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1. 게르솜과 엘리에셀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 18:1-4
설교일시 2022-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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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솜과 엘리에셀
출 18:1-4
(2022/05/22, 부활절 제6주, 웨슬리 회심 주일)

[미디안의 제사장이며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는, 하나님이 모세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주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는가 하는 것을 들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친정에 돌아와 있는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십보라의 두 아들을 데리고 나섰다. 한 아들의 이름은 게르솜인데, 이 이름은 "내가 타국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모세가 지은 것이고, 또 한 아들의 이름은 엘리에셀인데, 이 이름은 그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바로의 칼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고 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 예기치 않은 일 덕분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랜만에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한 달간의 안식 여정 끝에 돌아왔습니다. 본래 예정은 지난 주 중에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너무 분주한 일정을 소화했으니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라는 그분의 명령 덕분에 체류를 열흘 간 연장했습니다. 호텔에 머물면서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즐겼습니다. 두꺼운 영어 소설과 인문학 책도 몇 권 읽었고, 이런 저런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 일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진행되는 일이 꽤 많습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그 일들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오래 전 프란체스코의 마을 아씨시에서 경험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저는 아씨시 아랫마을인 천사들의 성모성당(지명)이란 곳에 머물면서 매일 아침 아씨시로 올라가곤 했습니다. 아씨시에 있는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지하 공간, 아랫성당, 윗성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기독교 신앙 발전 단계를 건축적으로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프란체스코의 무덤이 있는 지하 공간은 ‘정화(purification)의 공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옛 사람의 죽음과 관련됩니다. 1층은 ‘조명(illumination)의 공간’, 즉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내면을 비추는 것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2층은 ‘일치(unification)의 공간’, 즉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인 일치를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지하층에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그 형제들의 무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랫성당에는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의 생애에서 중요한 열 두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벽면을 가득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기도였고 공부였습니다. 윗성당에는 그 유명한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1337)가 그린 프란체스코의 삶을 형상화한 28장의 그림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미창 너머로 광장이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세상으로 퍼져가는 복음을 빛을 상징합니다. 저는 꽤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씨시로 걸어 올라가는 데 조금 피곤함이 느껴져 잠시 쉬어가려고 마을 입구에 있는 도미니칸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장중한 대리석 건물이었고 청소를 하는 관리인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프레스코화 한 점 없는 아주 단순한 구조였습니다. 그곳에 한참 앉아 있는데 말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매일 프란체스코 대성당을 드나들며 나의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그림을 해석하고 신학적으로 분석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분의 현존 앞에 오롯이 있음이 지복처럼 느껴졌습니다. 비움은 결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주실 그릇임을 그때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저는 이번에 정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코비드 양성 결과를 받았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무력감이 느껴졌습니다. 탬파한인교회 한명훈 목사님과 교우들이 제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호텔 숙박을 연장하고 음식을 장만하여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준비해주셨습니다. 다행히 무증상이어서 격리하는 내내 정말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운동하고, 밥 먹고, 글을 쓰면서 지냈습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4일 동안 저를 집으로 초대하여 머물게 해주신 김병훈 집사님과 김은자 권사님은 환대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 한국인 디아스포라
이번 미국 일정 중에 정말 많은 아름다운 분들을 만났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길든 짧든 시간이라는 잉크로 각자의 이야기를 적어갑니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매우 유명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행복의 빛깔은 다양하지 않지만 불행의 빛깔은 다채로운 법입니다. 사람들은 다 행복을 꿈꾸지만 그 꿈에 다가서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안온하고 익숙한 세계를 떠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숙명이지만, 낯선 나라 혹은 낯선 상황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와 각오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취약해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는 곳마다 마치 자기 세상인 것처럼 당당하게 사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주눅이 든 채 머뭇거리며 살게 마련입니다. 제가 만난 분들은 대개 미국에 간지 30년이 넘은 분들이었지만, 수십 년이 지나도 영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차별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그분들에게 정말 소중한 곳이었습니다. 고향을 느끼게 하는 장소였으니 말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고, 모국어로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고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때문일까요? 미국교인들은 자기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여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어려움을 겪었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보면 내 일처럼 여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예기치 않은 시간에 찾아오는 아픔이나 시련은 우리 삶의 기반을 마구 뒤흔들어놓습니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손실은 노력해서 복구하면 된다지만,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시련을 겪을 때, 그런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사람들은 좌절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순간이야말로 은총의 문인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모든 고통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아홉 개의 문이 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비두니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유럽으로 선교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지만 “나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창 32:26) 써서 결국은 축복을 얻어냈습니다. 형들에게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은 아주 나중에야 자기에게 씌워진 운명의 굴레가 결국은 자기 가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은 연금술입니다. 보잘 것 없는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조각난 유리를 모아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조각난 마음과 경험을 모으시고 거기에 하늘의 빛을 비추시어 아름다움을 창조하십니다. 제가 인생 여정 중에 만난 꽤 많은 이들이 그런 조각난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섰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기도 했습니다.

