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에,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
1. 조율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8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어느덧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교회력으로는 다음주일부터 창조절기이라는 새로운 절기가 시작됩니다. 9월 첫주일부터 시작되는 창조절기는 예수 그리스도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본디 창조절기는 교회력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강림절기가 거의 한 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길고 환경파괴로 창조질서보전이 시급해져서, 성령강림절기의 절반을 나누어 앞의 절반은 성령강림절기로 지키고 뒤의 절반은 창조절기로 지키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교회의 절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반복적인 흐름을 만들어주고, 절기 주제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지난 6월 8일 성령강림절이자 감리교 환경선교주일을 맞아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가 시작되었다. 성령강림절기를 맞아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자. 그런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과 죽어가는 지구를 살리는 일이 다른 일이 아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그러면서 보더콜리 3마리가 산불로 검게 타버린 산에 씨앗주머니를 매달고 뛰어다녀 몇 년만에 그 산 곳곳을 푸르게 변화시켰던 것처럼, 우리도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이 세상에 생명과 평화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강림절기 기간 동안 직박구리 부부는 교회화단의 나무 위에 둥지를 틀어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워 함께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교회 남쪽 화단의 포도나무는 십여 개의 포도송이를 맛있게 키워내 많은 교인이 한 알씩 그 달콤한 포도맛을 보게 해 주었습니다. 그 새와 나무에 비하여 우리는 날마다 분주하게는 살지만 새로운 생명도 키워내지 못하고 맛난 열매도 맺지 못한 것은 아닌가, 부끄럽게 돌아보게 됩니다. 지난 성령강림절기 기간 동안의 세상을 보면 더 큰 한탄이 나옵니다. 여전히 전쟁을 벌여 사람을 죽였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힘으로 겁박하여 돈과 영토를 갈취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노동현장에서 여전히 많이 죽었고, 국민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계속되었으며, 기후는 폭염과 폭우를 반복하며 폭력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왜 전체적으로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일까요?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600만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전쟁 후 이름을 바꾸고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15년 동안 가족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발각되어 이스라엘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공직자로서 상관이 시킨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나는 법을 지켰으니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나는 죄가 없다.’ 8개월에 걸쳐 이루어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가족에게 사랑받는 성실하고 평범한 가장처럼 보였다며, 평범한 사람도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아이히만의 잘못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기관, 국가를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않음’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는 살아가는데 전체적으로 점점 나빠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함께 지향하고 있는 가치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결코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릇된 일을 열심히 하면 그만큼 세상을 그릇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함께 지향하고 있는 가치를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못한 채 열심히만 살 때 또 한 명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율되지 않은 악기로 열심히 연주하는 음악은 듣는 사람을 괴롭게 만들 뿐입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악장이 나와 조율을 합니다. 조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준음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은 오보에의 ‘라’음에 맞추어 자기의 악기를 조율합니다. 오보에의 소리가 맑고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정신없이 살아가는 전 세계 사람들을 잠시 멈춰 세우고, 그들이 마음을 조율할 수 있는 맑고 올바른 기준음을 크게 불어주면 좋겠습니다.
