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2. 진정한 생명의 샘물
설교자 김재흥
본문 삿 15:14~19
설교일시 2025-08-10
오디오파일 250810 설교 음성 (1).mp3 [2193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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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이 마주 나오며,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때에 주님의 영이 그에게 세차게 내리니, 그의 팔을 동여매었던 밧줄이 불에 탄 삼 오라기같이 되어서, 팔에서 맥없이 끊어져 나갔다. 마침 삼손은 싱싱한 당나귀 턱뼈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손에 집어 들고, 블레셋 사람을 천 명이나 쳐죽이고 나서, 이렇게 외쳤다. 나귀 턱뼈 하나로 주검을 무더기로 쌓았다.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이나 쳐죽였다. 이렇게 외치고 나서, 삼손은 손에 든 턱뼈를 내던지고, 그 곳 이름을 라맛레히라고 불렀다.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레히에 있는 한 우묵한 곳을 터지게 하시니, 거기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자, 제정신이 들어 기운을 차렸다. 그래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레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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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마른 시대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금 강원도는 가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강릉시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의 저수율이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약 28%, 평년 저수율이 65%인 것에 비하면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관광객이 몰리는 철임에도 물공급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뭄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아니 폭우가 그렇게 자주 내리는데 가뭄이라니 이상하죠? 폭우가 내리는 횟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전체 강우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상고온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전 세계에는 물 부족국가가 30개국이 있는데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말라가는 것은 자연만이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 또한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 뉴스를 보면 연일 살인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습니다. 친구가 친구를, 연인이 연인을, 가족이 가족을 죽입니다. 그리고 해외 뉴스는 모두 전쟁에 대한 뉴스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가자지구와 이스라엘 전쟁, 미국의 관세 전쟁. 러시아는 핵 카드를 언급하였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전역을 완전히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관세 전쟁에 맞서 러시아와 인도와 브라질은 연합하고 있고, 미국이 관세 전쟁의 가장 큰 타겟으로 삼고 있는 중국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고 있어 이 전쟁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연이 메말라가고, 인간과 인간 사이와 국가와 국가 사이가 메말라가는 원인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의 욕망을 측정할 수 있는 측정기가 있다면 그 수치는 역대 최고치로 나올 것입니다. 지금 인간은 인류역사에 있어 가장 많은 것을 소유하고 가장 많은 것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말라가는 저수지와 끝없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사람들과 세계를 보며 ‘학철부어涸轍鮒魚’(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의 물고기)라는 사자성어와 함께 이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김민기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입니다. 경쾌한 곡조의 노래이지만 가사는 예레미야 애가처럼 참으로 슬픈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인류의 미래가 되지 않을 것이라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2. 엔학고레
오늘 사사기 말씀의 주인공은 삼손입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정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과제가 부여되었는데 그것은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천성이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그때 그때 자기의 욕망과 감정에 따라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년이 되자 블레셋 처녀에게 반해버렸고 부모님의 반대에도 결혼을 강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혼은 비극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결혼식에 온 하객과 삼손은 내기를 하게 되었고 블레셋 여인은 삼손이 알려준 답을 하객들에게 알려줌으로 삼손으로 하여금 내기에서 지게 만들었습니다. 삼손은 진 대가로 옷 30벌을 물게 되었는데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여 그들의 옷을 가져다가 하객들에게 주었습니다. 삼손은 화가 나 얼마 동안 자기 집에 있다가 다시 블레셋 여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여인의 아버지는 자기의 딸을 삼손의 들러리로 왔던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삼손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어 그 지역의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과 포도원과 올리브 농원을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 결혼하기로 한 여인과 그 아버지가 삼손을 속였고 삼손이 그에 대한 화풀이로 저지른 일임을 알게 되어 그 여인과 아버지를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러자 삼손은 다시 불같이 화를 내며 그 블레셋 사람들을 다 때려눕힌 후에 동굴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성경은 삼손이 동굴에 쉬려고 들어갔다고 하지만, 동굴은 남성에게 있어 ‘자기만의 공간’, ‘안식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삼손은 그 동굴 속에서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 –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 가장 믿었던 사람의 배신, 그로인한 분노와 홧김에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과 방화와 폭력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기가 살아야 할 삶이 구별되어 있었다는 것 - 자기가 감당하고 싶지 않았던 운명과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자기의 욕망과 이 둘의 충돌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삼손은 자기의 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많은 문제를 끌어안고 그 동굴에서 끙끙거리며 씨름을 했을 것입니다. 동굴 속 삼손의 모습은 상처 입은 야수처럼 느껴집니다.

