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 익숙함을 넘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13:54-58
설교일시 2017/03/12
오디오파일 s20170312.mp3 [13996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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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을 넘어
마13:54-58
[2017/03/12, 사순절 제2주)

[예수께서 자기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와 그 놀라운 능력을 얻었을까?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거기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다.]

• 불통의 세계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중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었습니다. 헌법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대통령에 대한 파면이 결정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필귀정이라 말하며 쾌재를 부르고, 어떤 이들은 불순한 음모에서 비롯된 오심이라며 울분을 토하기도 합니다. 심정이 어떠하든 우리는 역사의 변곡점 앞에 서 있습니다. 이제는 거짓과 위선, 불의와 폭력이 더 이상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이사야 19장을 반복해서 읽으며 나라의 안정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폭력으로 점철된 그 시대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사19:23-24)

피 흘리며 싸우던 세 나라가 불구대천의 원수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 안에서 서로 소통하면서 세계의 복이 될 거라는 예언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바로 그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를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자기 몸으로 허물어 하나로 만드신 분으로 소개합니다(엡2:14). 대립과 갈등이 극심했던 이 나라도 주님 안에서 새롭게 빚어져 생명과 평화를 끈질기게 지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멀지만, 울면서라도 그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이제 마음을 고요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 시인 예수
오늘의 본문이 속해 있는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의 나라' 비유 장으로 유명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밀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 진주 비유, 어부의 비유 등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비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참 큽니다. 예수님이 비유에서 사용한 언어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갈릴리의 농부들과 어부들, 그리고 가정주부들이 늘 경험하는 일들이 비유의 소재입니다. 일상의 언어로 오묘한 이치를 드러내니 가히 천재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를 가리켜 언어의 사원이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詩'를 파자하면 '말씀 언言'과 '절 사寺'자가 되는 데서 착안한 말일 겁니다. 시인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를 적절하게 재배치하여 놀라운 이미지나 의미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언어의 장인인 그들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시를 접하고 나면 우리 의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셨습니다. 칼릴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 예수>라는 책에서 그리스 시인 루마누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눈을 대신해 보았고 우리 귀를 대신해 들었으며 우리가 말로 못하는 말을 그는 입술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그는 손가락으로 만졌습니다."(함석헌전집16, 칼릴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예언자>, 한길사, 1987년 2월 10일, p.82)

루마누스는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정다감한 눈으로 바라보고 향유했다고 말합니다. 풀잎, 어린이의 수줍어하는 얼굴, 석류, 한잔 술, 아몬드 꽃, 바다와 하늘, 별, 골짜기, 사막…그분에게는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읽어내는 분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시인이란 이런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루마누스는 그 글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거문고는 단 한 줄뿐이며 내 목소리는 어제의 기억도 내일의 희망도 자아내지 못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내 거문고를 내던지고 잠잠하기로 했습니다. 언제나 황혼녘이 되면 나는 귀를 기울이고 모든 시인의 임금이신 그 시인의 말을 들을 것입니다."(같은 책, p.83)

