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3. 반면교사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계3:1-6
설교일시 201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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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교사
계3:1-6
(2018/10/28, 종교개혁기념주일)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나는 네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참담한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마틴 루터가 타락한 중세 가톨릭의 개혁을 촉구하는 봉홧불을 밝힌 지 벌써 501년이 되었습니다. 개혁의 핵심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Ad Fontes‘, 곧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곳곳에서 메아리쳤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원 혹은 핵심은 무엇일까요?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출애굽 정신과 십자가 정신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근원일 겁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산하기만 합니다.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뜻의 라틴어 문장입니다. 교회는 현상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를 돌아보며 부단히 새롭게 개혁될 때 건강해집니다. 아무리 잘 닦은 창문도 며칠만 지나면 먼지가 앉게 마련입니다. 우리 신앙의 창문에도 먼지가 쌓이곤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의 본질로부터 멀어질 때도 있고, 의도적으로 본질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성찰하지 않을 때 신앙은 습관이 됩니다. 관습적인 신앙행위를 하면서 우리는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본질로부터 멀어진 교회는 ‘신의 무덤‘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싸늘합니다. 명성교회의 세습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만민중앙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에서 벌어지는 낯뜨거운 추문들이 우리를 참담하게 만듭니다.

감리교회의 현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감독회장 선거와 관련된 분쟁으로 감리교회는 여러 해 동안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뽑힌 이가 무자격자라고 소송을 걸자, 법원은 그의 직무를 중지시키고 감독회장 직무대행을 임명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감리교회의 문제를 잘 풀어 보라는 취지였을 겁니다. 그러나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이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다시 임시감독회장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직무를 정지시켰던 감독회장을 복귀시켰습니다. 교회는 세상 앞에 스스로 자정 능력이 없는 단체임을 드러냈고, 존경받아야 할 직책인 감독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 셈입니다.

목사들이 모이면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변호사들이 교회 덕분에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들은 말입니다만 교계 지도자들이 골프장에서 회동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왜 좋은 교회 시설을 두고 거기서 모여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나름 잘 나가는 목사라는 사실을 서로에게 확인시켜 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무리한 건축을 감행하다가 빚에 몰려 교회가 무너지는 경우도 비일비재입니다. 심지어 잘 지은 예배당을 이단들에게 넘기는 일도 많습니다. 주님이 교회를 허락하신 까닭은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주류 세계에 맞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교회는 사람들이 저마다 높아지기 위해 다른 이들을 짓밟는 것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과 나눔에 근거한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빈민 운동가였던 제정구 선생의 말대로 가짐 없는 큰 자유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처연하지만 우리가 바로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사데 교회의 거울상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인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차분하지만 통렬합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계3:1) 무서운 선언입니다. 명실상부名實相符 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름과 실상이 꼭 들어맞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도 이래저래 허명이 조금 알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만, 알려진 것만큼의 삶의 열매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중세의 신학자인 아벨라르와 한때 연인이었다가 수녀가 된 엘로이즈가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책입니다. 아벨라르의 편지 가운데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는 당대의 대학자인 리옹의 안셀모를 찾아갔다가 느낀 바를 적고 있습니다.

"안셀모는 다수의 청중 앞에 있을 때에는 그야말로 경탄할 만한 존재였으나 질문자와 마주 앉았을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 언어 구사는 절묘했지만 내용은 알맹이가 없었으며 이론은 공허했네. 그가 강의에 불을 붙였을 때 그의 집은 연기로 가득 차긴 했으나 빛이 비치지는 않았던 것일세. 안셀모라는 나무는 잎이 무성하여 멀리서 볼 땐 당당하게 느껴지지만, 가까이 가서 주의깊게 살펴보는 사람은 그 나무에는 열매가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지."

