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7. 사랑과 분별력
설교자 김기석
본문 빌 1:3-11
설교일시 2017/07/02
오디오파일 s20170702.mp3 [15630 KBytes]
목록

사랑과 분별력
빌1:3-11
(2017/07/02, 성령강림 후 제4주)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늘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여러분이 첫 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내가 어려분 모두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변호하고 입증할 때에, 내가 받은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고 7월의 첫 주를 맞았습니다. 엄부렁하게 부푼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우리는 많이 지쳤습니다. 이 맘 때가 될 때면 주님이 들려주신 비유가 생각납니다. 삼년 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지시합니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눅13:7) 이 말씀이 가끔 이명증처럼 내 귀에 쟁쟁하게 울립니다. 그래서 혼자 생각해 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어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나?' 찍어 버린다 하셔도 대꾸할 말이 없습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지기는 참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에게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주인님, 올해에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눅13:8-9) 이 비유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유예받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세상에 팔린 우리의 시선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오순절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 삶에도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는 바울 사도가 옥중에 있으면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열악한 조건 속에 있기에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을 법도 하지만, 바울의 글은 가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시선을 '기쁨의 서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감옥에 계시면서 마음이 초조할 때마다 이 서신을 읽었다고 합니다. 내면에 든든함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마음에 기쁨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마음, 원망스러운 마음이 고질병처럼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빌립보서를 반복하여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불안과 초조, 원망의 마음이 스러졌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고 합니다.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현실을 대면하는 그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믿음의 눈을 뜬 사람은 시련의 시간 속에도 보화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 기쁨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저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가 내린 다음 날 아침, 타박타박 걸어 멀리 떨어진 학교에 가다보면 눈길을 끄는 게 참 많았습니다. 대기는 맑았고, 나뭇잎도 한결 생기있게 보였습니다. 저만치 햇살에 반짝이는 것이 보이면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음질쳤습니다. 깨진 사금파리이거나 유리조각일 때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금파리나 유리조각은 지루한 시간을 견딜 좋은 놀이 기구가 되곤 했습니다. 그것을 손에 들고 햇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다가 친구의 얼굴에 빛이 반사되게 하기도 했습니다. 신작로 이곳저곳에 비로 인해 생긴 작은 물웅덩이에는 고운 흙이 살포시 내려앉아 부드러운 벨벳처럼 보였습니다. 지렁이가 온몸으로 기어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걸 볼 때마다 마음이 아뜩해졌습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뻘밭 위를 온몸으로 기어갔을 지렁이의 고독 따위에 감응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끔 지난 날을 회상할 때가 있습니다. 두루 가난했던 시절의 경험이 궁상맞게 기억되지는 않습니다. 아름답고 빛나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보다 한결 열악한 여건 가운데 살았지만, 아련하고 따뜻하게 기억되는 것은 왜일까요?

어떤 분은 거리가 미를 창조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장의 이해관계에서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사물이나 사태가 아름답게 보인다는 말일 겁니다. 살면서 쓰라린 경험을 하지 않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당시에는 그 문제에 부딪쳐 가슴에 멍이 들고, 영혼에 피가 맺히곤 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거기에 달린 듯 암담할 때도 많았습니다.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던 기억이지만, 지나놓고 생각하면 그런 경험들이 쌓여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에 사로잡혀 사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기억은 참 신비해서 떨쳐버리려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달라붙곤 합니다. 아픈 기억은 차라리 정직하게 직면하는 게 낫습니다. 애상에 빠지지 않고 과거에 직면할 때 그 아픈 기억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연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기억과 대면하며 살고 계십니까?

과거에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다녀오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던 말이 있습니다. 감옥이 '진짜 대학'이라는 것이지요. 책을 보고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들의 눈을 새롭게 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 말일 겁니다. 바울도 감옥에서 더욱 깊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인이 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을 그리움으로 떠올립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늘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빌1:3-4).

