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3. 내가 그 사람이다
설교자 김재흥
본문 요 18:1-8
설교일시 2019/03/31
오디오파일 s20190331.mp3 [1264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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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사람이다
요 18:1-8
(2019/03/31, 사순절 제4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와 그 제자들이 거기에 들어가셨다. 예수가 그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여러 번 모이셨으므로,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 곳을 알고 있었다. 유다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 다시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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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사순절 넷째 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새로운 소망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미국에 있는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가신 담임목사님과 그 교회들 위에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마당에 들어오시면서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화단에 매화꽃이 만개했습니다. 해마다 매화가 피긴 했지만, 올해처럼 많은 꽃이 핀 적은 없습니다. 어떤 해는 30여 개, 어떤 해는 10여 개, 어떤 해는 50여 개가 폈는데 올해는 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이 피었습니다. 꽃이 가득 피니 매화향도 그 어느 해보다 진하게 납니다. 마당을 오가다 보면 코끝으로 매화향이 바람을 타고 확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미세먼지가 가득하고 바로 옆에 도로가 있어 매연이 가득한데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은은한 향기를 내는 매화가 참 대견합니다. 그런 매화를 바라보다가 그 매화가 이 시대 이 시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과 예언자처럼 우리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온기를 온전히 받아들여 우리의 영혼도 새롭게 피어나고, 참 생명 되신 주님께 믿음의 뿌리를 온전히 뻗어서 우리의 마음에서도 새로운 향기가 솟아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제주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제주의 중부와 동부 사이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비자림로. 길 양옆으로 높게 뻗은 삼나무들이 병풍처럼 서 있습니다. 이국적인 느낌을 넘어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게 하는 그 길을 천천히 달리다 보면 마음이 자연스레 평안해지는 그런 길입니다. 그런데 제주시는 길이 좁다는 이유로 왕복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공사를 진행했다가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반발로 중단했었는데 다시 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30년생 삼나무 수백 그루를 베어냈습니다.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 회원들은 다시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20초 빨리 가기 위해 30년 된 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도로가 확장되면 20초가 아니라 2분은 더 빨리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주를 찾는 이유는 좀 더 빨리 달리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숲이 있어 느리게 가도 편안한 여유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가는 거죠. 날카로운 기계톱에 잘려 밑동만 남은 나무에는 봄을 맞아 뿌리를 타고 올라온 물줄기가 핏물처럼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이건 벌목이 아니라 살목(殺木)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렇게 드러난 숲의 속살 위에 얼기설기 쌓여 있는 삼나무들은 마치 사람의 시쳇더미처럼 보였습니다.

몇 주에 걸쳐 정치인과 사회 고위직 인사와 연예인의 성폭력 사건이 뉴스에 계속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과 권력을 앞세워 다른 사람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소모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잠깐의 유희를 위해 사람의 인권을 짓밟고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곤 아무런 반성이나 사과 없이 돈과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죄를 덮으려 했습니다. 그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이 겪었을 충격과 아픔의 깊이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야만적인 일들이 그들에게는 한 번의 일탈이 아니라 일상이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건의 가해자들이 그들을 처벌해야 하는 경찰과 검찰과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져 얼마나 제대로 진상 조사가 이루어질지,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질지 걱정이 되는 상황입니다.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더 쌓여가지 않도록,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겠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앞에 커다란 질문으로 서 있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사람에게 무엇인가? 사람은 다른 생명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나의 편리와 만족을 위해서 다른 이와 다른 생명을 소모품처럼 여길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작은 권력과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대하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은 것처럼 대할 때가 많습니다. 함부로 막 대하는 거죠. 그러나 그 순간 사람이 아니고 생명이 아닌 그 무엇이 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우리가 소위 고난주간이라고 부르는 그 주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이어지는 밤 시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건너편 감람산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자주 모였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둑한 동산에 모여 있을 때, 저 멀리 예루살렘 성에서부터 많은 횃불이 무리를 이루어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횃불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로마 군인들과 성전 경비병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과 성전 경비병들의 손에는 횃불과 등불 말고도 칼과 창이 들려있었고 군인들 사이에는 가롯 유다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큰 영광을 얻게 되실 것이며 자신들도 한자리씩 얻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까요. 눈치 빠른 제자는 ‘조금 전 유월절 저녁 식사 때 예수님께서, 누군가 당신을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하신 일이 이 일인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3절에 나와 있는 로마 ‘군대’는 ‘스페이라’인데 부대원이 600명, 우리나라 군대로 치면 일개 대대급입니다. 그 수많은 무장 군인들에게 그것도 밤에 둘러싸인 제자들은 어지간히 놀라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두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은 앞으로 나서서 군인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답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 예수님의 이 당당한 반응과 태도는 로마 군인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예상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 일행을 잡으러 오면서 내심 이스라엘 사회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예수라는 자도 자신들의 무력 앞에서는 여느 사람처럼 몸을 사릴 거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히 “내가 그 사람이다”라며 그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 소리에 군인들은 뒤로 물러나 쓰러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말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내가 너희들이 찾는 나사렛 사람 예수다’라는 의미이고 다른 한 가지는 ‘나는 하나님과 같은 자다’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의 헬라어 원문은 ‘에고 에이미’입니다. 영어로는 'I am'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에고 에이미’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예수님에게서 신적 권위를 느끼고 신의 현현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맞다. 너희들이 찾는 것은 나다. 그러니 나의 제자들은 그냥 가게 해 달라.’ 순간 정적이 흘렀을 것입니다. 군인들은 ‘어찌하지?’하며 고민했을 것이고, 제자들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들어주기만을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군인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문제적 인물과 그의 추종자들이 함께 있는데 그 우두머리만 잡고 나머지는 풀어주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그 군인들은 무엇에 홀렸는지 칼을 들고 저항하던 베드로를 포함해서 아무 제자도 잡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풍경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마26:56, 막14:50) 제자들을 살리기 위해, 군인들의 칼날과 제자들 사이에 자신을 세우고 ‘나 하나만 잡아가고 내 제자들에게는 손대지 말라’는 스승 예수의 모습과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자신들을 살리려는 스승을 사지(死地)에 버려두고 자기 목숨 하나 건지려 도망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극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그 긴 밤이 지나감을 알리는 닭울음 소리에 눈물을 흘렸던 것은 베드로 한 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 급히 도망쳐 나오느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 아니 외면했던 것들이 11명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그 새벽녘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들었을 것입니다. ‘아,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을까? 무슨 생각으로 스승님을 사지에 놓아두고 나만 빠져나온 거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은 끝없는 눈물로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전날 밤 로마 군인들의 칼날과 자기들 사이에 서서, 로마 군인들을 향해, ‘나 하나만 잡아가고 내 제자들에게는 손대지 마라’ 외치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음성은 그들 마음속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뜨거운 화인(火印)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제자들에게 그 체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보다 더 강렬한 구원의 체험으로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에고 에이미”가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때 이 구문을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6:48), 나는 문이다.(10:9)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빛이다.(12:49)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선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했던 고백이라고 생각할 때 그 의미가 더욱 큽니다. 생각해보시죠.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말과 ‘그분은 우리의 선한 목자였습니다’라는 말 중 어떤 말이 더 값진 말입니까? 정체성에 대한 바른 선언은 ‘나는 무엇이다’라는 말보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런 분이시다’라는 말입니다. 자기들을 살리기 위해 군인들의 칼날과 자기들 사이에 당신을 세우셨던 예수님, 마치 하나님께서나 하실 법한 일을 하셨던 예수님, 제자들은 그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체험했고 그런 체험을 했기에 예수님을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선한 목자였어.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어. 그분은 우리의 빛이었어. 그분이 보여주셨던 그 마음이야말로 죽음이 어쩌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이야.


