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4. 보시기에 어떠합니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 1:26-31
설교일시 2017/06/11
오디오파일 s20170611.mp3 [1693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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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기에 어떠합니까?
창1:26-31
(2017/06/11, 환경선교주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 묵시록의 시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정한 환경선교주일입니다.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환경문제와 우리 신앙 사이에 접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한 텔레비전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오늘의 종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창조질서의 보존을 위해 함께 일하는 종교만이 종교라는 명칭을 달고 다닐 수 있다"(프란츠 알트, <생태주의자 예수>, 손성현 옮김, 나무심는사람, 2003년 4월 5일, p.102)고 대답했습니다. 그와 인터뷰를 진행했던 프란츠 알트는 "생태계 위기에 대하여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한 기독교는 예수의 핵심을 이미 저버린 셈"(같은 책, p.150)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의 탐욕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과 봄, 그리고 초여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미세 먼지 가득한 하늘을 보며 울적해졌습니다. 지금 한국을 뒤덮고 있는 미세먼지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권고 기준을 세 배나 초과하고 있다고 합니다. 2.5미크론(0.0025mm)이하의 초미세먼지(PM2.5)는 우리 건강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미세먼지는 중금속과 같은 오염물질을 많이 흡착할 수 있고, 폐 속에 축적되었다가 혈관을 통해 전파되어 호흡, 신경계 질환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미세먼지로 인해 사망하는 이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석탄을 연료로 하는 화력 발전소와 노후화된 경유차가 초미세먼지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 대책으로 30년 이상된 노후 석탄 화력 발전소의 일시 가동 중단을 명했고, 공정율 10% 이하인 석탄 발전소 설립을 유보했습니다. 또한 2030년까지 탈원전 시대를 열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고리 1호기를 영구히 폐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봄 가뭄이 심각하여 농부들의 가슴이 바짝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산불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강마다 녹조가 또다시 나타나고 있고, 최근에는 조류독감으로 인해 또 다시 많은 가금류가 살처분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마치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봉인이 풀리고,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시대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뜩해지곤 합니다. 우박과 불이 땅에 떨어지고, 바다가 피로 변하고, 강물이 쓴 물로 변하고,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는 세상 말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 협정은 지구 온도가 산업혁명 이전보다 2도 이상 오르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감축하자는 취지에 공감한 195개국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는 자국의 역량에 맞춰 온실 가스 감축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 협정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는 시리아와 니카라과 뿐이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 소비를 많이 하는 미국이 그 협정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지구의 평균 기온이 0.5도 높아질 때마다 지구 상에 살고 있는 생물종 20% 정도가 멸종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인해 빚어진 생물종의 멸종은 결국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거역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바벨론의 신화에 도전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구속 이야기가 창조 이야기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창조 이야기를 앞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우주나 생명의 기원이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저마다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바벨론의 창세 신화와 대결하기 위해 서술된 것입니다. 바벨론의 창세 신화의 최고신은 마르두크입니다. 마르두크는 자신의 대적인 짠물을 다스리는 신 티아마트를 죽여 그 시체로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마르두크는 신들에게 각각의 역할과 아울러 관장해야 할 영역을 지정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신들이 마르두크에게 와서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주 마르두크시여,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영역과 영예를 주셨고, 저희들 각자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저희를 섬기고 저희의 일을 도울 존재를 하나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누가 저희의 집을 돌보고 청소하며 저희가 먹을 음식을 준비한단 말입니까?"