의례적인 말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듯 애정이 담긴인삿말을 건네는 것은 그들의 있음 그 자체가 바울에게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련의 시간, 고통의 시간,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시간에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빌립보 교인들과 바울의 만남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 사도의 빌립보 선교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흑해 근처의 비두니아로 선교의 지평을 넓히려 했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곳으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드로아로 이동하여 기도를 하던 중에 환상을 봅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행16:9) 하고 청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즉시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확신했고, 사모드라게와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부유하고 경건한 상인 루디아와 그의 온 집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의 도움으로 빌립보 선교를 수월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귀신에 들려 점치는 능력을 보였던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은 사건 때문에 곤경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 여종을 통해 큰 돈벌이를 하던 주인들이 그들을 관원들에게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 때문에 화가 났으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를 공적인 문제인양 포장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들어와 로마 시민들이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풍속을 전함으로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붙잡혀 재판도 받지 않은 상태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암담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한밤중에 지진이 나 옥터가 흔들렸고 그들에게 채워졌던 수갑과 차꼬가 저절로 풀렸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간수는 죄수들이 탈출한 줄 알고 자살을 시도하려 했습니다. 죄수들을 지키지 못한 자에게 내릴 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모습을 드러내고 만류하자 그는 무서워 떨면서 사도들의 발 아래 엎드려 물었습니다.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행16:30). 결국 그 반 간수와 온 집안이 주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 사도들은 석방됨과 동시에 빌립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빌립보에서 벌어졌던 그 사건들을 바울은 또 다른 감옥에서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그는 감사의 심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그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의 안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위임하신 일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를 전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확산하는 일을 위해 그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15:31)라고 말합니다. 늘 위험을 무릅쓴다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에고를 잘라내고 또 잘라낸다는 뜻도 들어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자아를 부풀리는 일과 무관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1:20-21)

그는 자기 생을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온전히 바친 사람입니다. 목적이 분명하니 선택이 복잡할 것도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혼이 어린 사람들입니다. 개그우먼인 박미선 씨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활동을 쉬던 중 방송국에서 섭외가 들어오길래 반갑게 물었답니다. "MC인가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아니요, 패널입니다." 자기 나름으로 탑이라 생각했는데 무시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무척 불쾌했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패널이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올라갈 때도 중요하지만 내려올 때가 더 중요합니다. 고은 선생의 시구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꽃". 자아만 내려놓아도 세상이 달리 보이는 법입니다.

오래 전에 읽은 동화 작가 강정규 선생의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는 운동회 날 달리기만 하면 늘 꼴찌였다고 합니다. 1학년부터 5학년까지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6학년 때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는 데 관중석에서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일등이다. 우리 잉규(仁圭)가 일등여!" 놀라서 둘러보니 그는 분명히 맨 앞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를 악물고, 상을 찌푸리고, 두 주먹을 꼭 쥐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들어와서 보니까 자기 뒤를 바싹 좇고 있던 아이들이 여덟 명이더랍니다. 그 다음 조였던 것이지요. 그날 그렇게 일등(?)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할머니가 손자를 위로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천천히 가그라, 꼴찌두 괜찮여. 서둘다 자빠지면 너만 다쳐. 암만 늦게 가두 네 몫은 있능겨. 앞서 간 애들이 다 골라 간 것 같어두, 남은 네 몫이 의외루 실속있을 수 있능겨, 잉규야." 할머니가 고단한 삶을 통해 터득한 지혜를 손자에게 전수해준 셈입니다. 조금 늦으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런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패배의 길처럼 보이지만, 눈을 뜬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승리의 길입니다. 힘이 아니라 정신이,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 가름이 아니라 통합이, 노예적 굴종이 아니라 희생을 각오한 저항이 우리 삶을 든든하게 만듭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그런 복음의 길에 동행이 되어준 것을 기억하며 기뻐합니다. 잠시 동안의 인연이었지만 빌립보 교인들은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을 잊지 않고, 그에게 선교 후원금을 보내주고, 지속적으로 기도의 연대를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슬아슬하지만 희망은 그렇게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1:6). 복음을 위해 협력하는 그 선한 일은 빌립보 교인들이 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 속에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다만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접속하는 일 뿐입니다.

• 분별하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인들의 존재 그 자체는 그에게 큰 위안이자 기쁨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빌1:8).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처럼 아련한 일이 또 있을까요?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사실 '그리스도의 창자'입니다. 옛 사람들은 인간의 가장 깊숙한 정서가 '창자'에 머문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떠올릴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또한 그들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립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빌1:9-11)

바울의 기도는 단순하지만 심오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진작에 보여준 사랑이 지식과 통찰력으로 인해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단순한 호감이나 선의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랑은 상황이 달라지면 언제든 식어질 수 있고, 맹목적인 사랑은 정의를 무너뜨릴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이 하나님 사랑에서 기인한 것인가가 첫째이고, 우리가 하려는 일이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가가 그 둘째입니다. 바로 그것이 분별하는 사랑입니다. 오순절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들의 사랑도 그렇게 깊어지기를 빕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7월 02일 11시 18분 1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