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1. 어두운 시대의 그리스도인
설교자 신진식
본문 출10:21-23
설교일시 2016/12/18
오디오파일 s20161218.mp3 [1312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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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그리스도인
출10:21-23
(2016/12/18, 대림절 제4주)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늘로 팔을 내밀어라. 그러면 손으로 더듬어야 다닐 만큼 짙은 어둠이 이집트 땅을 덮을 것이다." 모세가 하늘에다 그의 팔을 내미니, 이집트 온 땅에 사흘 동안 짙은 어둠이 내렸다. 사흘 동안 사람들은 서로 볼 수도 없었고, 제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빛이 있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대림절 4개의 촛불이 참 밝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대림절의 4번째 초를 밝히며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 성령으로 한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묵상했습니다. 이 복음서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 사이에 서 있는 마리아의 마음의 풍경이 잘 담겨있습니다. 당혹스러움, 심사숙고, 의문 그리고 순종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풍경은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 사이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한 인격을 통해 어떻게 열매 맺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의 풍경을 많은 화가들이 ‘수태고지’라는 제목으로 그렸습니다. 중세 르네상스 시대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였던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도 15점이나 되는 수태고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특별히 안젤리코의 그림을 주목하는 것은 그가 일반 화가가 아니라 도미니코 수도회의 성직자였고 후에 수도원장이 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관상하라, 그리고 전하라.” 도미니코 수도회의 이 모토와 설교자들의 수도회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도미니코 수도회가 추구하는 그림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복음서의 이야기를 전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안에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인 의미들을 모두 담는 것이었습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두 편의 수태고지 작품(1430-32, 프라도 미술관, 스페인; 1433-34, 디오체사노 미술관, 이탈리아)을 보면서 세 개의 이미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가 밟는 어두운 땅의 이미지', '두 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포개 감싸는 마리아를 비추는 빛의 이미지', 그리고 '마리아의 오른쪽 무릎 위에 펼쳐있는 성경의 이미지'입니다. 이 이미지들이 대림절 마지막 주를 보내는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의 신비와 의미를 환기시켜주는 이미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어두운 땅, 빛, 그리고 토라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처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는 B.C. 6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바벨론 포로기 입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모두 폐허가 되었고, 기름부음 받은 왕은 죽임을 당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서 뿌리 뽑혀 동쪽 바벨론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회적으로는 어떤 권리도 없이 바벨론 사회의 주변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고, 정신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가 바벨론 제국의 신 마르둑에게 완전히 패배했다는 수치심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뿌리와 단절되면서, 표류한다는 느낌, 방향을 상실했다는 느낌, 하찮은 존재로 시들어 간다는 느낌이 이스라엘 포로공동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바랜 두루마리들을 읽으며, 이 고통이 자기들만의 고통이 아니라 또한 자신들의 하나님, 야웨의 고통임을 알게 되면서 한줌의 빛이 자신들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에스겔 3장) 그 믿음 안에서 이스라엘의 깨어있는 자들은 자기 시대의 공포, 분노, 슬픔에 마음을 열고, 그것들이 자기 존재의 구석구석을 침범하여 자신들의 마음을 부수도록 했습니다. 그 열리고 부서진 마음에서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린 것은 전적으로 한줌 빛의 은총이었습니다. 종교인류학자들은 이스라엘 포로공동체가 부서진 마음을 통해 깨달은 이 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축의 시대의 더 내적이고 직접적인 앎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앙의 핵심은 깊은 수준에서 자신을 바꾸는 행동임을 깨달았다.”(카렌 암스트롱, 정영목 역, 『축의 시대』, 교양인, 291.) 이 부서진 마음에서 맺은 열매가 바로 토라(Torah)-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토라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창세기 1: 1-4a)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까, 또한 거룩한 이미지입니까!? 창조의 처음에 만드신 이 빛은 어떤 빛이었겠습니까? 이 빛은 넷째 날에 만드신 눈으로 볼 수 있는 낮과 밤의 그 빛과 어떻게 다른 빛이겠습니까? 이 빛을 아는 것이 이 빛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정수입니다. 혼돈한 땅, 공허한 땅, 어둠이 깊음 위에 있는 땅에서 하나님의 빛을 체험한 실존의 신앙고백은 제국의 그늘에서 사는 이들의 삶을 든든하게 세우는 버팀목이 되었고, 동시에 제국의 권력을 가진 자들, 제국의 승리를 쟁취한 자들의 정치적 선전(propaganda), 그 허위와 위선에 맞선 정치적 선언(manifesto)이 되었습니다.

토라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며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마땅한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말입니다. 토라가 증언하는 신앙의 사건들은 모두 이 빛에 관한 변주곡들(variations)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빛의 음성을 듣고 문명의 도시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했습니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레의 빛을 경험을 하며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을 확증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쫓기는 자가 된 야곱은 베델에서 하나님의 빛의 언약을 듣고 일생동안 자신의 욕망에 고삐를 채웠습니다. 도망자 모세는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가운데 타는 하나님의 빛을 통해 민족의 구원자가 되는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 이스라엘 공동체의 빛
창세기에서 신앙의 선조를 비춘 처음 빛이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빛으로 다시 등장한 곳은 출애굽기입니다. 이집트 제국에서 430년 동안 살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좋은 소식입니다.(출6:7) 그러나 이미 오랫동안 이집트 제국의 문화에 동화된 이스라엘 자손의 반응은 무지와 무관심과 냉담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으나, 그들은 무거운 노동에 지치고 기가 죽어서, 모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출6:9)