이들의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한 마르두크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뭘 해야 할지 알겠어. 물과 피를 취해 작은 꼭두각시를 만들고 인간이라 불러야겠어. 그러면 신들이 자기 일을 하는 동안, 인간은 신들을 섬기고 신들의 집을 돌볼 거야."(자크 엘륄, <자유, 사랑, 능력에 관하여>, 빌렘 반더버그 엮음, 전의우 옮김, 비아토르, 2017년 4월 25일, p.52-53에서 재인용)

바벨론 신화에서 인간은 신을 위한 꼭두각시이고, 신들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신의 형상이라 일컬어지던 왕의 절대 권력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유포되곤 했습니다. 그런 신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고 있는 차별, 억압과 착취를 신이 부여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그런 신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창조 설화와 맞서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하나님의 형상
성경의 이야기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신들의 허드렛일을 하라고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깊이 숙고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창1:26)

'우리'라는 표현을 두고 삼위일체를 상징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게 볼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꾼은 하늘의 보좌에 좌정하고 계신 하나님과 그분을 모시고 있는 천상의 존재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욥기의 앞부분에 나오는 하늘 광경을 떠올려 보면 될 것입니다. 욥기는 주의 보좌 앞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서 있었고 사탄도 그중의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이사야의 소명 이야기에서 우리는 주님 곁에 있었던 스랍들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사6).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 혹은 모양대로 만들기로 작정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첫 사람을 뜻한다기보다는 모든 인류를 뜻하는 말로 보아야 합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말은 오직 왕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 주장하는 바벨론 신화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이것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말보다 더 위험한 말입니다. 절대 권력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과 말을 주고받는 존재라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적절히 응답할 수 있는 존재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숨결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오직 인간 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루 하루 창조가 완수될 때마다 나오는 문구, 곧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구절이 인간의 창조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이것이 선이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그 자체로 선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인간은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응답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를 바라십니다. 인간은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 값없이 주어진 복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습니다. 그 복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그것은 완제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 책임으로 나타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1:28)

하나님이 주시는 첫번째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라는 명령과 연관됩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스스로 번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조건 속에 있는 삶이라 해도, 우리가 산 자의 땅에 있는 한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지금 거칠고 황량한 벌판에 서 있다 해도, 눈물의 골짜기에 갇혔다 해도, 하나님은 그곳을 생명의 물이 넘치는 곳으로 바꿀 능력을 주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게 등을 돌려 절망의 가장자리에 몰렸을지라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버리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막중한 책임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정복하여라', '다스려라'라는 단어가 매우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자연을 자기 욕망에 따라 맘대로 처분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했던 프랜시스 베이컨 이래 인간은 자연을 단순한 도구로 이해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피조세계를 인간의 욕망을 이루는 데 필요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닿아 있는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 속에는 땅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흉포한 땅의 변덕으로 큰 시련을 당했던 경험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인류의 유전 인자 속에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무너지곤 했던 조상들의 절망과 두려움이 새겨져 있습니다. 화산, 홍수, 화재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인간은 살기 위해서라도 자연을 길들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땅을 정복하라는 말로 형상화되었을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말일 겁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야생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그 야생을 잘 이해하고 길들이는 것이 인간의 과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다스림은 자연에게 재갈을 물려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할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스림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스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은 다스리는 권세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7:2)

다스림은 뭐든 함부로 해도 좋다는 면허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소명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신 존재로 여겼고,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다니던 이들을 해방하여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내주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다스림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10:10b-1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들이 할 일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아끼고, 존중하고, 풍성하게 하려고 노력할 때 인간은 인간다워집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무차별로 파괴할 때, 자연의 역습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 무서운 보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문명의 전환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를 모토로 하고 있는 소비사회는 몰락을 향해 내달리는 거라사의 돼지떼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 무모한 소비의 열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노자 59장에 나오는 구절을 저는 늘 마음에 명심하고 삽니다. "치인사천治人事天, 막약색莫若嗇",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 '아낌'만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끼는 이들은 세상에 하찮은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노자는 아끼는 것이 곧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요 덕을 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껴야 하는 것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물질을 함부로 대하는 세상은 사람도 아끼지 않습니다. 오늘 이 세대를 사로잡고 있는 난폭한 열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뭐든 아끼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끼고 또 아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신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1:31)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은 모든 것이 창조질서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답게 위임된 세상을 아름답게 돌보고, 풍성하게 만들 때 세상은 비로소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이 됩니다. 피조물의 탄식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다운 삶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려 애쓸 때, 우리 삶이 아름다워지고 교회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걷는 그 길에 복을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6월 11일 11시 09분 5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