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9. 우리 서로 꽃이 되어
설교자 김재흥
본문 계 1:12-16
설교일시 2025-09-28
오디오파일 s20250928-2.mp3 [1868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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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발은 풀무불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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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암담함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아까 예배를 여는 말에서 말씀드렸듯이 지난 한 주간 참 속을 많이 태우며 보냈습니다. 날씨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1년만에 진행하는 전교인 야외예배인데 행사 당일에 대한 일기예보가 그날그날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예보에 오늘 날씨는 흐림이었는데, 주초에는 오전에만 비로 바뀌었다가, 목요일부터는 하루종일 비로 바뀌었습니다. 야외예배를 취소해야 하나? 취소한다면 예약한 시설의 위약금은 얼마인가? 식사 예약도 취소가 되는가? 식사 취소가 안 되면 거기서 만든 밥과 반찬을 교회로 옮겨와야 하나? 또 설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야외에서 예배드릴 때 설교와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설교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이 좀 암담해졌습니다. 그러다가 평온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암담함은 사실 그렇게 큰 암담함이 아니다. 이런 암담함은 ‘암담하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아쉽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는 그보다 훨씬 큰 암담한 일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날벼락처럼 찾아온 질병이나 사고, 유리조각처럼 깨어진 인간관계, 오래 지속되는 경제적인 궁핍 같은 것이야말로 우리를 암담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런 어려움이 하나만 찾아와도 힘든데 그런 일들이 설상가상처럼 겹쳐서 찾아올 때 우리는 정말 암담해집니다. 모든 것이 환히 잘 보이는 대낮에도 가야할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눈은 어두워지고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집니다. 그뿐 아닙니다. 시대와 세상이 우리에게 드리우는 암담함도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학살과 강대국의 횡포가 우리를 암담하게 만듭니다. 그런 불의하고 구시대적인 전쟁과 학살과 횡포가 21세기에 버젓이 반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것을 지금 당장 멈추게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우리를 무력하고 암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태풍과 대형산불과 같은 자연재해도 우리의 마음을 암담하게 만듭니다. 그런 자연재해가 반복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언제고 우리 자신이 그 자연재해를 입는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암담하게 만드는 일이 많아져서일까요?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의 우울증과 공황장애 발생비율은 이전보다 높은 비율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주중에 신문기사를 보니, 지난 2024년 우리국민의 자살률이 2023년보다 6.6%이상 증가했습니다.

우리는 이전시대보다 훨씬 많은 것을 누리며 삽니다. 더 좋은 것을 먹습니다. 더 많이 먹습니다. 더 좋은 것을 입습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삽니다. 더 좋은 차를 탑니다. 더 많은 여행을 다닙니다. 더 좋은 전화기를 사용합니다. 더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점점 더 삶을 힘들고 암담하게 느끼며 사는 것일까요? 지금 우리 삶에 드리워진 짙은 암담함에서 벗어날 길은 무엇일까요?

