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8. 외롭기로 작정하면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 5:33-42
설교일시 20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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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기로 작정하면
행5:33-42
(2018/09/23, 창조절 제4주, 청년주일)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율법 교사로서, 온 백성에게서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이 의회 가운데서 일어나서,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게 한 뒤에, 의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 조심하십시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서,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니, 약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소.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하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소. 그 뒤에 인구 조사를 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소. 그도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소.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가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 그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 주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다.]

∙ 평화의 문이 열린다
한가위 명절을 맞으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이었습니다. 생중계되는 화면을 보면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 없는 세상, 평화를 향한 우리의 꿈이 아름답게 무르익어가고 있는 것 같아 참 감사했습니다. 모든 참된 만남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물론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19일 저녁,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대통령께서 평양 시민들을 상대로 한 직접 연설은 역사적 이정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백두산 등정은 세계인들에게 한민족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켰습니다.

그런 역사적 순간들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 뼈의 골짜기를 떠올렸습니다. 에스겔은 그 마른 뼈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외칩니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겔37:9b). 생기가 불어오자 마른 뼈들이 맞춰지고,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습니다. 죽었던 민족의 부활입니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난 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나라는 각각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곧 마른 뼈가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한동안 지속된 고난과 시련은 잃어버렸던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열망을 일으켰습니다. 때가 무르익자 하나님은 에스겔에서 이런 지시를 내리십니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겔37:16-17)

예언자는 꿈꾸는 사람입니다. 몽상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갈라놓던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무너지고, 서로를 적대시하던 사람들이 어깨를 겯고 함께 아름다운 미래를 일구는 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 절망의 어둠을 넘어
믿음의 사람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변방인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 운동은 로마가 지배하던 세상, 힘이 정의로 여겨지던 세상에 대한 유쾌한 반란이었습니다. 힘 있는 이들이 힘 없는 이들을 박해하고 착취하는 것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오래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그 시대의 아들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부모를 닮기도 하지만 자기 시대를 닮는 법입니다. 살풍경한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뻔뻔함이 필요합니다. 종교는 그런 야수적 삶의 방식에 제동을 걸어야 했지만, 종교 기득권자들은 이미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었기에 그런 세상을 바꿀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일을 통해 자기들의 특권을 공고히 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강박적 집착은 타자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몰아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집착이 종교를 위선적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거룩의 외양이 아니었습니다. 질병과 가난과 억압에 짓눌리는 사람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소명을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는 말로 요약하셨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일깨워주고, 살아갈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 에스겔의 언어로 말하자면 마른 뼈 같은 이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삶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한 이들은 모두 이 꿈에 사로잡힌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곁에 계실 때 그들은 삶의 충만함을 맛보았습니다. 병자들이 회복되고, 귀신들이 쫓겨나고, 모래 알갱이처럼 서걱이던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개별화된 삶의 곤고함을 넘어 낯선 이들과 함께 하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바로 그런 기쁨의 결정판이었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그들은 음식을 함께 나누며 하나됨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차별 없는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자기들 속에 잠재되어 있던 선의 가능성이 싹틈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혁명적 황홀의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일상생활의 곤고함은 강한 인력이 되어 그들을 옛 삶의 방식으로 잡아 끌곤 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어쩌면 불꽃처럼 찾아왔던 신적 광휘의 기억을 붙들고 현실의 어둠과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 동안에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타오르는 불꽃이었습니다. 주님의 존재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하늘을 가리키는 표지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처형으로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혁명적 황홀은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어둔 세상에서 얼핏 보았던 빛은 가물가물 스러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마치 꿈을 꾼 듯 했을 겁니다. 희망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더 깊은 상실감이 남는 법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희망의 무덤이 아니라 희망의 모태였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이 오롯이 드러난 자리였고, 그래서 십자가는 부활의 문이었습니다. 부활과 성령강림의 사건은 마른 뼈들처럼 서걱이던 이들을 하늘 군대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성령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숨이고, 세상 만물을 일깨우는 생기입니다. 성령에 충만함을 경험한 사도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어선 사람이었습니다.