2.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라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것을 아셨습니다. 삶의 마지막 시간이 온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제자들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간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들려주시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기적뿐 아니라 일상의 행동들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살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던 제자들과 무엇인가를 마지막으로 해볼 수 있는 이 중요한 순간, 당신 가르침의 핵심 가치를 제자들에게 강하게 각인시켜줄 뭔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식사를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벗으시고는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뭘 하시려는 것이지?’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담아오시더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 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발을 씻겨주는 일은 종의 일이었기에 베드로가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며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후 다시 식탁에 앉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방금 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그 당시에는 주인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종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로 하셨습니다. 주이며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행동의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마태복음 20:28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말씀하셨습니다. 섬김. 예수님은 그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 따라야 할 삶의 본, 모범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생명 있는 모든 이가 따라야 할 본, 모범이지 않습니까? 세상이 이토록 망가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높이고 너를 낮추려 하고, 섬김을 받으려 할 뿐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미국과 러시아가 혼자 위대해지려 하지 않고 가난한 나라들을 위대하게 만들어주기로 노력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관세를 –15%, -50%매겨 돈을 오히려 주고, 땅도 막 주고. 상상만 해도 행복해지지 않습니까? 그런 세상이 정말 이 땅에 이루어진다면 그 세상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식에 대한 말씀의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은 세족식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던 중에 일어난 일로 소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에 다시 식탁에 앉아 발 씻어주심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 저자들, 마태 마가 누가는 세족식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 식사를 소개했습니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나의 몸이다.” 말씀하셨고, 잔을 주시며 “이 잔을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린 나의 피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최후의 만찬 말씀이지요. 그런데 왜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강조한 최후의 만찬 말씀 대신에 세족식 말씀을 강조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보다 예수님처럼 살과 피를 나누어 주며 사는 것, 곧 자신을 낮추고 비워 다른 생명들을 섬기며 사는 것을 요한이 더욱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이 본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는다. 처중인지소오 處衆人之所惡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물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법이 없습니다. 늘 낮으로 곳으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함으로 만물에게 생명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이 딱 그렇게 사셨지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싫어하던 이방 땅과 사마리아에 가셨고, 유대인들이 죄인이라 손가락질 하던 이들 곁에 머물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예수님의 마음, 주와 선생이지만 자신을 낮추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본, 기준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물처럼 낮은 곳을 찾아가 그곳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주며 사셨던 분이 계십니다. 유경촌 주교. 가톨릭 신부님입니다. 그는 서른 살에 신부가 되었고 유학 후 가톨릭 신학교에서 교수가 되어 신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주교가 되었습니다. 유경촌 주교는 낮은 곳의 사람들을 위해 사셨습니다. 세월호 유가족과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아픔을 다독여 주셨고, 노숙인들을 위한 밥집을 열어 새벽마다 직접 식사를 준비해 노숙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주민들, 부당 해고 노동자들, 기후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과 늘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검소하게 사셨고 나누면서 사셨습니다. 여름에는 에어콘 없이 지냈고, 속옷이 뜯어지면 꿰매어 입고, 자신의 생활비를 여투어 두었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셨습니다. 유경촌 주교는 2년 전 담도암 판정을 받고 수술 후 치료 중 지난 8월 15일에 선종하였습니다. 저도 그분에 대해 잘 모르다가 돌아가신 이후에야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그가 죽은 이후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 수 만 명이 조문에 참여했고, 곳곳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 나타나 그가 얼마나 충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던 사람이었는지를 증언했습니다. 그의 후배 신부님이 남긴 글을 보았습니다. 유경촌 주교에게는 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유 주교님. 가수 아이유를 좋아하셔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실 때면 꼭 그 앞에 “아이유,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라는 말을 하셔서 붙은 별명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그런 겸손한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으면, 얼마나 겸손하게 사셨으면 그런 별명이 붙었겠습니까? 유경촌 주교님의 사목표어는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였습니다. 사목표어란, 일종의 목회목표입니다. 죽기 얼마 전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교품을 받은지 10년도 더 지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발을 제대로 닦아주지 못했습니다.” 유경촌 주교, 그는 끝까지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랬기에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에게 흘러가 생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8년 2월 청파 중고등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과 임원수련회를 동시에 진행할 때였습니다. 일 년 동안 중고등부를 위해 수고할 임원들과 새롭게 한 식구가 된 신입생을 위해 세족식을 진행했습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발을 정성껏 닦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식 순서 중간에 먼저 선생님들이 발을 씻어준 임원 두 친구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했는데, 자신들도 그냥 있을 수 없다고, 선생님들께서 자기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셨는데 선생님들의 발을 씻어드리지는 못해도 자기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더러워진 선생님들의 손이라도 닦아드리겠다며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온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 한 분 한 분의 손을 정성껏 닦아드렸습니다. 선생님들이 자신의 발을 정성껏 닦아드렸던 것처럼. 피아노 반주도 없었고 은은한 조명도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마음, 손이라도 씻어주려는 마음, 그 마음이 예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이 우리의 구원이고 희망입니다. 이 세상의 그릇된 기준과 우리의 욕망을 본과 기준으로 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본과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청파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