르는 찬양은 세상의 굳센 장벽을 깨뜨리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희망의 불씨가 꺼져가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내 심지에 불을 붙여줄 동지가 있으니 말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징검돌을 건너면서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이가 어디에 있으랴?“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12월 26일 12시 13분 3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