• 모세의 두 아들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에 머물고 있을 때 장인 이드로가 가족들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출애굽기 2장 21절에서는 ‘르우엘’로 소개되고 있고 민수기 10장 29절에서는 ‘르우엘의 아들 호밥’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다고 말합니다. 정확히 어떤 종교의 제사장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그는 나름대로 세상의 이면을 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분명합니다. 그는 낯선 도망자인 모세의 품성을 보고 그를 기꺼이 사위로 맞아들였고,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애굽으로 돌아가려 할 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떠나보냈습니다. 그는 깊은 신뢰의 사람입니다. 나중에 그는 모세가 백성들을 상대하며 지친 모습을 보고는 리더십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의 두 아들, 게르솜(Gershom)과 엘리에셀(Eliezer)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의 이름 뜻은 모세가 경험한 삶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게르솜은 ‘낯선 자’ 혹은 ‘외국인’이라는 뜻입니다. 애굽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던 그가 광야로 들어가 베두인들의 말을 배우고 생활양식을 익혀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는 광야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애굽에 속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경계선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경계선에 선 사람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주민들의 일부로 대접을 받지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늘 배제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소돔 성에 살던 롯은 부유했기에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졌지만, 그가 집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모셔 들였을 때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소돔성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과 재미를 보겠다고 할 때 롯은 그들을 막아서며 자기의 보호를 받기 위해 들어온 손님에게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롯에게 비켜서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 “이 사람이, 자기도 나그네살이를 하는 주제에, 우리에게 재판관 행세를 하려고 하는구나. 어디, 그들보다 당신이 먼저 혼 좀 나 보시오” 하면서 롯에게 달려들었습니다(창 19:9). 경계선에 선 사람의 비애입니다.

베드로는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벧전 1:1)라고 칭했습니다. 히브리서는 성도들을 가리켜 ‘하늘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히 11:16).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는 이들이야말로 ‘게르솜’과 같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세속의 흐름을 거스르며 더 큰 질서에 잇댄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어둠과 타협하지 않는 이들을 불편해합니다. 자기들의 어둠을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 때문에 외롭지만 내밀한 기쁨 또한 누리며 삽니다.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자각은 우리에게 내적인 자유를 선사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또 다른 아들의 이름은 엘리에셀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찾아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 풀무불 속에 던져졌을 때, 눈물의 계곡을 지날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고통이 너무 압도적일 때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시련의 시간마다 다가오셔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캄캄한 어둠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주님은 한 점 불빛이 되어 우리를 이끄십니다. 고정희 시인은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에서 상한 영혼들에게 고통을 힘껏 맞아들이자고 말합니다. “뿌리 깊으면야/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게 마련이고,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게 마련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라고 노래합니다. 이게 근원적 희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엘리에셀’ 곧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게르솜과 엘리에셀이야말로 믿는 이들의 실존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
이드로를 만난 모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일일이 고했습니다. 애굽에서 일으키신 그 놀라운 이적들, 광야를 거쳐 오는 동안 겪은 고난의 순간들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한 사랑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는지를 다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는 힘이 셉니다. 진실한 이야기는 듣는 이의 가슴으로 흘러 들어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야기는 마음을 고양시키고, 삶의 진실을 보게 합니다. 이론이 메마르고 창백하다면 이야기는 풍성하고 다채롭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와 바로의 손아귀에서 자네와 자네의 백성을 건져 주시고, 이 백성을 이집트 사람의 억압으로부터 건져 주셨으니, 주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분일세.”(출 18:10) 미디안 제사장의 입에서 나온 야훼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기쁨과 찬양이야말로 이 고단한 세상살이를 지날 때 간직해야 할 길 양식입니다. 기쁨은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기쁨은 내가 올바로 가고 있다는 확신에서 찾아옵니다. 기쁨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기쁨은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때 커집니다. 기독교인의 기쁨은 우리를 인도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기쁨과 찬양은 사람들을 결속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드로가 하나님께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자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와서 하나님 앞에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제사 음식을 먹었습니다. 열린 식탁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사실 오늘은 존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입니다. 284년 전 하나님은 존 웨슬리를 찾아가시어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청하셨고, 신실한 그는 하나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절망에 빠진 이들을 돕고, 그릇된 길에 접어든 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했습니다.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이 늘 명심해야 할 삶의 원리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라(do no harm). 둘째, 선을 행하라(do good). 셋째,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 머물라(stay in love with God). 이 원리를 우리 행동 원리로 삼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형성될 것입니다. 지금 게르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엘리에셀의 시간 또한 다가오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다른 이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꽃을 지피고,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광경을 머리에 그리며 주어진 인생의 길을 멋지게 살아내십시오. 주님, 영광 받으소서.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5월 22일 12시 15분 2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