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9. 헌금과 생활비
설교자 김형욱
본문 눅 21:1-4
설교일시 202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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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과 생활비
눅 21:1-4
(2022/05/08, 현금과 생활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계절입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거리에서 마스크를 벗을 수 있어서 오늘의 봄이 더 기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봄의 따듯함이 교우 여러분들의 마음과 가정, 일터와 학교에도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여전히 어떤 말하기 힘든 이유로 마음이 시린 분들이 계시다면 그 마음에도 봄의 햇살이 찾아가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주님 마음 헤아리기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과 저는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것이 저 사람을 혹은 저 집단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게 할까요? 이는 기독교의 역사 만큼이나 다양하고 의미있는 해석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얼핏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 처럼 생각되지만,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의 답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생각해볼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예수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하는 사람' 입니다. 복음서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어가며 주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주님이 그 자리에 왜 멈추셨을까? 나아가 주님이 왜 여기에서 침묵하셨을까? 그 침묵 사이에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담겨있는 말씀이 무엇이었을까? 고민하고 성찰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까 바꾸어 말하면 내 신앙이 자꾸 냉랭해지고, 마음이 퍽퍽해졌다면 복음서를 읽으며 내가 주님 마음 헤아려 본 적 언제인가 자문해 볼 필요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한 여인이 성전에서 헌금을 드리는 장면과 그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담은 짧은 묘사입니다. 오늘 본문 속 이야기에 특별한 장면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 뒤의 문맥을 차근차근 읽다보면, 그리고 본문 속 여인의 처지와 상황을 천천히 곱씹다 보면 이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하지 않음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이 단지 헌금 행위에 대한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헌금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님은 이 여인의 헌금에 대해 정량적 평가를 하십니다. 이 여인이 누구보다 많은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가치 평가 그러니까 이 여인의 행위가 옳다 또는 그르다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남은 몫은 저와 여러분들이 몫입니다. 주님께서 왜 여기까지만 말씀하셨을까? 주님께서 당신 마음속에 담아 두셨던 말씀, 어쩌면 우리가 이 여인의 이야기 속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은 없을까?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고 교회의 몫일 것입니다. 본문을 조금 더 면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하신 여러 말씀 가운데 한 장면입니다. 누가복음은 구조적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야기의 방향이 예루살렘을 향해있습니다. 누가복음 전체가 2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루살렘으로 여정을 떠나는 장면이 9장 51절부터 시작되고, 예루살렘 입성은 19장 28절부터, 그 뒤로 마지막까지 누가복음의 시점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장소도 예루살렘입니다.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하실 말씀에서 예루살렘을 중요한 의미를 지는데요.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가 이 곳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눅 24:47). 그만큼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예루살렘을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습니다. 누가에게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고 주님께서 주신 복음의 새로운 시작이 있는 곳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루살렘이 이렇게 중요한 장소라면, 예루살렘에서 어떤 곳이 가장 핵심적이고 중추적인 장소일까요? 성전입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랜드마크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곧 성전을 향해 간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누가에게 예루살렘이 소중한 곳이라면, 성전 역시 누가에게 매우 유의미한 장소, 정말로 소중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전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가 벌어져야 할 곳이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의 놀이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자마 가장 먼저 한 일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며 질책하신 장면은 그렇기에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주님은 매우 날 선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꺼내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복음을 전할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말씀하시며 권위주의에 심취해 있던 종교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성전을 돈벌이로 삼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을 공공연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핵심 정체성이 율법에 대한 해석과 권위를 거의 독점하고 있던 서기관 곧 율법학자들을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사실상 성전 체계 거의 모든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체계 안에서 부역하고 있는 모든 자들을 거침없이 공격하셨습니다. 그 부역자들이 그냥 사람들도 아니고 당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도층이자 권력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질타는 앞뒤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성과 합리, 또 법치 체계가 오늘날과 같이 다듬어지지 않았던 고대 사회임을 감안할 때, 당대의 권력에게 이토록 매서운 비판을 하는 예수님께서 잡히고 고문당하시고 죽음 당하지 않는게 이상한 일이겠지요.