2. 계시록 : 어둠 속 빛이 된 얼굴
요한계시록은 참으로 암담하던 시절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이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주후 81년에서 96년까지 15년간 로마제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원로원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주님과 하나님 (Dominus et Deus)으로 부르게 명령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그의 사후 그가 선정을 하였다고 여겨질 때, 백성들이 그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그를 신격화했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자신 살아있을 때 자기 스스로를 신격화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동상을 제국 여러 곳에 세우고 자신을 경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자신을 신으로 경배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형벌을 가했는데 자신의 사촌을 처형시키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도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야훼 하나님밖에 계시지 않았고, 기독교인들에게 주님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미티아누스는 반유대교 법령을 선포하여 유대교로의 개종을 금지시켰으며, 유대인들이 납부하던 성전세를 아폴로 신전유지비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도 박해했는데 그 박해의 범위는 로마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오늘의 튀르키예 지역인 소아시아에까지 미쳤습니다. 그 당시 많은 기독교인이 도미티아누스와 로마를 비판했는데,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돌보던 요한도 그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요한은 로마에 의해 체포되어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요한은 자신도 유배된 몸이었지만 도미티아누스와 로마가 드리운 어두운 그늘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이 짓눌리지 않도록 힘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밧모 섬에서 갇혀 지내던 어느 날, 요한은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었고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으며, 머리털은 흰 양털과 눈과 같이 희었습니다. 눈은 불꽃같고 발은 놋쇠 같았습니다. 그리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요한은 비록 어둠의 땅 유배지에 갇혀 지냈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주님이 요한에게 힘이 되셨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본 주님,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되시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되시는 주님을 책에 기록하여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냈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되신 주님께서 동일하게 그들에게도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요한은 어떻게 그런 어둠이 짙은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해같이 빛나는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물론, 주님이 보여주셨으니까 본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미 자신 속에 빛으로 자리잡고 있던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이미 해같이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갈릴리 어부시절 로마가 가져다 준 어둠에 짓눌려 아무런 희망 없이 고기나 잡던 자기에게 다가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주신 얼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며 밝고 인자한 표정을 지으시던 얼굴, 병자 한 명 한 명을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시던 얼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웃으며 식사하시던 얼굴, 죽어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외치며 눈물 흘리시던 얼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자신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시던 얼굴, 죽음 이후 모든 게 끝났는줄 알았는데 빛으로 다가오셔 ‘평안하냐?’ 물으시던 얼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빛으로 자리잡은 얼굴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얼굴은 눈을 감아도 보이고, 어둠을 만날수록 더욱 밝게 보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얼굴이 있습니까?

3. 우리 서로 꽃이 되어
함석헌 선생님은 <얼굴>이란 시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그런 얼굴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보고 싶은 얼굴은 이런 얼굴이었습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아,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마음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얼굴.
우리로 하여금 세상도 넘어서고, 우리 자신도 넘어서게 하는 얼굴, 시간과 욕망도 넘어서게 하는 얼굴, 우리를 하늘에 연결시켜주는 얼굴, 우리의 작은 가슴을 바다 같이 넓혀주는 얼굴, 이기심을 버리고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얼굴,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얼굴, 언제나 바라보고 싶은 얼굴. 그런 얼굴이 어둠 속 빛이 되는 얼굴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예수님의 얼굴이 그런 얼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직접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면, 우리는 서로의 얼굴 속에서 살짝 살짝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은 한 장 전체가 거의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 함께 옥에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등 36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참 암담한 순간을 많이 겪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있었고, 함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유대기독교인들로부터도 많은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많은 이름들과 같이, 떠올리는 것만으로 어둠 속 빛이 되는 얼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 지하 예전 청년부실 한쪽 벽면에는 동요 가사가 새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내 동무야’라는 곡입니다. 한 15년 전쯤 어느 모임에 갔다가 처음 듣게 되었는데 듣는 순간 마음에 확 와닿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땅에 이루려던 공동체가 저런 공동체였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도 이 노래를 가르쳐 주었는데 모두가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벽에 가사를 새겼습니다. 그리고는 예배 때, 생일 축하할 때 불렀고, 누군가 멀리 유학을 갈 때는 눈물을 흘리며 불렀고, 결혼식 축가로도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내 동무야 네 마음은 꽃같아 / 외로울 때 너를 보면 어느새 환해지네
나도 네가 힘들 때 꽃이 될 수 있다면 / 우리 서로 꽃이 되어 영원히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어두울 때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지는 공동체, 힘들 때 그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공동체, 서로에게 꽃이 되어 주는 공동체. 그것이 예수 공동체입니다. 우리 청파가 그런 신앙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 공동체는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함께 고생과 기쁨을 나누고, 함께 울고 웃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힘써 따라갈 때, 그런 공동체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점점 암담해져가는 이 세상에 그런 귀한 믿음과 사랑과 빛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5년 09월 28일 11시 50분 5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