∙ 기득권자들의 민낯
하지만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 탄탄대로를 걷는 것은 아닙니다. 옛 세계의 반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것을 막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많은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샘이 있는 곳에 동물들이 몰려들 듯 목마름을 안고 살던 이들에게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그들을 통해 나타나는 사건들은 가뭄에 단비와 같았을 겁니다.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어 솔로몬 행각에 모이곤 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특색은 나눔과 섬김과 돌봄 축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믿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어느 선교 신학자는 ‘선교는 매력의 감염’(호켄다이크)이라고 말했습니다. 믿는 이들은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성전 체제를 구성하고 있던 이들은 이런 현상이 못마땅했습니다. 사도들의 감화력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들의 존재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시기심을 드러냈습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기와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마치 자기 존재를 부정당한 것 같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기심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마음인 인색과도 관련됩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래서 다른 이들의 평판을 낮추는 데 전력을 다합니다. 자기의 시도가 별 효과를 발휘하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대제사장과 그의 지지자들인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가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사도들을 데리고 나가서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이릅니다. 다음 날 사도들을 심문하려던 대제사장은 그들이 성전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경비원들을 보내 사도들을 잡아 공의회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했건만 왜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느냐고 문책합니다. 그때 사도들이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행5:29-30)

사도들은 그들이 공모하여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고 말하면서, 그분이야말로 영도자와 구주라고 증언합니다. 사도들은 경건의 의상을 입고 있는 그들의 민낯을 폭로했던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사람들은 격분합니다. 사도들의 증언하는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들이 더욱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지금껏 하찮게 여겼던 이들이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이야기하는 그런 상황이었을 겁니다. 눈만 치켜떠도 고분고분 복종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니오’라고 말할 때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정말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 젖기를 각오하면
그러나 모두가 다 격분에 휘둘리지는 않았습니다. 폭력의 열정이 이성의 둑을 넘을 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가말리엘입니다. 그는 율법 교사이면서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는 침착한 말로 무모하게 행동하지 말자며 공회원들을 설득합니다. 사도들을 어떻게 다룰지는 조금 시간을 두고 판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면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시도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들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저절로 소멸할 것이니 너무 과민 반응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전거를 듭니다. 스스로를 ‘위대한 자’라고 선전했던 드다를 따르는 사람들, 반란을 획책했던 갈릴리 사람 유다를 따르던 사람들은 카리스마적 리더가 죽자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재차 강조하여 말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5:38-39)

공의회 회원들은 그 권위자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하고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풀무원을 만드신 원경선 선생은 십자가 정신을 ‘지기라 정신’이라고 요약합니다. 경상도 방언입니다. ‘죽이라’고 대드는 사람은 당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자기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맥없이 사는 것은 어떻게든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 다치지 않으려는 소심함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삶은 힘겹고, 피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일들이 소리없이 다가와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기도 합니다. 저는 아주 오래 전에 만난 김달진 선생의 한 문장을 통해 인생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인생이란 큰비가 쏟아지는 광야를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다. 달려보아도 헐떡거려보아도 비에 젖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먼저 젖기를 각오하시오. 그리하여 비를 맞으며 유유히 걸어가시오. 젖기는 일반이나 고뇌는 적을 것이다.”(김달진, <山居日記>, 세계사, 1990년 5월 30일, p.100)

젖기를 각오하면 인생이 가벼워집니다. 젖지 않으려니 전전긍긍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도 같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세상살이가 힘겹다고 하여 투덜거리거나 애상에 빠지지 말자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외롭지 않으려니 외롭습니다. 치열하게 살지 않으니 조건이 어떻다는 핑계를 자꾸 대며 주저합니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라는 구절이 큰 도전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청년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삶의 현실이 참 척박합니다. 현실은 곤고하고 미래의 전망은 불투명합니다. 왠지 억울합니다. 자기 존엄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망하는 버릇은 소인배들의 몫입니다. 원망해 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분노해야 합니다. 남들이 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답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몰아대는 삶의 문법 구조에 맥없이 동화되기 보다는, 자기 문법을 만들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길 빕니다. 마른 뼈의 골짜기에서 하늘 군대가 일어설 때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23일 11시 09분 5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