타자의 삶을 무너뜨리는 권위의식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조금 당연하고 익숙해서 별다른 고민없이 넘기기도 했던 것인데요. 도대체 예수께서는 이 성전 체계와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왜 그토록 비판하셨는가? 성전이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여하튼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종교적이고 실존적 정체성의 전부였을 텐데 왜 그토록 성전에 대해 부정적이셨을까?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 그렇게 그들의 권위 의식을 비판하셨을까? 어느 집단의 문제를 지적할 때 항상 나오는 말이 있지요. 다 그런건 아닐텐데. 모든 서기관이 그렇게 권위의식에 찌들어 있고 윗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닐텐데 예수께서는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바리새인들을 마치 본투비 악당처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지요. 그들은 존경받는 사람들이었고, 율법에 철저한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주님의 비판은 그들의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겠지요. 또 한 발 양보해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권위 의식을 갖는게 그렇게 나쁜 것일까? 누군가 권위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냥 기분 조금 나쁘고 저런 사람 그저 한심하다 생각하고 말수도 있는 노릇인데, 주님은 왜 그렇게 비판을 하셨던 것일까.

생각이 복잡하게 엉키는 와중에 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 말씀이 오늘 우리의 본문 바로 직전에 나옵니다. 주님께서 서기관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장 46절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원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율법학자들 그러니까 당대의 성전에서 부역하던 종교 지도자들을 예외없이 매서운 말씀으로 비판하신 이유가 비로소 명확해집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차없으셨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켰다는 것이지요. 예복을 즐겨 입고, 장터에서 인사 받고 높은 자리와 잔치를 즐기며 당대의 가장 약하고 힘없는 과부들의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을 약탈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권위를 부리는게 잘 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권위를 가지고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기에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중요한데 그 철저함을 위해 누군가의 삶을 옥죄어 버리는게 피할 수 없는 죄인 것입니다. 그냥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입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율법학자들이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 좋아한다는 말이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장터 사람들이 높으신 율법학자들에게 인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말 그저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를 말할까요? 아니겠지요. 시장 상인들이 버는 이윤 가운데 적지 않은 금액에 그들에게 돌아간다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돈을 내야하면 당연히 상품가격이 올라갈테고, 그렇게되면 누가 고통 받을까요? 상인들은 물론 결국 돈이 부족한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피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긴 하지만,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자마자 상인들의 좌판을 엎으신 이유가 상인들을 엄히 다그치려는 부분도 있겠으나, 한 편으로 불합리한 시장 구조를 일단 정지 시킴으로 상인들과 가난한 구매자들의 숨통을 틔우시려 했던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왜곡된 구조 속에서 시장이 멈추면 누가 가장 피해를 입겠습니까? 시장에서 돈을 받던 권력자들일테니 말이지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와 같은 맥락을 염두에 두고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잘못된 성전 체계와 그 내부의 부역자들인 종교 지도자들이 행태를 강력하게 비판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하는 장면은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매우 드라마틱한 면이 있습니다. 주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 의식이 저 혼자 만족시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가장 연약한 자들의 숨통을 쥐고 흔들고 있음을 강도높게 비판하시는 와중에 과부가 헌금함에 헌금하는 장면이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율법학자들을 향한 비판과 과부의 헌금 장면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구조 속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입니다.

자, 이야기의 밑그림은 이렇습니다. 20장 45절에 의하면 누가복음은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고 보도합니다. 그러니까 율법학자들을 향해 비판하는 장면이 어느 골방이나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라 일컬을 만큼 사람이 많은 곳이란 뜻입니다. 게다가 이어지는 헌금 장면을 함께 놓고보면 그림이 더 명확해지는데요. 헌금함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장소보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헌금함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두는 법은 없으니까요.