내가 그 사람이다

오늘의 본문에서 더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제자들을 잡으러 온 군인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 저에게는 이 질문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질문처럼 들렸습니다. 사람과 생명 귀한 줄 모르고 자기만족과 편리를 위해 다른 이와 다른 생명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세상, ‘그런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고 올바른 세상도 아니다’ 입으로는 외치지만 몸으로는 여전히 그렇게들 살아가는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면서 지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찾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소모품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나와 내가 감당해야 할 고난의 사이에 들어와서 기꺼이 그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여기며 함께 아파해주는 사람을.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다는 군인들의 말에 예수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답하셨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말도 꼭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가 찾는 그 사람 어디 있습니까?”라는 우리의 갈급한 질문에 예수님께서 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 내가 너희가 찾아야 하는 그 사람이다.”

기계톱 소리가 윙윙거리는 제주 비자림로에 환경활동가들과 몇몇 시민들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무참하게 베어지는 나무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사람을 껴안듯 나무를 껴안은 그들의 오른손과 왼손 사이에는 피켓이 들려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숲입니다.” 그들은 무고하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베어지는 나무들, 입이 없어 말 못 하는 나무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그 중 어느 한 분은 작업자의 손에서 기계톱을 낚아챘고 기계톱을 껴안은 채 나무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다행히 기계톱은 작동하지 않았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작업자들 손에 이끌려 뒤로 밀려나야만 했습니다. 그분들은 차마 비자림로를 떠나지 못했고 오두막과 텐트를 설치하고 24시간 작업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모임 이름은 '비자림로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시민모임'입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스러져가는 생명을 위해 뭐라도 하려는 마음, 나무 홀로 그 아픔과 고통을 겪게 하지 않기 위해 그 위험과 고통 속으로 자기를 던져 넣는 마음. 오늘날 우리가 찾아야 하는 마음은 바로 그 마음이고, 그 마음이 예수의 마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곳곳에서 그런 예수님의 마음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요한복음에서만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배만으로도 힘겨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짐마저 지우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던 거대한 성전체제를 허물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혼자의 몸으로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한 많은 사연을 안고 살아가던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 유대와 사마리아 사람 간의 배타적 감정과 남녀유별이라는 간극도 넘으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간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었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 위해 안식일 법을 깨셨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당신을 찾아 나온 수천 명의 배고픔을 외면하지 않고 뭐라도 주고자 하셨습니다. 한밤중 디베랴 바닷가에서 풍랑을 만나 크게 두려워하던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그 험한 물살을 헤쳐나가셨습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이는 게 당연했던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켜 주셨습니다. 부모조차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나면서부터 앞 못 보는 자의 막막함을 알아주셨고 그의 아픔을 씻어주셨습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송장이 된 나사로를 죽음에서 건져내시고자 무덤 앞에서 눈물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간절히 누군가를 찾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찾는 그 사람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런 사람은 어디에 있냐?”라는 사람들의 외침이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산과 들, 강과 바다에서도 “그런 사람은 어디에 있냐”라는 피조물들의 탄식소리가 끝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라도, 단 한 사람에게라도, 한 생명에게라도 우리가 ‘그 사람’이 되어 줄 수 없다면, 우리 삶의 의미와 우리 믿음과 신앙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 그분의 고난과 아픔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누군가에게 그 사람이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입으로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보다 그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그가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참 생명의 길과 참 사람의 길을 걷기로 결단하는 모든 이들 위에 주님께서 늘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3월 31일 11시 15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