그의 평가가 정당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도 주님 앞에 서면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들에 대해 경계하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딤후3:5) 이것은 우리도 일쑤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종교적인 언어를 잘 쓰는 사람일수록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지향이 다른 사람들을 더 무시하고 혐오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가장 거룩한 것처럼 자기를 포장하는 사람 가운데 위선적인 이들이 많습니다. 겉과 속이 똑같을 수는 없다 해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라면 그 둘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라는 선고를 듣게 된 것일까요? 사데라는 도시는 주전 6세기 리디아의 왕인 크로이소스가 다스릴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그곳에서 귀금속 자원이 많이 났고 양모업도 성행했기 때문에 사데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사데 근처에는 거대한 왕릉들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부유함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그런데 부유함의 이면에는 짙은 그림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힘 있는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착취하고 억압합니다. 약자들은 존엄한 인격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언제든 활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취급되곤 했습니다. 미다스 왕의 신화를 우리는 잘 압니다. 디오니소스 신의 사랑을 받던 그는 자기가 만지는 것이 다 황금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고, 결국 그 능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황홀했겠지요. 그는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이 되리라는 기대를 품었습니다. 하지만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했기에 그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딸도 그의 손이 닿자 황금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이 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신화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다른 생명 있는 존재를 사물로 변질시킨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이것을 일러 ‘물화物化‘라 하는데, 독일말로 물화를 뜻하는 ‘Verdinglichung’라는 단어 속에는 물건을 뜻하는 ‘Ding’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는 것은 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사데 교회는 문제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결국 그 교회도 사데라는 도시의 운명 그대로 부유해지면서 타락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가 부유해지고 영향력이 커지면 반드시 타락하게 마련입니다. 자기에 대해 과신하거나, 자기들끼리 행복한 세상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가톨릭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면벌부’라는 비성서적인 교리까지 만들어냈습니다. 교회는 공포심을 주입함으로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든든히 서가는 것 같아도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사데교회를 우리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 대오각성
하지만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영적인 잠에 빠져 있지만 아직 끝은 아닙니다. 주님은 “깨어나라“고 촉구하십니다. 요한의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바울 서신 도처에서 깨어나라는 명령과 만납니다. ‘깨어나라‘는 말은 낮의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 갑옷으로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살전5:8)라고 권고합니다. 낮에 속한 사람은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않은 사람입니다(롬13:13). 낮에 속한 사람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이들로 대하고, 그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진력하신 예수님처럼 살 때 우리는 비로소 깨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은 세 가지 과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주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야 합니다. 일종의 기억 투쟁입니다. 진리를 뜻하는 헬라어 ‘아레테이아’에는 망각을 뜻하는 ‘레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고도 일상의 분주함 때문에 혹은 현실에서 겪는 괴로움 때문에 은총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데 대한 일종의 저항입니다. 예언자들은 출애굽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백성들을 깨우쳤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자꾸 여쭈어야 합니다.

둘째, 그것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유교의 가르침 가운데 제가 명심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이 그것입니다. 오로지 하나에 집중하여 이리저리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인생의 길로 삼았으면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말고 끝내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근육이 생깁니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라야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셋째,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후회가 아니라 삶의 변화입니다. 나 중심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으로의 변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며칠 전 사람들이 ‘목사들의 목사‘라 부르던 유진 피터슨 목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경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쓴 ‘메시지‘ 성경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let’s go‘였답니다. 자기를 맞으러 온 천사들에게 한 말일까요? 그는 홀가분하게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안식에 들었습니다. 저는 그를 추념하기 위해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그의 책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꺼내놓고 여기저기 펼쳐보았습니다. 책 제목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19세기 영국의 예수회 사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d Manley Hopkins, 1844-1899)의 시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앞부분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물총새에 불이 붙고, 잠자리 날개가 빛과 하나 되듯,
우물 안으로 굴러든 돌이 울리고,
켜진 현들이 저마다 말하고, 흔들리는 종이
자신의 소리를 널리 퍼뜨리듯,
모든 피조물은 한 가지 같은 일을 한다.
각자 내면에 거주하는 제 존재를 밖으로 내보낸다.
자기 스스로를 발현한다. 그것이 ‘나라고 명시한다.
‘내가 하는 것이 나이며, 그 때문에 내가 왔다’고 외친다.
(하략)

시인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모든 피조물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다움에 일치하고자 하는 평생의 노력”(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 양혜원 옮김, 복 있는 사람, 2018년 6월 27일, p.19)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와의 깊은 일치를 꿈꾸어야 합니다. 늘 그러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참회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상록수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냐고 묻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곤 합니다. 하지만 절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불신앙임을 저는 잘 압니다.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에 홍콩 출신의 아시아 여성 신학자로 미국 성공회 신학교의 곽푸이란(Kwok Pui-lan) 교수가 한국에 와서 강연을 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강연을 1990년에 들은 바 있습니다. ‘정의, 평화, 창조 세계 보전’(JPIC) 대회에 온 그는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중 조셉 콘라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인용했습니다.

“한 때 훌륭한 선원이 되기를 늘 원했던 한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때 그는 배 위에서 많은 순례자들을 돕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위험해요, 배를 버리세요’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젊은이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즉각 배로부터 뛰쳐나갔다. 놀랍게도 그 배는 침몰하지 않았고, 그 순례자들은 해변으로 무사히 도착하였다.”([기사연 무크2],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90년 6월 30일, p.92)

곽푸이란은 1997년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다는 사실을 당혹스럽게 받아들이는 많은 홍콩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현실에 빗대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어 이 이야기를 지구의 상황으로 확장해서 성경공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구는 오늘날 잠겨가는 배와 같고,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희망을 잃는다면 우리는 배를 포기할 수 있다. 좌절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졌을 때 나는 한국의 노래를 부르곤 한다”(앞의 책, 같은 페이지). 그 노래는 ‘상록수‘입니다. 그는 무대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한국어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비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그 노래는 서럽고 쓰려도 땀을 흘리며 깨우치고,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는 이들이 있는 한 희망은 있는 거라고 말합니다. 한국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희망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이것을 교회에도 적용해 보면 좋겠습니다.

끝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흰 옷을 입혀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인도해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10월 28일 12시 27분 1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