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8. 수렁과 반석 사이
설교자 김재흥
본문 시40:1~3
설교일시 2025-09-21
오디오파일 s20250921-2.mp3 [2137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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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간절히 주님을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나를 굽어보시고, 나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셨네. 주님께서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진흙탕에서 나를 건져 주셨네.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해주시고 내 걸음을 안전하게 해주셨네. 주님께서 나의 입에 새 노래를, 우리 하나님께 드릴 찬송을 담아 주셨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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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렁 같은 세상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날이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주중에는 여름 지나 처음으로 밤에 창문을 닫고 잤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번 주 화요일은 추분입니다. 추분 이후로는 밤의 길이가 길어지며 점점 더 시원해지겠지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가을하늘이 선물처럼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이런 계절의 변화가 결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계절의 변화를 언제까지 느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무너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침 이번 주 금요일은 세계기후 행동의 날입니다. 2018년 당시 15세 학생이었던 그레타 툰베리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매주 금요일 등교거부를 하고 스웨덴 국회 앞에서 기후변화대응을 촉구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툰베리는 절박했습니다. 미래를 위해 뭐든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학교에 가는 대신 국회로 간 것입니다. 세계시민사회는 그에 동참하는 의미로 매해 9월 마지막 금요일을 세계기후 행동의 날로 정해 보다 적극적으로 기후변화대응촉구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지난 주중에 우리나라 환경부와 기상청은 ‘한국 기후위기 평가보고서 2025’를 공개했습니다. 2024년과 2023년 한반도 연평균 기온은 14.5도와 13.7도로 역대 1,2위를 기록했습니다. 아마 올해 연평균 기온은 그 이상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제주 서귀포의 열대야 일수는 71일로 역대 최다였다고 합니다. 정말 이제는 자연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 뭐든 해야 하는 때입니다.

유대혈통의 폴란드 출신인 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현대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많은 사회학 서적을 남기고 지난 2017년 92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한국의 한 출판사에서 노년의 바우만과 대담을 나누고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라는 책을 냈습니다. 노년에 이루어진 대담이라 바우만이 여러 저작에서 한 말들이 골고루 녹아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고체근대를 거쳐 액체근대 시대다. 1900년대 초중반기인 고체근대 시대는 강력한 규범을 통해 완벽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시대다. 그 시대의 구조는 완고하면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한 번 회사에 취직하면 그 회사는 평생직장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포스트모던 시기를 거치면서 1900년대 말부터 액체근대 시대로 바뀌었다. 강력한 규범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더 이상 완벽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액체처럼 유동적이고, 오래 지속되지 않고, 쉽게 변한다. 사람 사이의 유대는 쉽게 깨어지고,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도 쉽게 저버린다. 평생직장은 사라졌다.’

쉽게 말하면, 지금의 세상은 이전의 세상보다 모든 것이 쉽게 변하는 세상, 그래서 불확실성이 커진 불안한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사회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의 세상은 자연환경적으로도 불확실성이 커진 불안한 세상입니다. 당장 내일 어떤 기후재앙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뿐 아니지요. 지금 전 세계는 높은 물가와 불안정한 경제상황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언제쯤 경제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3차 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총체적으로 불확실하고 불안합니다. 바우만이 말한 액체는 물보다는 훨씬 점성이 높은 ‘수렁’과 같은 느낌입니다. 땅 같아 보여 발을 디뎠는데 그냥 푹 빠지고 마는,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그래서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갖기 어렵고 그저 하루하루 생존에 온힘을 써야하는 수렁. 요즘은 세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렁 같이 느껴집니다. 우리 인류는 이 수렁 같은 상황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까요? 다시 굳건한 땅을 딛고 설 수 있을까요?

2. 수렁에서 반석으로, 다시 반석에서 수렁으로
시편 40편 저자는 어려움에 처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멸망의 구덩이’와 ‘진흙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개역성경은 ‘멸망의 구덩이’를 ‘기가 막힐 웅덩이’로, ‘진흙탕’을 ‘수렁’으로 번역했습니다. 그가 말한 수렁이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질병이었는지, 경제적 어려움이었는지, 사람들의 핍박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점은 그 어려움은 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어려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수렁에 빠진 이는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주님께 도와달라 울부짖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건져주셨고 그로 하여금 반석을 딛고 서게 해 주셨습니다. 수렁에서 반석위로 건짐을 받은 이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주님께 새 노래, 새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 시편 40편 1~3절 말씀은 거의 그 내용 그대로 복음성가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 기울이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주시고 나의 발을 반석 위에 세우시사 나를 튼튼히 하셨네
새노래로 부르자 랄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노래로 부르자 하나님의 사랑을

