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5. 광야학교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삼상 24:1-6
설교일시 2022-06-19
오디오파일 s20220619.mp3 [6603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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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학교
삼상 24:1-6
(2022/06/19, 성령강림 후 제2주)

[블레셋 사람과 싸우고 돌아온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이스라엘에서 삼천 명을 뽑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 쪽으로 갔다. 사울이 길 옆에 양 우리가 많은 곳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굴이 하나 있었다. 사울이 뒤를 보려고 그리로 들어갔는데, 그 굴의 안쪽 깊은 곳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었다. 다윗의 부하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드디어 주님께서 대장님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날이 왔습니다. '내가 너의 원수를 너의 손에 넘겨 줄 것이니, 네가 마음대로 그를 처치하여라' 하신 바로 그 날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몰래 잘랐다. 다윗은 자기가 사울의 겉옷자락만을 자른 것 뿐인데도 곧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부하들에게 타일렀다. "내가 감히 손을 들어,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우리의 임금님을 치겠느냐? 주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나를 막아 주시기를 바란다. 왕은 바로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 광야는 어디에나 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답답하고 암담한 현실을 견디며 지내는 분들에게도 하늘 빛 고요함과 생기가 차오르기를 기원합니다. 생각해보면 삶은 시련의 연속입니다.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 우리 삶의 평온을 뒤흔들기도 합니다. 평온하던 일상이 무너지고, 따뜻했던 시선들이 차갑게 변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 익숙하던 세상이 돌연 낯설어집니다. 우리 영혼에 어둔 밤이 찾아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내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시 130:1-2)

‘깊은 물’은 우리가 경험하는 역경과 시련을 가리킵니다. 깊은 물에 잠긴 것 같은 시간, 우리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물고기 뱃속에 갇혔던 요나도 그 절망적 상황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물이 나를 두르기를 영혼까지 하였으며, 깊음이 나를 에워쌌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휘감았습니다”(욘 2:5). 그의 목숨이 힘없이 꺼져 갈 때 요나는 비로소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요즘 수요 모임에서 예수님의 광야 시험 이야기를 함께 묵상하고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셨고 악마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광야는 성경에서 매우 익숙한 공간입니다.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피해 광야로 들어갔고, 출애굽 공동체도 광야를 거쳐야 했고, 다윗도 사울의 추격을 피해 광야로 들어가야 했고, 우상들과 한판 대결을 벌였던 엘리야도 광야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광야(헬eremos, 히miḏbār)는 황량하고 척박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광야라는 단어가 인간의 경험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될 때는 다른 이들로부터 ‘소외되다’, ‘버림받다’, 친구나 지인의 ‘도움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살다 보면 원하지 않았지만 광야에 선 것 같은 상황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내 사정을 들어줄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적막함을 달래줄 위안거리도 없습니다. 자기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현대인들이 즐겨 찾는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소용없습니다. 광야로 내몰린 순간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 절감합니다. 감각은 한껏 예민해지고, 위험이 사방에서 자기를 덮칠 것 같은 공포를 느낍니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입니다. 성경에서 시험(파이라조 peirazo)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로 두루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곤 했습니다. 하나님도 그 백성들이 당신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지, 계명을 지키는지를 보려고 시험하기도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고후 13:5)

• 엔게디
광야는 또한 단련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에 서는 순간 삶이 단순해집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자연주의자 테오도르 모노는 누구보다 사막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사막을 학교에 빗대 설명합니다. “이 공간은 파우스트적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막은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강인해지도록 가르치는 학교이다”(테오도르 모노, <사막의 순례자>, 안-바롱 옥성, 안인성 옮김, 현암사, p.24)

파우스트적 인간이란 생각이 많고, 회의적이고, 늘 머뭇거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머뭇거림이 미덕일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입장을 유보하고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태도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사막에서 살아남으려면 잡다한 생각을 비워내야 합니다. 테오도르 모노는 “사막은 어떤 나약함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교육자”(p.70)라고도 말합니다. 광야의 시간은 우리를 단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을 수직적인 세계로 인도합니다.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졌기에 오로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접속입니다. 광야의 시간은 그렇기에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광야에 설 때, 누구의 조력도 받을 수 없는 그 때, 우리는 삶의 근본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우리를 엄습하면서 세상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게 만드는 기분을 일러 ‘근본기분’(die Grundstimmung)이라고 말했습니다. 불안이나 경이감, 권태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광야는 사람들을 근본기분으로 몰아갑니다.