삼손에게 크게 당한 블레셋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삼손에게 당한 그대로 갚아주기 위해 유다의 레히 지방을 공격했습니다. 이에 3,000명이나 되는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에 맞서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동굴에 머물고 있던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삼손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삼손을 감싸주거나 그의 아픔을 위로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삼손의 인생도 참 기구합니다. 삼손은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친구에게 배신당하더니 이제는 동족에게 버림당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던 것이었을까요. 삼손은 순순히 그들의 요청에 응해주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새 밧줄로 삼손을 묶어서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치려고 달려왔습니다. 바로 그때 삼손의 손을 묶고 있던 밧줄이 맥없이 끊어져 나갔습니다. 삼손은 바닥에 있던 나귀의 턱뼈를 집어 들어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죽였습니다. 그렇게 1,000명을 죽였습니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삼손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주검을 무더기로 쌓았다.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이나 쳐죽였다.”

그런데 삼손은 너무 오랜 시간 싸움에 열중했기에 목이 타들어갔습니다. 승리의 외침은 금세 고통의 절규로 바뀌었습니다. 삼손은 주님께 물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한 우묵한 곳을 터지게 하셨는데 거기에서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삼손은 그 샘물을 마시고는 제정신이 들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 - 부르짖는 사람의 샘- 이라고 하였습니다. 삼손에게 있어 그 엔학고레는 생명의 샘물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삼손이 엔학고레의 물을 마시지 못했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엔학고레가 삼손에게 정말 생명의 샘물이 되었습니까? 엔학고레 이후의 삼손의 삶은 사실 그 이전의 삶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또 다른 블레셋 여인 들릴라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여인에게 배신당하고, 힘의 근원이었던 머리카락까지 잘리고 두 눈마저 뽑혀 감옥에서 연자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삼손은 다시 머리카락이 자라게 되었고, 블레셋 사람들이 신전에 모여 축제를 벌이게 되었을 때 신전을 바치고 있던 두 기둥을 한꺼번에 무너뜨림으로 삼천 명이 넘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었지만, 그의 생 전체를 생각해보았을 때 삼손의 삶은 영웅적인 삶이었다기보다는 비참한 삶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계속 반복해서 배신당하고 버림받았던 삼손이 육신의 갈증만을 해갈해 주는 엔학고레의 샘물이 아니라 다른 샘물, 영혼의 갈증까지 해갈해 주는 진정한 생명의 샘물을 마셨다면 그의 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3. 진정한 생명의 샘물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엔학고레의 샘물과는 전혀 다른 샘물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그 여인은 평범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은 소위 사연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정식 결혼은 한 번도 못하고 여섯 번째 남자랑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기에 동네 사람들이 잘 나다니지 않는 정오시간에 혼자 우물가에 물을 길러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사정을 아셨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와 아픔이 있음을,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소망이 있음을, 진정한 생명의 샘물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상처와 아픔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알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여인 속에 있던 예배에 대한 소망을 이루어 주셨고 진정한 생명의 샘물에 대한 목마름도 해갈해 주셨습니다. 그 여인의 모습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다녔던 이가 먼저 마을사람들에게 다가가 자기가 메시야를 만났으니 당신도 한 번 그를 만나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늘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생명의 샘물을 전해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도 그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병이 오래되어 방치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셨고 그의 오래된 아픔과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찾아가 그의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그의 오래된 아픔과 소망을 귀기울여 들어주셨을 때 이미 그는 행복했을 것입니다. 8장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여인은 사실 사람들에게 이용당한 것입니다. 예수를 잡을 덫으로 이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두려워하는 마음과 보호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너의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 하시고 그 여인 옆에 앉으심으로 그 여인과 함께 돌을 맞을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사람들이 돌을 다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나기 전, 예수님께서 당신 옆에 와 앉으시며 자신과 함께 돌 맞을 작정을 하셨을 때 이미 구원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9장에는 나면서부터 눈먼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태어나 보니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죄인으로 정죄하지 않으셨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앞 못 보는 죄인’이 아니라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보는 자들을 향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순간 그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을까요? 예수님은 세상이 자신에게 가져다 준 잘못된 이름표를 떼고 하나님께서 자신에 주신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셨습니다. 11장에는 죽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죽은 오라비로 인해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자신의 아픔과 슬픔으로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시며 무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 눈물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냈고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진정한 생명의 샘물입니다. 그 샘물을 만난 사람들은 더 이상 목마른 사람들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생명의 샘물이 솟아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샘물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땅 곳곳이 메마르고, 나와 너 사이가 서걱거리고,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계속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진정한 생명의 샘물이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생명의 샘물, 예수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예수의 마음이라는 생명의 샘물을 하나씩 품고 살기를 소망합니다. 하여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생명들에게 그 생명의 샘물을 흘려보내며 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럴 수만 있다면, 뜨거운 욕망으로 메마르고 서걱거리는 이 세상도 조금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세상으로 변화되어갈 것입니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의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5년 08월 10일 16시 35분 1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