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9. 회복의 약속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33:6-9
설교일시 2017/12/10
오디오파일 s20171210.mp3 [14 KBytes]
목록

회복의 약속
렘33:6-9
(2017/12/10, 대림절 제2주)

[그러나 보아라, 내가 이 도성을 치료하여 낫게 하겠고, 그 주민을 고쳐 주고 그들이 평화와 참된 안전을 마음껏 누리게 하여 주겠다.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옛날과 같이 다시 회복시켜 놓겠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지은 모든 죄악에서 그들을 깨끗이 씻어 주고, 그들이 나를 거역하여 저지른 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 그러면 세상 만민이 내가 예루살렘에서 베푼 모든 복된 일들을 듣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나에게 기쁨과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도성에 베풀어 준 모든 복된 일과 평화를 듣고, 온 세계가 놀라며 떨 것이다.]

• 어쩌자고 분쟁의 씨를 심는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둘째 주를 맞으면서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갈망도 깊어갑니다. 냉소와 우쭐거림이 넘치는 세상에 사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얼굴 빛 환하고,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그리운 나날입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창조하시지만 사람은 혼돈을 지어냅니다. 창조의 역행입니다. 며칠 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 3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언제나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1967년에 일어난 제3차 중동전쟁을 통해 요르단에 속했던 동예루살렘을 자국의 영토로 복속시켰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금도 동예루살렘을 돌려받아 자국의 수도로 삼으려는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아슬아슬한 질서의 균형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트럼프는 그 균형을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돈을 만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에 대한 수사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세인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동시에, 지지층의 결집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주의자들과 보수적인 유대교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그는 화약고에 불을 지른 셈입니다. 치밀한 계산에서 한 발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트럼프의 이번 선언이 과격한 이슬람주의 무장 집단에게 투쟁의 명분을 주는 일이라고 우려합니다. 이미 도처에서 그런 선언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벌써 이스라엘군의 발포로 몇 명의 사망자가 났습니다. 제3차 인티파다(intifada, 봉기)가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이런 위기를 초래하는 트럼프를 보면서 호세아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호8:7) 그런 광풍이 불어오면 결국 많은 생명이 죽거나 다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면서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는 이들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평화주의 잡지인 '소저너스Sojourners'는 2018년 신년호 특집을 트럼프 시대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견지해야 할 '냉철한 희망'(relentless hope)으로 잡았습니다. 시대의 어둠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냉철하게 시대를 바라보며 믿음을 견지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날마다 혼돈을 빚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을 빚어내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는 이들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접속을 유지하면서 희망을 파종해야 합니다. 로마의 폭정이 사람들의 소박한 꿈을 유린하고 있던 시대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힘에 의한 지배가 정당화되고 있던 시대를 향해 '아니오'라고 외치신 분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앗아갈 수 없는 영혼의 웅장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가득 차기를 기다립니다. 지난 수요일 떼제 기도회에서 함께 불렀던 찬양이 자꾸 떠오릅니다. "우리는 예수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철저하고 확고한 희망이 우리 가슴에 인장처럼 새겨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 참된 안전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근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 임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땅을 지으신 주님, 그것을 빚어서 제자리에 세우신 분"(렘33:2)입니다. 도성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끌려갈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한 그 때에 사람들은 땅에 가득한 절망과 어둠에 사로잡히지만, 예레미야의 시선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고단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보기 위함입니다. 땅의 현실에만 몰두할 때는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약탈을 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시련의 풍랑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보아라, 내가 이 도성을 치료하여 낫게 하겠고, 그 주민을 고쳐 주고, 그들이 평화와 참된 안전을 마음껏 누리게 하여 주겠다."(33:6)

비록 지금은 암담한 처지에 빠져 있다 해도, 절망의 심연으로 자꾸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져도, 이런 희망이 가슴에서 식지 않는다면 힘겨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희망을 가슴에 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혼돈을 질서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향해 '아멘' 하는 것, 허무와 쓸쓸함이 우리 가슴에 안개처럼 밀려와도 사람다운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하나님은 상처 입은 도성을 치료하여 낫게 하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상처는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입은 것이지만, 그 뿌리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마치 몸과 마음에 쌓인 습관이 고착화되고 그것이 굳어져 질병이 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이 그 도성을 치료하신다는 말은 단순히 도성의 외적인 회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을 새로 짓고, 도로를 정비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토대입니다. 토대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공의와 정의의 토대 위에 세우신 하나님, 인애와 긍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토대입니다. 그 마음을 품고 살 때 우리를 사로잡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제 욕심 차리기 위해 남의 사정 돌보지 않는 무정한 마음이 분쟁을 낳고, 그 분쟁은 마음의 안식을 앗아가고, 불안한 마음은 타자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크게 만듭니다. 이웃은 함께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빼앗아갈지도 모르는 잠재적 적으로 인식됩니다. 이런 마음들이 부딪치는 곳에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슬림 혐오를 부추기는 동영상을 리트윗해서 논란거리가 되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배제와 혐오를 통해 그가 얻으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안전은 분명 아닙니다. 평화와 참된 안전은 무시와 배제와 힘의 우위를 통해 오지 않습니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사11:9)할 때 주어집니다.