주님께서 제자들과 모인 많은 무리에게 말씀하시던 와중에 어느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힘겹지만 그러나 간절한 모습과 마음으로 자기가 가진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토대로 생각한다면 헌금한 여인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단지 헌금 행위에 대한 평가 또는 칭찬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진지하게 대한다면 과부의 헌금행위에 대한 말씀에 앞서 언급하신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저 종교지도자들의 야만적인 욕심에 대한 신랄한 대비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한 신약 학자는 이 논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조차 어떤 이유로 성전에 헌금해야하만 하는 이 현실 자체를 주님께서 비판하고 있다고도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이어 주님은 성전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 무너질 성전의 강압적 헌금 구조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일리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돌봐야하며, 특히 율법 조항 속에 여러차례 등장하는 고아와 과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저버린 성전 체계과 율법학자,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그 실례로 가난한 과부의 전재산 두 렙돈의 헌금을 그 근거로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헌금이나 헌신에 대한 표본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 특히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한다는 율법의 주요 근간을 스스로 무너뜨린 율법 학자들과 성전 관계자들의 부정함을 폭로함에 있다는데 다다랐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자고 했는데요. 이 여인의 헌금을 본 주님의 마음 안에는 분명히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저 종교 지도자 놀이를 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다. 어떤 종교 체계도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하고 옭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도 복음도 신앙도 그리고 그 곳은 교회도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성전이 더이상 성전이 아니었듯 말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게 되면 무언가 석연치 않은 어떤 것이 마음에 남습니다. 과부의 헌금 본문을 읽고 묵상한 후,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 의식을 비판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한 성찰을 마쳐야 할까요? 오늘 본문 속의 이 여인은 그렇다면 그저 성전 체계와 종교 지도자들의 행태를 고발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 또는 소재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힘없는 사람들을 아끼셨습니다. 과부의 헌금 행위를 그저 종교 지도자의 허례허식을 폭로하고 고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싶니다. 주님은 누군가의 가난, 궁핍, 삶의 어려움을 도구 삼아 자신의 뜻을 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여인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에 대해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가난합니다. 또 과부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과부는 아마도 가장 약한 존재,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두 렙돈, 오늘날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아마도 몇 천원 정도되는 금액을 헌금했습니다. 주님은 이 장면을 보시고 이 여인이 오늘 가장 많은 헌금을 했는데, 왜냐하면 부유한 사람들은 가진 것의 일부를 적절히 했으나, 이 여인은 가난한 중에 자신의 전재산,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전부 입니다. 생활비 전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자기가 갖고있는 것 전부를 헌금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여인의 행위를 주님께서 장려한다거나, 우리도 이렇게 믿음으로 가진 것 전부를 내어놓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이 여인의 행위를 폄훼하거나 다른 의미를 대체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서기관에게 수치를 주기 위한 레토릭이 아닙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큽니다. 그 자리에 모여있던 누구보다도 말입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체를 넣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본문 속 여인의 이야기가 율법의 참 된 의미를 훼손한 종교지도자들을 엄히 문책하는데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보면서, 동시에 주님의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여기에 모여있는 사람들, 특별히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무슨말이냐면, 주님께서는 지금 이 과부의 헌금 행위에 대한 말씀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여있는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장면을 다시 그려보면 가난한 과부가 와서 자신의 전재산을 헌금하고 난 직후 제자들을 바라보며 '보아라 이 여인이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 가난한 중에 전재산을 드렸다'고 말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여인이 전재산을 드린 직후 제자들을 향해 이 여인이 가난한 중에 모든 것을 드렸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남겨두신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너희 지금 뭐하고 있니?' '저기 저 누가봐도 어려움에 처한 여자 분이 지금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는데, 너희는 지금 뭐하고 있니?'라고 묻지 않으셨을까요? 지금 당장 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저 여인을 돌려 세운 후에 가진게 아무것도 없을텐데 생활비는 있는지, 당장 쌀과 반찬을 살 돈은 있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아이들이 있다면 먹을 것은 있는지 물어야 하지 않겠냐는 주님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요? 약한 사람을 누구보다 보듬으셨던 우리 예수님이라면 이 여인이 빈손으로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에 마음을 쓰셨을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길
주님께서는 종교적 허례허식과 권위주의로 찌들어 있는 성전 권력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더 가난하게 만들고, 그들이 가진 적은 재산 조차 빼앗가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셨고 또 분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 만큼이나 서글프셨던 일은 한 가난한 여인이 자신의 재산을 다 바치고 돌아가는 동안에 주님의 제자 가운데 그 누구도 그녀를 멈춰 세워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을 내어주며 살 길이 있느냐고 묻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교회라면 결코 놓치지말아야 할 주님의 마음입니다. 종교적 권위 의식과 그것을 통해 제 잇속을 채우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분노해야합니다. 누군가 영적 귄위를 명목삼아 타자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고 그의 인권과 존재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우리는 담대히 맞서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혹시 내가 가진 신앙적 자존심과 권위로 누군가를 함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점검하고 자문해야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오늘과 내일 살아갈 힘이 있는지 묻고 도와야 합니다. 힘에 겨운 이들이 오늘 살아갈 힘이 있는지 교회는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이고 교회가 마땅히 해야할 일일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5월 08일 11시 26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