다윗도 광야의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의 광야는 이중적입니다. 실제 장소로서의 광야와 그가 감내야해야 했던 시련의 시간을 두루 포함합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벌어진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그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화려한 등장이었지만 시련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윗에게 쏠리기 시작하자 사울왕은 불안을 느낍니다. 불안은 질투로 바뀌고, 질투는 살의로 번집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때는 블레셋 족속에게 망명했고, 그곳에서도 위기를 느끼고는 아둘람 굴로 몸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십 광야의 산간지역에 은신처를 마련했다가 아라바에 있는 마온 광야로 숨어들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풍찬노숙이었습니다. 그가 엔게디에 숨어 있을 때 일어난 한 사건이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엔게디는 사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아시스 지대입니다. 가파른 절벽 위로 고원이 펼쳐진 곳인데, 침식 작용으로 인해 곳곳이 깎여나가서 협곡과 자연 동굴이 많이 발달해 있습니다. 척박한 유대광야에 속하지만 그곳만은 많은 물이 흘러내리기에 사람들은 그곳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고, 동물들도 물 주변에 몰려들곤 했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아가서는 연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엔게디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그이는 나에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 꽃송이라오.”(아 1:14)

• 동굴 속의 사울
그 아름답고 평화로운 엔게디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집니다. 다윗이 엔게디에 숨어 있다는 보고를 들은 사울은 친히 삼천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그곳으로 왔습니다. 엔게디가 살육의 현장으로 변할 수도 그 긴박한 시간에 뜻밖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사울이 갑자기 변의를 느낀 겁니다. 그는 용변을 볼 자리를 찾다가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갑니다. 자의식이 있는 인간은 누구나 배설을 은밀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로 여깁니다. 그게 드러날 때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낍니다. 사울은 지금 혼자입니다. 경호원조차 곁에 없습니다. 칼도 내려놓고 겉옷도 벗어놓고 그는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완전히 취약해진 상태입니다.

역사에는 이런 유머가 많습니다. 뜻밖의 일들이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기도 하니 말입니다. 역청을 발라 물이 새지 못하게 만든 갈대상자가 나일강 물결을 타고 떠내려갈 때, 바로의 공주가 그 상자를 건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상자 속에는 태어난 지 몇 달밖에 안 된 모세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작은 자비의 행동 하나가 출애굽 사건의 서막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 있습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던 청년 사울은 그 운명의 날을 맞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22세의 법학도였던 마틴 루터는 만스펠트에서 에어푸르트로 가는 도중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 근처에 이르렀을 때 천둥번개를 동반한 여름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겁에 질린 그는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성 안나에게 자신을 구해주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서원했습니다(린들 로퍼, <마르틴 루터―인간, 예언자, 변절자>, 박규태 옮김, 복 있는 사람, p.90 참조). 그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이 세계의 역사를 바꿔놓았습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사울을 사로잡은 변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굴 깊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다윗의 부하들이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차리고는 다윗에게 지금이야말로 사울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날이 마침내 찾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부하들을 물리치고 홀로 아주 은밀하게 다가가 벗어놓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조금 잘라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사울이 홀가분한 기분으로 협곡을 건너 반대편으로 가자 다윗은 모습을 드러내고 사울을 부릅니다. 사울이 뒤를 돌아보자 그는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임금님은 어찌하여, 다윗이 왕을 해치려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만 들으십니까?”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그는 베어낸 옷자락을 내 보이면서 마음만 먹었으면 임금님을 죽일 수 있었고, 또 그렇게 권유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자기는 임금님을 아꼈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크게 놀라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삼상 24:17)이라고 말합니다.

•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다윗이 위기 속에서도 사울을 해치지 않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가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흠이 많고, 권력욕 때문에 어리석어졌지만 그는 한때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처럼 살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현재 모습 때문에 그의 과거까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정치꾼들이 득시글거리는 도시에만 머물렀다면 그도 또한 권력 투쟁에 휘말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어 들어가게 된 광야에서 맛본 고독과 깊은 침묵은 그를 더 큰 세계로 인도했고, 자기의 연약함에 대한 자각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절감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의 믹담, 사울을 피하여서 동굴로 도망하였을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시편 57편은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참으로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께로 피합니다. 이 재난이 지나가기까지, 내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합니다.”(시 57:1)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몸을 숨길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에 그의 기도는 절박합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그는 쇠약해졌습니다. 그 약함이 때로는 복이 되기도 합니다. 자기로부터 해방되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연해주와 만주에서 야생의 시베리아호랑이를 관찰하고 영상에 담던 다큐멘터리스트 박수용 감독이 얼마 전에 낸 책을 보다가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호랑이의 흔적을 찾느라 숲에 머물면서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도 숲은 무르익은 신비로 가득하다. 여울에 밀려나 쌓인 모래톱 위의 앙증맞은 발자국 하나에도 가슴이 설레고, 지저귀는 새소리 하나에도 무슨 의미일까 호기심이 자란다. 다 이해할 수도,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광활한 미지의 세계가 없었다면 나는 먼지 같은 존재의 미소微小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죽음이 채 오기도 전에 유한의 틀에 갇혀 고사했을 것이다. 나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광활한 미지를 걷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낀다. 그러다 문득 그 미지의 세계와 하나 됨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이 그렇다.”(박수용, <꼬리>, 김영사, p.30)

‘다 이해할 수도,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광활한 미지의 세계가 없었다면 나는 먼지 같은 존재의 미소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문장이 주는 울림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의 작음을 알았기에 그는 유한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위기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맛보았습니다. 그 경험이 그를 더 큰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행복한 이들이 있습니까? 그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시간을 한껏 누리십시오. 그러나 주변에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시련의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 시간을 더 큰 세계로의 초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광야에 선 것처럼 두렵고 막막한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과 더 깊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광야 학교를 통해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몸을 맡긴 채 저 생명과 평화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6월 19일 12시 22분 4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