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4. 북돋우어 주시는 하나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138:1-8
설교일시 2020-11-01
오디오파일 s20201101.mp3 [4393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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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돋우어 주시는 하나님
시138:1-8
(2020/11/01, 추수감사주일)

[주님,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들 앞에서, 내가 주님께 찬양을 드리렵니다. 내가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경배하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주님의 진실하심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과 말씀을 온갖 것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내가 부르짖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응답해 주셨고, 나에게 힘을 한껏 북돋우어 주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은 모든 왕들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영광이 참으로 크시므로, 주님께서 하신 일을 그들이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높은 분이시지만, 낮은 자를 굽어보시며, 멀리서도 오만한 자를 다 알아보십니다.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는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에게 새 힘 주시고, 손을 내미셔서, 내 원수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시며,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그들에게 갚아주시니, 주님,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이 모든 것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없으면 없는 대로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앞둔 지난 주일, 저는 교우들께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할 수 있으면 제게도 알려달라 부탁드렸습니다. 45분 정도가 응답해 주셨습니다. 모두가 다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또 창조하려는 눈물겨운 노력들이 참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수십 년 일하던 일터를 떠난 후에 오히려 다양하게 열리는 생의 가능성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교우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재능을 다른 이들에게 무상으로 나누며 무한량의 기쁨을 누린다고 말했습니다. 가슴으로 아이를 낳은 부부도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 줄 아시지요? 누군가의 품이 되어 주려는 아름다운 실천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고통이 없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 등불 하나 밝히는 마음으로 사시는 교우들이 있어 놀라웠습니다. 저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에 응답하여 삶의 지향과 방식을 바꿨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으키는 사건에 다만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박국에 나오는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합3:17-18)

‘없고‘, ‘없을지라도’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있음’은 좋은 것이고 ‘없음’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핍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결핍은 영혼의 허기와 같아서 채워지지 않으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 곧 양식, 주거, 여가, 보건 의료 혜택조차 누릴 수 없다면 그건 문제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때 사회는 건강해집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런 기본적 필요가 아니라 욕망에서 비롯된 결핍감입니다. 욕망은 언제나 욕망을 매개하는 이들 때문에 발생합니다. 현대인들은 기호를 소비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기호는 나를 다른 이들과 엮어주거나 구별되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유명 브랜드의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품질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의 계급 혹은 계층 상승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호를 소비하는 것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는 순간 우리는 거미줄에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솝이 들려주는 우화 중에 ‘여우와 포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고픈 여우가 잘 익은 포도를 보며 침을 흘렸지만 너무 높게 열려 따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저 포도는 시어서 먹을 수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우화를 지레 포기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기 위해 인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지혜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삶의 문법을 따라 사느라 허덕이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문법을 만들어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게 낫습니다. ‘난 됐어’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비참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됩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더 큰 세계에 접속되어야 합니다.

∙숨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
시편 138편은 개인 감사시에 속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바쳤던 기도가 받아들여지자 친척과 친구들과 함께 서원을 갚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며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 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3절은 하나님께 온 마음을 기울여 감사드리는 까닭을 밝힙니다. 4-6절은 주님의 위엄과 영광을 노래합니다. 7-8절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두려움 없이 맞이할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성전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생각하며 그는 감사의 심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처지에서 살았는지, 그를 힘들게 했던 현실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삶의 곤경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맥이 빠져 삶의 의욕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의 힘을 한껏 북돋우어 주셨습니다. 그 곤경이 무엇인지가 특정되어 있지 않기에 이 시는 우리의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많은 어려움을 경험합니다.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이 갈마들며 우리 삶을 다채롭게 만듭니다. 예기치 않은 일들이 무시로 찾아와 우리를 비틀거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응답이란 어떤 것일까요? 바라던 바가 이루어진 것일까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를 괴롭혔던 문제가 다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망합니다. 하지만 실망할 것 없습니다. 기도의 보람은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지만 그 상황을 대하는 우리 마음 혹은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시련조차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 또한 기도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인 동시에 우리에게 힘을 한껏 북돋우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제자들을 찾아와서 평화의 인사를 하신 후 그들 속에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요20:22). ‘숨을 불어넣다‘라는 뜻의 ‘엠프싸오emphysao‘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오직 여기에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 성경에는 이 단어가 몇 곳에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사람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셨다고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 숨은 일으키는 힘입니다. 아르메니아의 옛 예배당들을 찾아다니다가 프리즈 부분에 있는 부조에 뺨을 부풀려서 크게 숨을 내쉬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낯선 형상이긴 하지만 그걸 볼 때 왠지 큰 격려를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마음 조리며 살고 있는 이들 속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힘을 북돋우어 주십니다. 주님의 생기를 받은 사람은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기 인생을 삽니다.