이집트 제국의 바로도 모세의 말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제국에 재앙을 내립니다. 물이 피로 변하는 첫 번째 재앙부터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집짐승의 죽음, 악성 피부병, 우박의 재앙, 메뚜기 재앙으로 이어지는 8번째 재앙까지. 그러나 이 재앙들은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 던지신 재앙이라기보다는 이집트 제국이 만들어 낸 감추어진 괴물들을 들춰내신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제국의 부패한 속살은 그렇게 재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와 그 부역자들은 거짓과 술책으로 당장의 위기만을 모면하려고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짜 재앙이 내립니다. 9번째 재앙인 짙은 어둠이 이집트 제국의 온 땅을 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둠이 내리자 드러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늘에다 그의 팔을 내미니, 이집트 온 땅에 사흘 동안 짙은 어둠이 내렸다. 사흘 동안 사람들은 서로 볼 수도 없었고, 제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빛이 있었다.” (출10:23)

제국은 짙은 어둠에 빠졌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비로소 하나님의 빛을 깨닫습니다. 토라의 처음 빛이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빛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첫째 날의 빛으로 쓰인 히브리어 ’오르’(אוֹר)가 그대로 출애굽기 10장 23절의 빛에 쓰였습니다.

9번째 재앙의 어둠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빛을 깨닫기 시작했고, 스스로 이집트 제국의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이 빛 속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10번째 재앙, 처음 난 것의 죽음 앞에 서고, 이 빛의 바깥에서 이집트 제국과 바로는 하나님의 10번째 재앙을 맞습니다. 하나님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맏이와 맏배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그들은 맏이와 맏배는 인류의 미래요, 삶을 삶이 되게 하는 힘이요, 삶의 궁극적 의미임을 똑똑히 봅니다.

그 빛의 바깥 어둠에 있던 이집트 제국의 바로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9번째 재앙의 어둠 속에서 이집트 제국의 바로는 다급하게 모세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주께 예배하여라. 그러나 너희의 양과 소는 남겨 두고, 너희의 아이들만 데리고 가야 한다.”(출10:24)

재앙의 정점에서 이집트 제국의 바로가 붙잡으려고 했던 지키려고 했던 가치는 ‘양과 소’였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9번째 재앙의 어둠과 10번째 재앙의 어둠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을 잡아 유월절 예배를 드렸고, 이집트 제국과 바로는 미래가 소멸하는 재앙을 맞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밤 이스라엘 백성은 어둠 가운데 빈틈없고 완전해 보이던 피라미드가 처음 난 것의 죽음과 함께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탈출합니다. 토라는 이 출애굽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빛
이 땅의 짙은 어둠 속에서 우리의 현실을 둘러봅니다. 제국의 악한 영이 이 땅의 사회와 역사 속에서 만들어 낸 괴물들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물에서, 땅에서, 공중에서 이 괴물들이 재앙이 되어 이 땅의 백성들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시대의 공포, 분노, 슬픔에 수 천 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진 마음들이 이 땅 위를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맏이와 맏배는 형제자매의 죽음을 바라보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니터마다 등장하는 제국의 바로들과 그 부역자들의 얼굴은 풍선처럼 매끈하고 그들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완고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빛으로 고백합니다. 대림절의 깊은 어둠 가운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 한다”(눅3:22)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께서 섰던 그 자리를 떠올려 봅니다. 그 자리는 9번째 재앙의 어둠과 10번째 재앙의 어둠 사이였습니다. 이 땅의 맏이와 맏배를 슬픔의 눈으로 바라보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는 자리였습니다. 구원의 문을 여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분명해서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찾을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제국의 문명들이 만들어 내는 사나운 서치라이트도 아니요 제국의 첨탑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확답을 요구했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마11:2-6)

미술사에서 신적 빛의 이미지를 좇던 한 철학자는 역사 가운데 민중의 삶의 자리에서 발견되는 메시아적 빛의 이미지를 반딧불로 표현했습니다. 이 반딧불은 멀리 있는 지평 너머의 구원을 약속하는 강렬한 빛(luce)이 아니고, 민중의 삶의 자리에 잔존하며 지금 여기에서 열리는 구원의 좁은 문을 비추는 미광(lucciole)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김홍기 역, 『반딧불의 잔존』, 도서출판 길, 150-151.)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반딧불 같은 미광(微光)입니다.

▪ 어두운 시대의 그리스도인
어두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어두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미광에 사로잡혀 9번째 재앙의 밤과 10번째 재앙의 밤 사이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연약한 빛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연약한 빛이 우리를 그 자리로 이끈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존재의 심층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저는 1학년이 끝날 무렵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큰 포부를 안고 온 것은 아니지만 신학교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기대에 못미쳤고, 교단의 미래는 암울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옛 삶의 자리로 돌아갈까? 고민이 깊던 시절이었습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빛이 내 앞을 비춰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배 목사님의 목회 이야기를 듣는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소명이란 단어에 귀가 쫑긋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소명으로 사는 것을 그 선배 목사님은 사무엘상 6장의 이야기에 나오는 주님의 궤를 끄는 소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 소는 멍에를 메어 본일 이 없는, 새끼와 생이별을 한 어미 소였습니다. 그날 밤 떼어논 새끼를 생각하며 처음 어깨에 얹어진 멍에를 메고 울며 주님의 궤를 끄는 어미 소의 이미지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희망의 편지를 쓰며 그 목사님은 아름다운 영혼의 성좌가 된 이들의 삶을 이끈 예수 그리스도의 미광, 그 연약한 빛의 능력을 한 편의 시로 표현 했습니다. 김종삼 시인의 묵화입니다. (김기석,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꽃자리, 245-246.)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나갔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묵화(墨畵)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주신 대림절의 깊은 어둠이 일주일 남았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과 삶의 자리를 돌아봐야겠습니다. 부서진 마음에서 새 삶의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의 미광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거둠의 기도
주님,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따라 그 길 뚜벅뚜벅 걸어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12월 18일 11시 10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