시편 40편 1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미쁘심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주십시오.” 수렁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던 자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반석 위에 서게 된 것을 감사하며, 그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보호하심이 자기 위에 늘 함께하시기를 빌고 있습니다. 시편 40편은 여기서 끝나면 해피엔딩으로 좋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시편 40편은 12절로 이어집니다. 12절 상반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재앙이 나를 에워쌌다.’ 13절도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너그럽게 보시고 나를 건져 주십시오. 주님,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는 또 다시 수렁에 빠진 것입니다. 1~11절에서는 그가 빠진 수렁에 대한 설명이 없었지만, 12~17절에서는 그가 빠진 수렁이 무엇이었는지 유추할 수 있는 구절들이 나옵니다. 12절 후반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죄가 내 머리털보다도 더 많기에 나는 희망을 잃었습니다.” 죄책감이 그의 수렁이었습니다. 죄책감은 양가적입니다. 죄책감은 우리를 반성하게 하여 그릇된 길을 버리고 올바른 길을 선택하게도 하지만 어떤 때는 우리를 빠져나오기 힘든 깊은 수렁에 빠뜨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14,15절에서 시편 저자는 자기 주위에 자기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자들과 자기가 재난 받는 것을 기뻐하며 비웃는 자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강한 힘으로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그를 조롱하던 사람들이 그의 수렁이었습니다. 자기 안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감정들, 죄책감뿐 아니라 우울감과 불안감도 수렁이 되고, 밖에서 강하게 가해지는 위협이나 조롱도 수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40편 12~17절은 1~11절과는 다른 하나의 독립된 시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이 시편 70편과 거의 동일하고 시편 3편과도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편 40편처럼 1~11절의 시편과 12~17절의 시편을 연속해서 읽는 것이 따로 따로 읽는 것보다 실제 우리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수렁 속에 있다 반석을 딛고 서는 해피엔딩으로만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반석 위에 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적인 문제와 외적인 문제들로 인해 우리는 다시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입니다. ‘수렁에서 반석으로 다시 반석에서 수렁으로’가 무한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수렁을 다시 만났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수렁을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이 수렁 같은 시련을 통해 우리 안에 이전보다 더 크고 단단한 믿음의 반석을 세워야 합니다.

3. 반석이 될 수 있길
지그문트 바우만은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그 방법은 의외로 평범합니다. ‘사랑’, ‘타인을 향한 삶’, ‘마음을 다하는 헌신과 자기희생’. 자주 들어서 평범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것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는 자주 경험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이기적이고, ‘너’보다 늘 ‘나’가 먼저이고, 타인을 위해 좀처럼 헌신하거나 희생하지 않는 요즘 사람들에게서 정말로 보기 힘든 것들입니다.

소설 <침묵>으로 유명한 엔도 슈사쿠가 쓴 소설 중에 <사해 부근에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소설에서 예수님의 일대기를 자기의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율법학자들과 성전의 제사장들과 충돌하시고,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는 이야기는 복음서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소설 속의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지는 못하십니다. 병자들을 정성껏 돌보시기는 하지만 고치시지는 못하십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멀리하던 나병환자들을 돌보고, 죽어가는 노인의 머리맡을 밤새 지키고, 아들을 잃은 어머니 옆에 조용히 앉아 있고, 앞 못 보는 자의 손을 잡아 길을 안내해주기는 했지만 그들을 살리거나 낫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끔 병자를 낫게 하는 경우도 있기는 했습니다. 어떤 이가 전염병에 걸려 격리된 집에서 홀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 그의 땀을 닦아주고 물을 먹이고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약초 달인 물도 떠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내가 곁에 함께 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며칠을 하였을 때 그 환자의 열이 떨어지고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신학생 시절 이 소설을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병을 고치지 못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낯선 것을 넘어 신성모독처럼 다가왔습니다. 왜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한 것이지? 왜 예수님을 이렇게 무능하게 그린 것이지? 너무 예수님의 모습을 인본주의적으로 그린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청파교회 청년들과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 방문하기 전 다시 소설을 읽어보았습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와 전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슈사쿠가 신성모독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을 대신 전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너희는 내가 했던 것처럼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했던 것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할 수는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왜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빌라도와 예수님께서 나누신 대화 장면입니다. “황제는 오래가지 못하리라고 했다면서?” “황제보다 예루살렘보다 로마보다 오래오래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있습니다.” “로마보다 오래오래 영원히 지속되는 게 무엇인가?” “그 사람들의 인생에 내가 닿은 흔적,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스치면서 남긴 흔적, 그것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내 삶에 남긴 흔적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내 속에 든든한 반석으로 남아 그 흔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런 흔적을 남기며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있습니다. 누군가 내 삶에 남긴 흔적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내 속에 깊은 수렁으로 남아 그 흔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고 슬픈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수렁이 되어 살지 맙시다. 서로에게 수렁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합시다. 반석이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주님께서 마음을 다한 사랑과 헌신과 희생을 통해 우리의 반석이 되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마음을 다한 사랑과 헌신과 희생을 통해 반석이 되어 줍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이 세상의 모든 수렁을 메우지는 못해도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설 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귀한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5년 09월 21일 10시 05분 3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