∙멀리 계신 듯하나 가까이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고백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시인은 주님의 영광이 크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놀랍기 때문에 왕들이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개인의 감사시가 왕들의 감사로 이행하는 과정이 이 시에서는 다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런 단절적 비약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다니엘서를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어느 날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 왕은 불길한 꿈을 꾼 후 번민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하늘을 찌를 듯 크게 자라던 나무가 어느 순간 다 베어지고 그루터기만 남게 된 광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왕의 부름을 받은 다니엘이 그 꿈 속에 담긴 두려운 메시지를 왕에게 전했습니다. 스스로 커져서 공의를 무너뜨리는 왕의 제국을 하나님께서 벌하시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준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은 예고되었던 큰 시련을 겪은 후에야 제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찬양합니다.

“그의 통치 영원하고 그의 나라 대대로 이어진다. 그는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와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뜻대로 하시지만, 아무도 그가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하고 무슨 일을 이렇게 하셨느냐고 그에게 물을 사람이 없다.”(단4:34b-35)

비슷한 고백이 다리오 왕의 입에서도 터져 나옵니다. 사자굴에서 살아나온 다니엘을 본 다리오 왕은 경외심에 가득 차서 자기 백성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단6:26)고 고백합니다. 이방의 왕들까지도 찬양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한 없이 높은 분이시지만, 낮은 자를 굽어보시며, 멀리서도 오만한 자를 다 알아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현실을 무한히 뛰어넘는 분이시지만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섬세하게 살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공의를 세우기 위해 우리 현실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낮은 자를 굽어보신다는 말은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말이고, 오만한 자를 알아보신다는 말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이들의 행위를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기에 우리는 현실의 어지러움 속에서도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급진적 낙관론
이 확신이 있기에 시인은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여 세상의 모든 불행이 우리를 비켜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가 다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 숨을 불어넣으시어 우리로 일어서게 하십니다. 우리는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는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에게 새 힘 주시고, 손을 내미셔서, 내 원수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시며,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니다.”(7)

믿음의 사람들은 급진적인 낙관론자(radical optimist)가 되어야 합니다. ‘급진적‘이란 말은 ‘목적, 이상 등을 급격히 실현하려는 경향’을 의미하지만, 신학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영어로 급진적이라는 뜻의 ‘radical’은 뿌리를 뜻하는 라틴어 ‘radix‘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래디컬하다는 말은 뿌리로 돌아간다 혹은 현상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뿌리의 관점에서 사건을 본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더 근본적인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는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 도와주시고, 숨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중에 제게 문자나 메일을 보내주신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움과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으시고, 어려움 가운데서 오히려 소중한 사람들과 만나게 하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목사보다 더 깊은 믿음의 세계 속에 살고 계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1:6).

지금도 여전히 고난의 한복판을 지나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쓰라림의 시간이 언제 지나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숨을 불어넣으려 하실 때 거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숨을 깊이 들이 마시고 고난의 언덕을 넘으십시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당신의 숨으로 삼아 이웃들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싶어하십니다. 이 척박한 역사 속에 생명과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으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일터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큰 일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 속에 기쁨을 안겨주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우리 사랑의 동심원이 점점 커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다니엘의 신실한 믿음이 결국 이방 왕들의 신앙 고백을 이끌어 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이 하나님 살아 계심의 증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11월 01일 10시 34분 3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