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6. 길잡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15:10~14
설교일시 202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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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
마 15:10-14
(2022/06/26, 성령강림 후 제3주)

[예수께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 오도된 영혼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의 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고, 러시아 주변 국가들은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허가 없이는 집 밖에서 권총을 휴대하지 못하도록 한 뉴욕주 법률’이 위헌이라며 이를 무효화시켰습니다. 여성의 임신 중지 권리를 중단하는 결정도 내렸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자연재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혹합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물을 구할 수 없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모습도 우리 가슴을 아프게 만듭니다. 우리는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풍요를 누리며 살지만 세상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기적인 이웃들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현실이 암담하다고 느낄 때마다 폐허로 변한 조국을 바라보며 애가를 불렀던 예레미야의 노래가 떠오르곤 합니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주님께서 분노하신 날에 내리신 이 슬픔, 내가 겪은 이러한 슬픔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애 1:12)

예루살렘의 패망은 하나님을 등지고 이웃에게 불의를 저지른 죄에 대한 징벌이라지만, 가까스로 생존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집중되는 고통은 그저 아플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곁부축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해를 당한 이들과 난민들에게 우리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통로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제가 부쩍 슬프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일평생 마음 깊이 간직하고 따르고 섬겨온 예수님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추문거리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회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사뭇 냉랭합니다. 어느 분은 예수님을 가리켜 인류 역사가 피워낸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가슴에도 그런 꽃씨를 뿌려주셨습니다. 그 꽃을 피워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 꽃씨를 가슴에 소중히 품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그 씨가 발아하고 성장하여 꽃을 피우도록 하는 것을 일러 지혜라 하고, 거기 맺힌 열매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일러 사랑이라 합니다.


무릇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얼굴에는 빛이 나야 합니다. 그 빛은 깨끗한 영혼에서 비롯되는 빛입니다. 우리 얼굴에 선한 빛이 감돌 때 우리 앞에 마주 선 사람들의 마음에도 선의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마음에 하늘빛이 스며든 이들은 거친 말, 가르는 말, 혐오하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잘 믿는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이들의 말이 폭력적이고 분열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오도된 영혼들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종교는 악한 이들에게 이용당하곤 했습니다. 유다서는 그들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이 사람들도 꿈꾸면서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하고 있습니다…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욕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들처럼, 본능으로 아는 것 바로 그 일로 멸망합니다.”(유 1:8, 10)

“그들은 바람에 밀려다니면서 비를 내리지 않는 구름이요, 가을이 되어도 열매 하나 없이 죽고 또 죽어서 뿌리째 뽑힌 나무요,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요, 길 잃고 떠도는 별들입니다. 짙은 어두움이 그들에게 영원히 마련되어 있습니다.”(유 1:12b-13)

• 불편한 사람 예수
공생애 3년 동안 주님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과중한 업무도 아니었고, 사람들의 외면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편견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제사장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과 대립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기들이 기대고 있던 전통적인 가르침을 해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교 혹은 율법의 권위자라는 자부심을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가르침을 무력화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건강한 논쟁이 이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 그들이 원한 것은 예수라는 불편한 존재의 제거였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율법의 규정을 해석하는 데 집중했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둘은 유사하지만 다릅니다. 바울 사도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고전 8:1b-2)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소통을 위해 매우 중요한 도구이지만, 언어는 삶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정의 혹은 해석이라는 뜻이 영어 단어 ‘definition’은 한계를 정하다라는 뜻의 ‘define’과 뿌리가 같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과 사물을 이해합니다. 언어화되지 않은 경험은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경험을 언어 속에 욱여넣습니다. 그러다보면 이것저것 잘라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사람들은 잘 압니다. ‘사랑’이라는 말만으로 자기감정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유를 만들어냅니다.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지만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해석자들의 과제입니다. 문자적 해석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곤 합니다.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문자가 아닌 마음으로만 전달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른바 ‘不立文字’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기 위한 세부 사항에 골몰할 때 예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그렇기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풍부하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본뜻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일찍이 하나님의 현존 안에 사는 이의 기쁨과 든든함을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사 50:4-5)

여기서 ‘학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림무드, limmûḏ’는 많이 배운 사람을 일컫기보다는 배울 줄 아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달리 말해 그는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귀를 열어 알아듣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되었기에 그는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었고, 주님께 등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주님께 귀를 기울이기에 그의 언어는 폭력적이거나 단정적이지 않습니다.

• 입으로 들어가는 것, 입에서 나오는 것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헛된 자부심에 염증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보며 하셨던 말씀은 통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마 15:6b). 가장 경건한 척 하지만 실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들의 지위와 체면입니다. 주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마 15:8-9)

이사야 시대 혹은 예수님 시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우리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뭘 보면 알 수 있을까요? 여전히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의 삶의 태도는 배려와 존중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자기 기준에 따라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주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자기 눈에 들보를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겸손하게 배우려 합니다.

예수님은 종교 전문가들을 보며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 15:10b-11).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이 선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결법을 금과옥조로 여겼습니다.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는 순간 사람은 더럽혀진다고 여겼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전제를 뒤집고 계십니다.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정결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마음에서 악한 생각을 낸다면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르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 바로 이런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가르치십니다. 본말이 전도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변화,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종교는 허위의식으로 귀결되게 마련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낀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위험이 닥쳐오고 있음을 알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은 “지붕 위의 풀 같이 되어, 자라기도 전에 말라 버리고 만다”(시 129:6)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 자기 확신이라는 함정
주님은 스스로 본다 하면서도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 중뿔나게 사람들 앞에 나서 그들을 이끌겠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시고는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확신에 차 있습니다. 확신이 나쁠 것은 없지만, 여백이 없는 확신, 수정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확신은 폭력적입니다. 세상에는 무고한 말로 다른 이들을 해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들의 기준을 들이대면서 사상 검증을 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비진리’로 규정하면서 돌팔매질을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이들을 일러 주님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라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우리 삶이 참 누추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님의 말씀이 간명합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눈 먼 사람’이라는 표현은 가급적 삼가야 하는 말이지만 이 대목에서는 달리 표현할 길이 마땅치 않습니다. 저는 목회자로 살면서 사람들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로 안내할지나 않을까 늘 경계합니다. 후배 목회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까닭도 사람들을 오도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낯선 길을 가려면 좋은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약초나 버섯이 몸에 좋다 하여 아무거나 채취하여 먹으면 안 됩니다. 경험과 지식이 많은 이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며칠 전에 만난 목사님 한 분은 엔게디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정신을 잃었던 경험을 들려주셨습니다. 목사들은 광야를 제대로 체험해야 한다면서 가이드가 안내한 그곳에서 그만 탈진하여 뒤쳐졌고, 그러다가 길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는 심각한 탈수 증상 때문에 위험한 지경에 빠졌었다고 합니다. 가이드의 설익은 의욕이 참사로 이어질 뻔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인이 되었건 종교인이 되었건 앞자리에 선 사람들은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설익은 자기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거나,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비진리로 규정하면 안 됩니다. 무릇 지도자란 지향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도 품고 갈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순례의 종착지인 동시에 출발지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십니다.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마음이 조각난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온전하게 만들고, 세상이 세운 장벽을 허물어 사람들로 하여금 소통하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를 길로 삼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뭔가를 가리켜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부디 우리 삶이 가리키는 방향이 그리스도이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6월 26일 12시 51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