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5. 숲을 만드는 소리
설교자 김재흥
본문 창18:1-8
설교일시 2018/09/02
오디오파일 s20180902.mp3 [660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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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창조절 주일 아침, 생명의 주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청파교회에 나온 여기 모인 모든 이들과 미국에 계신 담임목사님 위에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새로운 소망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갑작스런 폭우로 큰 피해를 본 이재민들 곁에도 이 시간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특별히 간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홍예선 정다운 부부 위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창조절기는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절 전까지 계속되는 절기입니다. 창조절기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뜻을 깊이 묵상하고, 인간의 탐욕과 무지로 인해 무너져가는 창조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을 집중하는 절기입니다.


최근 뉴스보도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2만 년 동안 한 번도 녹지 않았던 북극의 빙하가 2/3나 녹았다는 뉴스였습니다. 소위 ‘최후의 빙하’라고 일컫던 북극의 얼음층이 녹고 있답니다. 물론 북극의 빙하가 여름에 녹은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1980년대부터 녹기 시작한 빙하는 여름 기준으로 1/3이 남았고 이 속도라면 2030년 여름이면 모두 녹아버린답니다. 이제 12년 남았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전문가의 말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답니다. 북극의 빙하가 다 녹아버리면 인류는 멸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겨울 추위는 더 매서워질 거고, 여름 더위는 더 사나워질 거고, 태풍은 더 거세질 거고, 집중호우는 더 큰 피해를 일으킬 겁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자연재해가 그렇듯이 가난한 사람들부터 피해를 보게 되겠죠.



막막하고 각박한 사막

북극의 빙하가 녹는 원인은 지구온난화입니다. 지구온난화가 일으키는 큰 문제들이 많습니다만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사막화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축구장 600개 정도의 땅이 사막이 되고 있답니다. 대략 20년마다 제주도만한 땅이 사막으로 변하는 겁니다. 물론 그 안의 모든 생명들은 죽겠죠.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더라면 계속 푸른색으로 남아있었을 땅, 죽지 않았을 생명들입니다.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건너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정희성 시인의 <숲>이라는 시입니다. 메마른 땅, 생명이 살 수 없는 땅은 어쩌면 저 아프리카나 내몽골에 있는 것 아니라 우리 가까이, 너와 나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존에만 몰두해서 각자 도생의 삶을 살아갈 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잘 돌아보지 못합니다. 아니 잘 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조금 더 편해지고 내 욕망을 조금 더 충족시킬 수 있다면 너에게 아픔과 고통 주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는 것

나와 너 사이에 있는 막막하면서도 각박한 사막을 떠올리며 생각난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날 먹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빵을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내 살이다. 이 잔을 마시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내 피다.” 예수님의 삶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만, 어찌 보면 예수님의 삶은 ‘먹이는 삶’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마지막 말씀도 ‘내 양떼를 먹이라’였습니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막화의 이면에는, 서로 남을 먹으려고만 할 뿐 좀처럼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지 못하는 사막이 된 우리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창 무더운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어귀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사람 셋이 저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달려가 청합니다. ‘그냥 가지 마시고 제 장막에서 좀 쉬었다가 가시지요. 발도 씻으시고요. 제가 드실 음식도 좀 마련하겠습니다. 좀 편히 쉬시다가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지요.’ 아브라함이 살던 이스라엘 남부 헤브론 땅은 무척 무더운 곳이었고 광야처럼 황량해서 사람이 낮에 돌아다니면 금방 지치는 곳이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나그네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하더라도 그 낯선 세 사람을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자세는 극진하기 그지없습니다. 가히 왕을 대접하는 수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고 달려 나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많은 양의 빵을 만들고, 송아지까지 잡고, 그들이 나무그늘에서 식사하는 동안 옆에 서서 시중까지 들었습니다. 좀 ‘오버’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아브라함의 행동인데요.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뜻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아브라함이 대접한 그 세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막 같은 길을 가며 지친 사람을 대접하는 것, 그를 잘 먹이고 편히 쉬게 하여 그가 다시 상쾌해진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다는 말일 겁니다.



