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7. 예수, 우리 왕이여!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계1:4-7
설교일시 2018/11/25
오디오파일 s20181125-1.mp3 [1650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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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우리 왕이여!
계1:4-7
(2018/11/25, 왕국주일)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우리 믿음의 현주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소설 절기에 접어들면서 부쩍 날이 쌀쌀해졌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일 년의 마지막 주일이면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 되심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십니까?” “주님을 왕이라 고백하면서도 다른 왕을 모시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질문 앞에 설 때마다 말문이 막힐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다니는 우리 삶의 부박함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도 소중하기에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는 자부심, 가말리엘 문하생이라는 자랑스러운 스펙,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율법에 대한 열정, 로마 시민이라는 특권, 이 모든 것을 저울의 한쪽에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현실을 올려놓을 때, 저울은 지체 없이 그리스도의 종 쪽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그는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것을 믿음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이 구절은 복음을 위해 당하는 어떤 시련이나 박해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당당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믿음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우리 영혼은 작은 자극에도 비명을 질러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내 영혼이 납작해졌다고 느낄 때마다 시편36편 말씀을 묵상합니다.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시36:5-6)

시인에게 세계는 장엄 그 자체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숨결이 아니 미친 곳이 없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혼돈의 물결이 세상을 덮치고 어둠이 지극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사랑은 철회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통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인은 확신합니다. 그런 확신이 시인을 일으켜 세웁니다. 나는 비록 패배할지라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즐거이 자기 앞에 주어진 도전을 받아들입니다. 부활 신앙은 이런 태도의 절정입니다. 우리 믿음은 이런 경지에까지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성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에 머물던 요한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밧모(Patmos)섬에 유배 가 있을 때 본 비전을 기록한 책입니다. 주전 31년에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에서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된 후 로마는 지중해를 내해로 한 거의 모든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로마는 신의 국가를 표방했습니다. 식민지 이곳저곳에 여신 로마(goddess Roma)의 동상과 신격화된 황제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기후 조건에 관계없이 로마의 전차가 달릴 수 있도록 마련된 도로, 각 성문 앞에 세워지는 개선문, 로마의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세워진 극장, 화려한 목욕 시설 등은 로마의 위대함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었습니다. 로마는 무력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를 통해서도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로마의 위세는 압도적이었고 누구도 그 세력을 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유력한 많은 이들은 로마 문화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누린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각 지역의 토호들은 로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시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의 상당 부분을 그런 동상을 세우거나 신전을 세우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1세기 말엽의 상황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와 뒤이은 황제들의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추방되었습니다. 요한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유배지에서도 그의 영혼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로마처럼 보여도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그는 흔들림 없이 확신했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요한은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계1:4-5)

요한은 하나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으로 표현합니다. 사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기 소개를 상세하게 풀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문장의 기본적 의미는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에 다 담길 수 없는 크신 존재라는 뜻이지만, 더 깊은 의미도 함축하고 있씁니다. “나는 너희가 장차 보게 될 방식으로 너희와 함께 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실존적, 실천적 현존, 곧 사람들을 위하여 계시는 그분의 존재를 드러내는 말이라는 것입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발간한 ‘주석성경’ 참조).

‘계시다’라는 말은 평범한 말인 듯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의 근원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단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무한히 뛰어넘는 창조자이신 동시에, 인간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간적 순서를 뒤바꿔놓고 있습니다. ‘현재’, ‘과거’, ‘미래’ 순으로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박해의 시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이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백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성령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 그것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요한공동체가 유난히 강조하는 완전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 영이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이 대목은 이사야 11장 2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성령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인간의 생각과 지혜를 뛰어넘습니다. 요한공동체는 성령께서 임하면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요14:26),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신다(요16:8)고 가르쳤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습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같은 진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7-28)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다 합해도 하나님의 어리석음조차 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세심하게 살피며 우리에게 하늘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왕이신 예수
이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신실한 증인이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고,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라고 소개합니다. 역시 세 가지 표현이 등장합니다. ‘신실한 증인’은 십자가를,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는 부활을,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는 재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공동체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으로 바라봅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을 당신의 소명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주님은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요18: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로 ‘증인‘이라는 단어와 ‘순교’라는 단어는 뿌리가 같습니다. 참을 증언하는 사람의 운명은 순탄치 않습니다. 신실한 증인이란 표현 속에는 십자가의 사랑이 오롯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생명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문이었습니다. 꽃이 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처럼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생명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첫 열매라는 말은 우리 또한 부활의 열매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도전이요 초대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오실 왕이십니다. 그날이 오면 세상의 모든 권세들을 당신의 발 앞에 굴복시키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 돌입해 오시는 주님의 현실에 주목하면서 그 현실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위의 것을 추구하라‘는 말은 땅의 현실에서 눈을 돌려 하늘만 바라보라는 말이 아니라, 이 음란하고 타락한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기를 바라십니다.

요한은 이런 그리스도의 삼중적 존재 양식이 우리에게 왜 은혜인지를 설명합니다. 주님은 자기의 피로 죄에서 우리를 해방해주셨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죄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소속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힘(might)이 아니라 정의(right)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 지배가 아니라 사랑이 더 궁극적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에 속한 사람임은 일상의 자리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정화하는 사람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이런 삶으로 초대해주신 주님께 영광과 권세가 무궁하기를 빕니다.

∙세상 흐름을 거슬러
하지만 이런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신 이들의 삶이 늘 꽃길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현실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주님은 생명에 이르는 길을 좁은 길이라 하셨습니다. 그 길은 인기가 없습니다. 풍요의 환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른 삶을 꿈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가치에 동화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일본 교토에 있는 이나리 신사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쌀, 농업, 성공의 신 ‘이나리’를 모신 곳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혹은 성공을 감사해서 사람들이 세워놓은 ‘도리이‘라는 문입니다. 사찰의 일주문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도리이를 세우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돈을 희사해야 한다는데 그런 도리이가 70-80cm 간격으로죽 열지어 서있습니다. 산길 걷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도리이가 끝나는 곳까지 가볼 생각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가 결국 정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풍요와 부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정말 치열하고 처절하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뜩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마음에도 이런 도리이들이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 하면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풍요로움을 약속하는 세계에 이끌립니다. 그런 세상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제시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꿈꾸어야 합니다. 수가 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주님은 제자들이 마을에서 돌아와서 음식을 권하자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면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요4:3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양식을 먹어야 우리 영혼이 자유로워지고, 웅숭깊어지고, 맑아집니다. 예수를 왕으로 모실 때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세상의 인력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초겨울의 쓸쓸함이 감도는 이 계절에 이 양식으로 우리가 새로운 힘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11월 25일 11시 07분 3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