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 분부하신 그대로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14:25-31
설교일시 20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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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부하신 그대로
요14:25-31
(2020/03/22, 사순절 제4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다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신 그대로 내가 행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일어나거라. 여기에서 떠나자."]

∙파라클레토스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전쟁 이후 세대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동구권이 해체되면서 무너진 것 같았던 장벽이 세계 도처에 다시 세워지고 있습니다. 각국의 공항이 거의 폐쇄되고, 사람들 사이의 왕래가 끊기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앞으로 두 주 동안 각종 모임들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시간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속상하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 혹은 ‘잠시 서로 떨어져 있기‘가 길어지고 있지만, 영적인 연결고리가 부실해지면 안 됩니다. 이런 때일수록 서로를 위해 더 기도하고, 그리워하고, 더러 안부도 물으며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나희덕 시인이 <창작과 비평>에 쓴 글을 읽다가 ‘친족 만들기’(making kin)이라는 용어와 만났습니다. 도나 해러웨이가 사용한 용어인데 혈연이나 계보로 묶인 관계가 아니라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형성된 관계 혹은 그런 노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누군가의 ‘설 땅’ 혹은 ‘고향’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외로운 이들의 친족이 되어주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교우들께서 상당히 많은 분량의 마스크를 보내주셨고, 고통 받는 이들의 곁이 되는 일에 사용해달라고 많은 헌금을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서 놀라고 또 마음 깊이 감동했습니다. 마스크는 후암동 쪽방촌과 이주 노동자들을 돌보는 기관에 전달했습니다. 헌금은 정말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적절하게 나누어질 것입니다. 나희덕 시인은 시 쓰기가 일종의 ‘친족 만들기’라고 말합니다. 그는 시의 존재 이유를 만나기 어렵던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 역시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대가 어려울수록 우리 속에 있는 선의와 친절과 명랑함을 끄집어내 주위를 밝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도 우리 마음이 온통 예수가 아닌 코로나19와 선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려운 때일수록, 앞이 안 보일 때일수록 예수님에게 길을 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옴을 감지하신 예수님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기 위해 하신 말씀 가운데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보혜사는 성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혜사라고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는 위로자, 상담자, 대언자, 변호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경 번역자들은 파라클레토스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보혜사保惠師라는 조어를 만들었습니다. ‘지킬 ‘보’, ‘은혜 혜’, ‘스승 사’. 지키고, 생명을 선물로 주시고, 가르치는 분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시나요?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물론 그들이 알고 있는 보혜사가 이미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보혜사이셨습니다. 요한1서 2장 1절에는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변호해 주시는 분’이 바로 파라클레토스이고, 그분이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세상에서의 모든 일을 다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시지만 제자들은 고아처럼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께서 오셔서 그들 속에 머무시면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또 주님이 그들에게 들려주셨던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공원을 걷다보면 문득 어떤 말씀이 떠올라 자꾸 곱씹게 되고, 어떤 찬송이 떠올라 흥얼거릴 때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툭 건드리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이 이미 가르치신 것을 심화시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건 마치 굳은 지각을 뚫고 솟아오르는 새싹처럼 신선합니다. 시인 구상 선생님은 모질던 회오리바람이 잦아들며 자기 속에 신령한 새싹이 돋아난 순간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둠으로 감싸여 있던 만물들이
저마다 총총한 별이 되어 반짝이고
그물코처럼 엉키고 설킨 事理들이
타래실처럼 술술 풀린다."
(<신령한 새싹> 부분)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은 마치 우리의 어두운 심령에 불이 밝혀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또 이웃들에게 선물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샘처럼 솟아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 확장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때 사람은 맑아지고 따뜻하고 친절해집니다. 주님은 보혜사를 보내주실 뿐만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이레네eirene‘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나라 간에 전쟁이 없는 상태, 개인 간의 조화 혹은 일치, 안전, 번영,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든든함 등이 그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에이레네의 제일 좋은 번역어는 ‘안녕’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녕安寧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탈 없이 평안한 상태를 뜻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안녕 혹은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안의 풍랑이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14:27) 이르십니다. ‘근심하다‘(타라쏘, tarasso)는 말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 그래서 내적으로 동요하고 있는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두려워하다‘(다일리아오, deiliao)는 겁에 질려 용기를 잃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현실이 힘든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데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자들이 겪는 시간과 우리가 겪은 시간이 겹치고 있습니다.