저는 오래 전에 큰 어려움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고 정말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홀로 걸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버티던 어느 날 어떤 분이 저를 집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 가족분들은 저도 다 알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반나절이나 되는 시간 전체를 저와 함께 보내주셨습니다. 같이 식사도 하고 집에서 차를 마시며 소소한 일상의 대화들을 나누고 볼링장에 가서 같이 볼링도 쳤습니다. 저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이야기 나누지 않았지만 저를 한 가족처럼 대해주시는 그 분들의 마음은 저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네가 살아야 내가 산다

중국 내몽골에 마오우쑤 사막이 있습니다. 그 사막 가까운 마을에 스무 살의 처자 인윈쩐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는 인위쩐을 데리고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총각이 혼자 사는 곳에 그녀를 내려놓고는 가버렸습니다. 이 황당한 상황에 인위쩐은 그만 울음이 터졌습니다. 사막 집에 있던 총각이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제발, 울지 말아요. 저도 이 사막이 무섭다고요.” 그 둘은 사막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인위쩐은 사막에서의 삶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놀랍게도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미친 짓이었죠. 10그루를 심으면 하나 정도가 살았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나무를 심고 매일 물을 주었습니다. 5년이 지나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작은 숲이 생겼습니다. 10년이 지나자 큰 숲이 생겼고 땅 속으로는 물길이 났습니다. 숲이 생기고 물이 생기자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책도 나왔고 다큐도 나왔는데요. 다큐를 보는데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생활하는 곳에서 좀 멀리 떨어진 데 심겨진 작은 묘목에 물을 주기 위해 인위쩐이 물지게를 지고 갑니다. 인위쩐은 작은 나무에 물을 주며 기도하듯 말합니다. “네가 살아야, 내가 산다. 잘 살아다오”



“네가 살아야, 내가 산다.” ‘네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생존 원리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은 뜻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슨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인간이란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이기적인 기계라고 정의합니다. 너무 비인간적이고 냉혹한 이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우리 마음속 풍경을 들여다볼 때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이론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 이기성이 있습니다. ‘난 어떻게든 살아야 해, 네가 어떻게 되건 말건. 난 내가 하고 싶은 건 해야만 해, 네가 어떻게 되건 말건. 난 내가 되고 싶은 건 돼야만 해, 네가 어떻게 되건 말건. 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해야만 해, 네 마음이 어떻게 되건 말건.’ 그 욕망이, 그 내면의 소리가 우리의 삶을 더욱 사막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숲을 만드는 소리

우리는 다른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날 먹으라”,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가십시오”, “네가 살아야 내가 산다” 이 소리들이야말로 점점 사막화되고 있는 이 세상을 다시 숲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사막을 만드는 소리보다 숲을 만드는 소리를 더 크게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막을 만드는 소리와 숲을 만드는 소리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소리가 누군가의 가슴에 한 번 가 닿으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내게 전한 그 사람에게 되돌려 주든지 가까운 누군가에게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소리 다 지속력과 전염력이 강합니다.



청파교회는 10년 전부터 몽골에 사막화 방지를 위해 나무를 심어오고 있습니다. 지난 8월, 우리 교회 환경부원들이 몽골에 조성 중인 ‘은총의 숲’을 방문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푸른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우리가 몽골뿐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도, 막막함과 삭막함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이 사회 곳곳에도 푸른 숲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세상에 소리 하나 남기고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게 운명처럼 주어진 소리가, 나의 주된 환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사막을 만드는 소리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숲을 만드는 소리를 더 크게 듣는 이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나 자신부터가 하나의 숲이 되고 더 나아가 그 누군가의 가슴속에 새로운 숲을 만드는 소리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런 귀한 창조의 사역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02일 12시 26분 3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