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7. 본 적 없는 일
설교자 김재흥
본문 막2:1-12
설교일시 2017/04/23
오디오파일 s20170423-1.mp3 [1389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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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2:1-12
며칠이 지나서,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가 집에 계신다는 말이 퍼지니,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마침내 문 앞에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때에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가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좋으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연일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위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안정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오늘 이 주일 아침,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가 함께 교회를 이루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던 가버나움에 계실 때 일어난 하나의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계신다는 말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그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지 더 이상 사람들이 그 집에는 들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집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때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바라고 왔던 것이죠. 그런데 그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에 예수님이 계신 방 안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환자를 침상째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지붕 바닥을 걷어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집은 지붕을 나뭇가지로 엮어서 점토를 발라 만들었기에 그것을 걷어내고 구멍을 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뚫린 구멍으로 환자를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셨습니다. 성경은 그 대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다.’ 그 네 사람은 분명 ‘믿음’이 있었기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환자를 치유해주고픈 마음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믿음’을 보시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이야기를 복음서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치유의 기적 사건이 다른 사건과 조금 다른 것은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누워있던 중풍병 환자에게 “네 병이 나았다”가 아니라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 사건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율법학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기준으로 예수님의 그 말씀은 틀린 말이며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치료할 수는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요, 그런 말을 사람이 한다는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뿐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세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그 중풍병 환자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말씀하시니,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습니다.

‧ 정죄와 용서
그런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것을 아시면서도 당신에게 있는 죄를 사하는 능력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신 것일까요? 다른 때처럼 치유의 능력만 보이셨다면 율법학자들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성서에서는 질병을 죄와 연관시키는 경향이 짙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그 죗값으로 질병에 걸린다고 보는 것이죠. 그렇게 질병과 신의 징벌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경향은 질병에 대한 의학적인 지식이 낮은 문화권일수록 크게 나타납니다.

레위기를 보면 천형天刑이라 일컫던 문둥병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레위기 13장 2,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뾰루지나 얼룩이 생겨서, 그 살갗이 악성 피부병에 감염된 것 같거든, 사람들은 그를 제사장 아론에게 그의 아들 가운데 어느 제사장에게 데려가야 한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의 살갗에 감염된 병을 살펴보아야 한다. 감염된 그 자리에서 난 털이 하얗게 되고 그 감염된 자리가 살갗보다 우묵하게 들어갔으면, 그것은 악성 피부병에 감염된 것이니, 제사장은 다 살펴본 뒤에, 그 환자에게 ‘부정하다’고 선언하여야 한다.”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부정한 자’가 됩니다. 게다가 그는 병이 최종적으로 확정되면,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하고, 마을에서 나가 혼자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행여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면 손으로 코밑 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부정함이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장면입니까. 육신의 질병만으로도 괴로운데 사회는 그에게 ‘부정한 자’라는 낙인까지 찍고,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정함을 자기 입으로 외치며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지인들 손에 들려 예수님께 나온 중풍병자의 상황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 자신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도저히 인간의 방법으로는 ‘온전해질 수 없는’, 그러기에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 이렇게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죄인. 그렇게 안팎에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죄인의식은 육신의 질병보다 그 사람의 영혼을 어둡게 잠식해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향하여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 받았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 사람의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그 질병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고 살아온 마음병까지 치유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 그 사람을 죄인으로 여겨 왔던 사람들이 다시는 그를 죄인으로 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그 사람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대하심에 그의 아픔이 무엇인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마음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에게 그 중풍병 환자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회복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치유 과정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자신들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며 정죄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의 생각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죄 선언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예수가 하고 있다 생각하고 그것을 정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사람에 대한 온당한 정죄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 고 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그들도 지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프레드릭 백이라는 작가가 에니메이션 영화로도 만든 바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전후의 프랑스의 한 시골마을이 배경이며 한 사나이가 황폐하게 버려진 산간 마을을 남은 생을 다 바쳐 울창한 숲으로 바꾸어낸 이야기입니다. 그 한 사람의 헌신과 영혼을 바친 작업을 통해 그 황폐하고 황량했던 땅 곳곳에서 숲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주인공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인간이란 파괴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 있어서는 하나님처럼 유능할 수도 있구나.’ 그러나 저는 그 말의 반대의 말도 항상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창조가 아닌 파괴의 영역에 있어서는 신처럼 강력해질 수도 있다.’

문맹률이 높았던 예수님 당시에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하나의 힘이었습니다. 말과 글에 능통했던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율법에도 정통한 자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기준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앞세워 마치 본인들이 하나님에 관해 가장 잘 아는 양, 하나님 전문가인 양 행동했습니다. 자신들의 판단은 곧 하나님의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담긴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몸에 차고 다니고, 좀 더 경건하고 권위 있어 보이려 옷술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으며,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장터에서는 인사 받기를 좋아했고 사람들에게 ‘선생님’이라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글과 말은 권력이 되었고, 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그들은 어느새 하나님 자신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지식과 지위를 가지고 자신들을 마치 하나님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는 데 힘을 쓸 뿐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살피고 그들을 섬기지 못한 지도자들을 예수님은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이 어리석고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태 23장 중에서)