• 회복시키소서
그러나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불안의 운명을 타고 난 것 같습니다. 삶은 늘 위태롭고, 소박한 행복의 꿈은 늘 저만치 떨어져 있습니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봅니다. 해처럼 밝은 얼굴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저마다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 있습니다. 가엾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뼛성을 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허용치가 너무 적습니다. 맑고 밝게 웃지 못합니다. 정신의 복원력이 너무 약해져서 작은 자극에도 넘어지곤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채 살고 있습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살다보니 한순간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무시당하기 싫어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치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몸과 마음이 더욱 확고하게 욕망의 밧줄에 얽혀듭니다.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욕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나는 장소가 아닙니다. 장엄한 세계가 사라진 자리에는 이익과 손해를 다투는 이들의 아귀다툼만 남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참상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시인 신동엽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는 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먹구름을, 그리고 지붕을 덮은 쇠항아리를 하늘로 알고 산다고 탄식합니다. 시인은 우리 마음속의 구름을 닦고, 머리를 뒤덮은 쇠항아리를 찢을 때 비로소 사람은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 바로 외경심과 연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력합니다. 먹구름을 닦지도 못하고 쇠항아리를 찢지도 못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지은 모든 죄악에서 그들을 깨끗이 씻어 주고, 그들이 나를 거역하여 저지른 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33:8)

하나님은 우상에게 절하고,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며 살았던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하셨지만,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로 선언하지는 않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렘29:11).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욕망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 지친 우리에게도 지금 씻음과 용서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지난 날 우리의 삶이 비록 부끄러움뿐이라 해도, 주님은 은총의 날개를 펴 우리를 안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우리들이지만, 주님은 우리를 용납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문제는 씻음 받고 용서받은 이후의 삶입니다. 더 이상 옛 삶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나를 두고 떠나려는가?' 하고 묻는 옛 삶의 습관들과 과감하게 결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자유인으로 태어나 노예로 사는 것을 일러 '타락'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유롭게 일하고,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삶을 경축할 때, 그리고 자유를 위협하는 일체의 억압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참 자유인답게 살 때 세상 만민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고, 하나님께 기쁨과 찬양과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 평화의 꿈
예레미야는 그렇게 회복된 세상의 꿈을 아주 소박한 언어에 담아 전합니다. 거창한 꿈이 아닙니다. 세계 최고가 된다든지,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너무 시시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지금은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까지 없는 이 곳과 이 땅의 모든 성읍에, 다시 양 떼를 뉘어 쉬게 할 목자들의 초장이 생겨날 것"이라면서 그 땅 도처에서 목자들이 그들이 치는 양을 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농촌지역의 풍경이라면 도시의 풍경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들려올 생활의 소음을 실감나게 전해줍니다.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리와 신랑 신부가 즐거워하는 소리와 감사의 찬양 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의 성전에서 감사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찬양할 것이다. '너희는 만군의 주님께 감사하여라! 진실로 주님은 선하시며, 진실로 그의 인자하심 영원히 변함이 없다.'"(렘33:11)

저는 성경에서 이 대목에 이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너무나 평범한 말입니다. 평온할 때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풍경입니다. 지금 여기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함께 웃고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특별한 계시나 은총을 바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특별한 것이 필요합니까?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나님이 명하신 일입니다.

거리에서 아우성치거나 울부짖지 않아도 되는 세상, 폭탄의 파열음과 전투기의 굉음이 들리지 않는 세상, 테러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세상, 가족을 잃은 이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사라진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헌신을 통해 옵니다. 지금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은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매년 이맘 때면 떠오르는 이현주 목사님의 시가 있습니다. "나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소서/알몸으로 오시는 임이여/지난날 나사렛 예수라는 옷을 입고/가난한 호숫가를 거니셨듯이/오늘은 나를 당신의 옷으로 두르시고/동강난 이 강산에 오십시오". 알몸으로 오시는 주님의 옷이 되려는 사람들, 마음 시린 사람의 이불이 되려는 사람들,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통해 세상은 조금씩 착한 사람들이 살기 쉬운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머무실 곳이 없어 외로우십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마음이, 가정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주님이 마음 편히 머무시는 거룩한 장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1


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18일 09시 46분 4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