예수님의 비유는 또 다른 의미의 성찬입니다. 속된 것을 통해 거룩한 것을 보게 하니 말입니다. 시인 예수는 거친 바다 사나이 시몬에게서 베드로를 보셨고, 나다나엘에게서 거짓이 없는 참 사람을 보셨고,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현혹되는 분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을 읽고 그것을 호명해내시는 분이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한 이들은 모두 새로운 세계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 왜 고향에 가셨을까?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자기 고향에 가셔서"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도입구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나사렛에 가셨다고 해도 됐을 텐데 마태는 왜 굳이 '고향'이란 말을 쓴 것일까요? 고향이란 단어는 'fatrida'인데 아버지를 뜻하는 'fater'라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여기서 고향은 '아버지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고향을 멀리 떠나 사는 사람에게 '아버지의 땅'은 늘 그리움의 장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받아 먼 곳으로 떠났던 탕자도 인생의 막장에서 아버지의 집을 기억해 냅니다. 기술 문명이 발전하면서 삶이 더욱 분주해지고, 비인간화가 진행되고, 세계 대전을 겪으며 피폐해진 세상을 허위단심으로 헤쳐 나가야 했던 현대인들의 정신적 상황을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고향은 한마디로 말해 친숙한 장소입니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놓이는 곳 말입니다. 고향을 떠나 살아본 사람이라야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윤석중 선생님의 쓴 가사에 한용희 선생님이 곡을 붙인 '고향 땅'이라는 동요를 기억하실 겁니다.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푸른 하늘 끝 닿은 저기가 거긴가/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왠지 아련하지 않습니까? 고향 땅이 어딘가 가늠해보는 까닭은 현실이 고단하기 때문일 겁니다. 아카시아 꽃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니 고향 땅에서 듣던 새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왜 고향에 가신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듣고 한 말을 기억합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그런 후에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12:48-50). 출가한 사람처럼 단호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고향을 다시 찾아온 까닭을 저는 헤아릴 길 없지만, 예수님도 인간인지라 낯익은 장소, 낯익은 얼굴들, 익숙한 말투가 주는 안온함을 그리워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특심의 소명감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잘 아는 '낯선' 존재
고향 사람들도 예수의 소문은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데, 별 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갈릴리 지역에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자연 이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소문이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 고향 사람들에게 당신의 깨달음을 나누셨습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을 밝히는 일은 마태의 관심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마태는 다만 사람들의 반응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와 그 놀라운 능력을 얻었을까?" 짐작컨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말씀이 지혜의 말씀인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서나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놀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까닭을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마7:29)이라고 말합니다. 권위 있는 말씀은 사건을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귀신을 명하면 귀신이 물러가고, 병자를 위해 기도하면 병자가 낫는 말씀입니다. 에너지로 가득 찬 그 말씀은 변화의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거의 그 문턱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기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서 얻었을까?"(55-56)

평행본문인 마가복음에는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막6:2)라는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그 손'이 가리키는 바는 그 다음 구절과 연결됩니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6:3) '그 손'은 그러니까 노동하는 손입니다. 집을 고치거나 짓는 손 말입니다. '그 손'이라는 단어 속에는 은근한 무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빈한한 가문의 사람, 노동자라는 범주 속에 가둬두고 싶어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강자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사는 게 약자의 슬픔입니다. 마가복음보다 후에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가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슬그머니 지우려 합니다. 마태는 예수를 '그 목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요셉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직 마가복음만 목수라고 명토박아 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고향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들이 설정해놓은 인정의 경계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그를 존경하거나 따를 생각은 없습니다. 익숙함의 함정입니다. 익숙한 데만 머물면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날 때는 적극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자기들의 진부한 삶을 유지하려 합니다. 어쩌면 그게 예수님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은 그래서 복음서의 서문에서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1)고 적었던 것입니다.

• 예언자의 운명
그런데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부정하려 한 것은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저는 조금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세계 질서를 토대로부터 흔들었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이 막강한 군단과 식민 체제의 부역자들을 통해 지배하는 세상, 거룩함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사람들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는 성전 체제를 주님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강자들의 폭력 앞에서 숨죽인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참 사람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폭력에 굴하지 않는 삶, 사랑으로 미움을 넘어서는 삶,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이들에게 굽신거리며 살지 않아도 되는 삶으로 말입니다. 예수가 가리켜 보이는 세상은 아름다웠지만, 오랜 식민지살이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는 공포가 새겨져 있었기에 그런 꿈에 선뜻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57) 예수가 괜히 평지풍파를 일으켜 그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재앙을 가져올까 두려웠던 것일까요? 이건 근거 없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무렵 나사렛에서 북서쪽으로 6km 떨어진 세포리스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황제는 시리아 총독인 바루스(Varus)를 보내 세포리스를 정복하고 도시를 불태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2000여 명의 사람들이 반란죄를 명목으로 하여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그런 공포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 속에 잠들어 있던 공포를 환기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공포의 기억은 사람들을 마비시켜 새로운 꿈을 꾸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주님도 고향에서는 아무런 일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57) 늘 읽던 구절인데 이번에는 싸한 아픔이 제 가슴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할 교회에서 주님이 이런 박절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예수님을 침묵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의 이름으로 거짓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은 외로우십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 이르셨지만 우리는 주님을 경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일어나 함께 가자' 하시는 주님께 등을 돌린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 바로 그 길만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세상의 인력이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걸음씩 십자가가 가리켜 보이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익숙한 세계에만 머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과감히 새로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험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져오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2017년 대한민국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을 걷어내고, 하늘의 빛을 이끌어 들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고 싶어하십니다. 주님의 꿈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3월 12일 10시 32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