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2. 이어 달리기
설교자 김기석
본문 왕하 2:9-14
설교일시 202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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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달리기
왕하 2:9-14
(2022/05/29, 부활절 제7주, 승천주일)

[○요단 강 맞은쪽에 이르러,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 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들고 돌아와, 요단 강 가에 서서,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그 겉옷으로 강물을 치면서 "엘리야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외치고, 또 물을 치니, 강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엘리사가 그리로 강을 건넜다.]

• 어지러운 세상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 마지막 주일이자 주님의 승천주일(Christi Himmelfahrt)입니다. 유럽에서는 이 절기를 매우 성대하게 지킨다고 합니다. 이 날은 주님이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기억하는 날이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로 서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승천을 앞둔 주님께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행 1:6)라고 묻자, 주님은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이스라엘 회복의 주체가 주님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시지만, 그 시간을 특정하지는 않으십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하나님의 뜻은 믿는 이들의 철저한 헌신을 통해 이 땅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세계 현실은 참 암담합니다. 미국 텍사스의 유밸디 지역의 롭(Robb)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으로 19명의 어린 학생들과 2명의 교사가 희생되었습니다. 열여덟 살 청소년이 벌인 참사였습니다. 총기 규제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불붙고 있습니다. 미국은 총기 소지를 합법화하고 있습니다. 열여덟 살만 넘으면 누구나 아주 쉽게 총기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적인 폭력을 은연중에 용인하거나 부추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문제적 인간의 범죄로 설명하려 합니다. 그의 불우한 가족적 배경이나 정신병적 징후 혹은 트라우마를 거론합니다. 물론 그런 개인적 문제도 중요하지만 더 근원적으로 살펴야 할 것은 사람들의 폭력성을 부추기고 용인하는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시장경제는 사람들을 무자비한 경쟁 속으로 몰아넣고, 정치는 분열적이고,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진영 논리에 기대 서로 비난하고 냉소하고 혐오하는 말들을 마구 쏟아냅니다.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뿌리가 뽑힌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에 대한 적대의식이 깊어갑니다.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메마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사라지고, 따뜻하고 자비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사라질 때 세상은 전장이 되고 맙니다. 곤고한 시절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의 파도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근원적인 희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침묵의 동행
희망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불씨를 소중하게 간직하려는 이들의 노력을 통해 이 세상에 유입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절망의 상황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고, 폭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평화를 꿈꾸는 것이고, 사람들을 고립시키는 문화에 저항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정교회 예배당에는 여러 성인들의 이콘이 걸려 있습니다. 그 이콘들은 그냥 그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예배하는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과도 연결됩니다. 연결됨이야말로 신앙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이어 출애굽의 대업을 완수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엘리사는 엘리야의 뜻을 이어받아 예언활동을 지속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지속과 연결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의 뿌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이는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예언자로 산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입니다. 예언자의 눈은 그가 살고 있는 세상 현실을 향해 있지만 그의 귀는 하나님께 열려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권세에 항거하는 사람입니다. 왕과 제사장들과 거짓 예언자들에게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엘리야를 생각할 때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는 온 땅에 내릴 대가뭄을 예언한 후 그릿 시냇가로 물러나 숨어 지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한 후에는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광야로 터벅터벅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외로운 나머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의 고단한 인생이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주 조용히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합니다. 칭송의 말도, 작별의 말도 다 부질없음을 알기에 그는 홀로 고독한 장소로 물러가려 합니다. 저는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습니다.