‧ 공동체적 믿음
오늘의 본문이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사죄 선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네 명의 지인들의 믿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네 명이 보여준 믿음은 참으로 중요한 믿음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우선 예수님을 향한 믿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이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로 등장하고 있기에 ‘공동체적 믿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네 명이 보여주는 공동체적 믿음은 그 네 명이 속했던 사회의 상식, 통념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 당시의 일반적 상식과 통념으로는 중풍병은 ‘죄’였습니다. 결코 가까이 해서 좋을 것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네 명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는 결코 죄인도 아니요 가까이 못 할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 네 명과 중풍병자의 관계에 대해 더 이상의 정보를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열의, 진정성, 태도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들은 그 중풍병자와 아주 각별했던 사이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적어도 그들은 그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했던 사람들이요, 그 사람 속에 있던 회복의 꿈을 마치 자신의 꿈처럼 여겼던 사람들이며, 추호도 그 질병을 빌미로 그 사람을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 개인적인 차원의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공동체적으로도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라고 하는 것이 개인적 차원에서만 작용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도 작용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개인이 혼자의 힘으로 그 굴레를 벗어나기는 너무 힘듭니다. 그의 침상을 같이 들어줄 네 명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 아이가 세 살 때 버스터미널에 버려졌습니다. 그 아이는 곧 시설에 맡겨졌습니다. 그 아이는 장애를 가진 아이였습니다. 시설의 담당자는 그 아이의 기록카드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선천적으로 양 다리가 불편하고 지능이 떨어진다.” 그 아이가 자라 올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김경원. 다른 친구들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작았습니다. 경원이는 특수학교를 가지 않고 일반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장애 때문에 따돌림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원이에게 시가 찾아왔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따돌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를 자세히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원이는 자기의 말로 아주 평범한 표현들을 엮어 시를 썼습니다. 어쩌면 딱히 시적 표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들로 반 친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힘을 주는 시를 썼습니다. 경원이의 담임 선생님은 경원이의 시를 눈여겨보았고 그 시를 교실 벽면에 하나하나 붙여나갔습니다. 그 어느 교실보다도 무겁고 삭막할 수 있는 고3 교실이 경원이의 시들로 조금씩 밝아졌습니다. 반 친구들은 경원이의 시에 스티커를 하나둘씩 붙이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차차 ‘시인 김경원’을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반 친구들은 경원이의 시집을 출판해주기로 마음을 모으고 인터넷에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모금운동을 한 것입니다. 그 사연을 들은 이들이 하나둘 후원에 동참해 마침내 시집을 냈습니다. 그 시집의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이었고 지난 2월 고등학교 졸업식 날 경원이는 반 친구들에게 그 시집을 한 권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경원이의 고3 교실은 이 시대의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하나님 전문가를 양성하는 곳이 아닙니다. 율법에 능한 유대인을 키워내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익히는 곳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말이죠.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혐오’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주로 ‘누구누구 혐오’라는 형식으로 많이 쓰입니다. 그 누구누구의 자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요 소수자들입니다. 장애인, 도시빈민, 난민 등등. 교회는 그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잣대를 들이대며 판단하기보다는 먼저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의 필요에 공동체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어야 하고 그들을 향한 사회의 정죄적 판단이 옳지 않음을 알려주어야 하며, 그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정죄하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합니다.

작년에 우리교회 청년들과 몇 곳에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젊디젊은 나이에 홀로 지하철역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가 사고로 희생당한 구의역 희생자의 빈소와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시위 도중 물대포를 맞고 사망하신 농민 백남기 어르신의 빈소에 다녀왔습니다.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농민. 그분들은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빈소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웠습니다. 가서 조문을 하고 먹먹한 가슴으로 유가족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나오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죽음에 우리도 슬퍼하고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생각했고 유족들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공감의 표현을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이야말로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해야 하는 일들 가운데 중요한 한가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죄와 용서. 둘 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서 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두 개의 힘든 일 중에 유독 정죄를 능히 자주 해냅니다. 율법교사를 닮아서.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다른 길을 제시해 보여주셨습니다. 쉽게 정죄하지 말고 그의 아픔을 자세히 살피고 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들여다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가버나움 동네의 네 명의 사람들은 행동으로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여럿이 함께하면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네 명의 사람들이 집의 지붕을 뚫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이르렀다는 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집은 하나의 굳어진 체제입니다. 그 네 사람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 체제의 틀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그 집을 허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그 네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성전체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늘 중요한 것은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여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본래적 구실을 상실한 채 겉모습만 유지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허물라’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믿음은 가버나움 집의 지붕을 허물던 그 네 사람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자리를 걷어서 나가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하고 말하였다.’ 본 적 없는 일. 그것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물리적 기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의 용서의 기적도, 그 네 사람이 보여준 공동체적 믿음의 기적도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일, 사람들이 본 적 없는 일을 행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차별, 판단, 정죄, 혐오가 넘쳐나는 세상 속에 용서, 수용, 공감의 세상을 펼쳐가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중풍병 환자, 이름을 알 수 없어 계속 환자라고 불러 조금 미안하기도 합니다만 그 사람, 그 네 사람 손에 들려 예수님이 계신 가버나움의 집으로 향해 나아갔을 때, 그 때 이미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행여 도착했던 집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채 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오게 되었더라도 그 마음속에는 잔잔한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네 사람으로 인해 말이죠. 그런 행복, 그런 기쁨을 만들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17년 04월 23일 09시 23분 2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