지금 소상공인들은 물론이고 기업인들과 직장인들, 취업 준비생, 비정규직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를, 월세를 내기 어려운 개척 교회 등 많은 이들이 매우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대출 만기는 돌아오고, 임대료는 내야하고, 일하는 이들에게 지급해야 할 임금조차 마련하기 힘듭니다. 취업 시험, 토익 시험 등이 미뤄지면서 젊은이들도 점점 맥이 빠집니다. 이 난관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상황이 어려울 때면 사람들은 버릇처럼 탓할 사람을 찾습니다. 물론 누군가의 결정적인 잘못으로 이런 상황이 초래되었다면 그를 비판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어려움을 견딜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고문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힘들긴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 상황을 이겨낼 것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는 이 곤란한 상황보다 큰 존재들입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
감리교회를 시작한 존 웨슬리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그는 1735년 10월 14일, 신대륙이었던 미국 조지아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났습니다. 이듬해 그들이 탄 배는 1월 23일부터 큰 풍랑에 시달렸습니다. 미국에 도착하기 열 이틀 전이었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두려워했는데, 그 배에 타고 있던 독일 출신의 모라비안 교도들은 매우 평온했습니다. 그들은 신중했고, 겸손하고 온유한 표정으로 겁에 질린 다른 승객들을 돌보아주었습니다. 1월 25일, 세 번째 큰 풍랑이 닥쳐오자 사람들은 더 큰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저녁 7시에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장소에 갔습니다. 누군가 시편을 낭송하고 있을 때 큰 파도가 덮쳐와 큰 돛대가 부러졌고 배는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마치 큰 바다의 깊은 물이 그들을 삼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모라비안 교도들은 고요히 찬송을 불렀습니다. 나중에 웨슬리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묻습니다. “당신은 두렵지 않았습니까?” “아니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부인들과 아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나요?” 그러자 그는 부드럽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우리 아내들과 아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날의 경험은 웨슬리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그 때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 보여준 그 평온한 모습을 떠올리며 두려움과 절망을 이겨냈습니다. 그 기억은 그를 지켜준 영혼의 닻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 사람, 주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을 누립니다.

시편 131편 기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 영혼의 평안함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2절). 평온한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시인의 고백이 참 가슴에 와닿습니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1절)

지금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분들이 계십니까? 허둥거리거나 불퉁거리지 마십시오. 어차피 견뎌야 할 시간이라면 차라리 ‘이건 약간 쓰군! 하지만 나는 결국 이겨낼 거야’라고 말하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일어나거라
주님은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십니다. 보냄을 받은 자의 영광은 보내신 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8:28). 이 사실을 아시기에 주님은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아직 십자가 수난의 신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실망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겪어낸 후에야 얻는 깨달음이 있는 법입니다. 설익은 확신보다는 실망 혹은 절망이 정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께 등 돌리게 만드는 자입니다. 지배의 욕망과 쾌락의 열정에 부풀어 오른 채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자입니다. 독점과 경쟁과 지배의 세상을 깨뜨리고 나눔과 협력과 돌봄의 세상을 이루려는 주님의 길에 함정을 파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생명에 대한 지배권이 없습니다. 주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싸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이런 당당함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다만 하나님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입증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보내신 분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그 목숨을 거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향해 살았고,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미 죽은 자를 죽음으로 위협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주님은 마침내 두려움 없이 말합니다. “일어나거라. 여기에서 떠나자.” 겟세마네의 시간을 향해 주님은 담대하게 나가십니다. 피하여 달아나려는 이에게 어둠의 시간은 공포이지만, 마주 서고 뚫고 나가려는 이에게는 더 큰 생명의 문입니다. 사순절은 바로 그런 삶을 향해 고개를 들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우리 교우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 한 주간 동안에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고, 우리 내면에 깃든 평화와 고요함으로 주위를 물들이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3월 22일 11시 55분 4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