엘리야는 제자인 엘리사만 데리고 길갈을 떠났습니다. 길을 가다가 그는 제자에게 자기는 베델로 가야 하니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하고 명합니다. 뜻밖에도 엘리사는 스승의 지시를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왕하 2:2b) 베델에 이르렀을 때 선지자 수련생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도 어떤 조짐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침묵하라고 명합니다. 엘리야는 다시 그곳에서 여리고로 가야 한다며 엘리사에게 베델에 남아 있으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이번에도 그 명령을 어기고 스승을 따라 나섭니다. 여리고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엘리사는 왜 스승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지싯지싯 스승과 동행하려는 것일까요? 그는 스승이 떠나기 전 스승의 모든 것을 몸과 마음으로 흡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엘리사는 능동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스승의 발걸음을 따를 뿐입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 속에 그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길갈에서 베델로, 베델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강으로 가는 그 여정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길갈은 출애굽 공동체가 할례를 행하고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킨 곳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치를 없앤 곳입니다. 베델은 광야를 떠돌던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장소입니다. 여리고는 출애굽 공동체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복한 최초의 성입니다. 그 장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해방의 기억이 서린 곳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더 이상 따돌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요단강 가에서 겉옷을 벗어 말아서 그것으로 강물을 치자 물이 좌우로 갈라졌습니다. 두 사람은 물이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요단 강을 건넜습니다. 그곳은 출애굽 공동체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머물렀던 곳입니다. 물이 갈라지는 이야기는 출애굽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 제자의 도리
마침내 엘리야는 제자에게 묻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왕하 2:9) 어찌 보면 당돌한 요청입니다. ‘능력’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루아흐’(ruah)인데, ‘바람, 숨, 영, 생명력, 의지력’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가 바란 것은 재물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스승을 사로잡고 있던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충만하기를 구한 것입니다. 그 영은 변화를 일으키는 힘입니다. 허약함과 피곤함을 극복하는 힘입니다. 엘리사가 구한 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스승의 보람은 자기보다 뛰어난 제자를 두는 것입니다. 스승의 한계 아래 머무는 제자는 좋은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실천력과 아울러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감당할 힘과 용기를 얻고 싶어합니다. 엘리야의 이미지가 투사라면 엘리사의 이미지는 백성들의 일상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선 경세가입니다. 예언자 수련을 받는 사람의 아들이 종으로 팔려갈 위기를 맞았을 때 그는 마르지 않는 기름병의 기적을 통해 도움을 주었고, 제자들이 독이 든 음식을 먹고 괴로워할 때 음식을 정화하기도 했고, 마실 수 없는 물을 정화하여 단물이 되게도 했고, 물에 빠진 도끼를 건져줌으로 사람들을 곤경에서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았습니다.

갑절의 능력을 구하는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왕하 2:10)이라고 말합니다. 둘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을 갈라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사는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라고 외쳤습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서 두 조각으로 찢었습니다. 애도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옛 삶과의 결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옷은 정체성의 표현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으로 지은 옷을 입히셨습니다. 그 때 옷은 보호와 돌봄의 상징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인해 새로워진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이들’이라 했습니다. 엘리사는 대신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집어 듭니다.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가 “엘리야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외치고 그것으로 물을 치자 강물이 좌우로 갈라졌습니다. 엘리사는 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암시합니다.

• 우리가 건너야 할 강
오늘 우리에게도 건너야 할 강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무기력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작고한 시인 정진규 선생은 ‘밥詩·4’에서 어두운 세상에 지친 이들이 하는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해, 무엇해, 너는 말한다 나쁜 사람들이 더 잘사는 세상이야 너는 말한다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해 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끼니가 고작이야 지워지고 지워진 게 도대체 몇천 년이야 너는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잘 지워지는 게 복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일에 지친 이들에게 그는 모든 것을 잊고 바다로 가자고 말합니다. 바다도 몇 천년을 지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물결을 뒷물결이 싸악 지워내고 또다시 뒷물결이 앞물결을 싸악 지워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는 언제나 싱싱하게 싱싱하게 다시 채워지고 있을 것이다 지워지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다 분명하게 지울 줄 아는 사람만이 가장 분명하게 다시 태어난다”. 놀라운 시구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암담하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율을 노래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두려움과 무기력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혐오와 수치심을 안겨줌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분열적 사고의 강도 건너야 합니다. 예수님은 장벽 철폐자였습니다. 유대교 세계는 ‘거룩’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세상을 갈라놓았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가름은 차별을 낳고, 차별의 경험이 지속되면 원한감정을 품게 됩니다. 가르고 나누는 세상에 평화는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혐오와 수치의 강을 건너 사랑과 공감과 연대의 장소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늘에 오르시기 전 예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몸이 되어야 할 이들의 몫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요 14:12) 엘리야를 사로잡았던 ‘루아흐’가 엘리사에게 전달되었던 것처럼,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예수님을 사로잡았던 꿈이 제자들 속에 들어갔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숨을 이어 받은 사람답게, 이 척박한 세상에서 끈질기게 생명과 평화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를 가득 채우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5월 29일 12시 03분 4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