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6. 상처를 통해 보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20:24-29
설교일시 2019/04/21
오디오파일 s20190421.mp3 [1030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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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통해 보다
요20:24-29
(2019/04/21, 부활절)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당혹감과 두려움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넘치시기를 빕니다. 온 세계가 부활의 기쁨을 경축하는 시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전쟁과 테러로 고통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도 주님의 부활이 좋은 소식이 되기를 빕니다. 지난 화요일, 많은 이들이 세월호 참사 5주기를 추모하고 있을 때, 우리는 T.V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시테 섬에 있는 노틀담(Notre Dame) 성당이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종교적 차이를 넘어 세계인들의 사랑받던 그 아름다운 예배당이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많은 이들이 노틀담을 조망할 수 있는 거리에 서서 함께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은 것 같은 ‘상실감‘과 ‘아픔’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가시면류관과 장미창 같은 소중한 유물들이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 사이에 성당 재건을 위해 약속된 성금이 무려 1조 2천억 원에 이른다는 사실도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물론 기업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비극이 새로운 연대와 희망의 문을 열어젖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저력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 갇혀 계셨던 이틀 동안 세상은 어두웠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을 겁니다. 절망과 무기력한 분노, 그리고 주님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회한이 제자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멍한 상태에 머무를 뿐이었습니다. 역시 강인한 것은 여인들입니다. 여인들은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몰약과 향품으로 그 귀한 주님의 시신을 닦아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천사를 통해 천만 뜻밖의 소식을 듣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쁜 소식이긴 했지만 믿기 어려웠습니다. 마가는 여인들이 느낀 당혹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뛰쳐 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막16:8).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여인들이 정신을 수습한 후 주님의 부활을 전했을 때 제자들 역시 그 증언을 ‘어처구니없는 말’(눅24:11)로 들었습니다. 이것이 부활 소식에 대한 제자들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부활 소식에 사람들이 처음부터 ‘할렐루야, 아멘!’ 하는 반응한 것은 아닙니다.

∙도마를 위한 변명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도마의 의심이라는 주제로 자주 다루어지는 본문입니다. 사람들은 즐겨 도마의 이름 앞에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그는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일종의 반면교사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을 통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그는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요20:25)라고 말합니다. 그는 매우 실증적인 영혼인 것 같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정직함입니다. 신앙의 적은 이런 정직한 회의가 아니라 별다른 고민 없이 통념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믿는 척하는 이들은 신앙의 급진적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에 모여 있을 때 주님이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셔서 평안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요20: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장면을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는 아주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림 속의 도마는 마치 해부학 교실에 있는 학생처럼 진지한 얼굴로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놀라운 것은 주님이 도마의 손을 끌어 당신 상처를 만져보도록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도마의 회의를 책망하기는커녕 그를 바른 인식으로 인도하기 위해 당신의 상처를 내보이고 계십니다.

∙왜 하필이면 상처인가?
이 본문을 묵상하다가 ‘왜 하필이면 주님을 알아보는 표가 상처 자국인가‘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목소리나 모습만으로는 그분을 인식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도마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복음서 기자인 요한은 주님의 상처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요? 요한은 당당한 승리자 예수가 아니라 상처를 내보이시는 주님을 우리 앞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화상을 입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 싫어하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했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 것을 요구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서 비로소 어머니의 화상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화상 자국은 그가 아기일 때 집에 불이 나자 그를 구하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었다가 얻은 상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내보이신 상처는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주님이 짊어지신 고통의 흔적입니다. 그 상처야말로 사랑의 흔적입니다.

그 상처를 보고, 그 상처의 아픔을 예리하게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마음에 잇댄 사람이 됩니다. 영국 출신의 인도 선교사 스탠리 존스의 말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보좌에 앉으신 분 곁에 서있는 상처 입은 어린양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죄값을 지불하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 우주 안에 있는 힘의 중심이라고 말한다”(스탠리 존스, <순례자의 노래>, 김순현 옮김, 2007년 5월 25일, 복있는사람, p.278)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사람들,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과 우리가 접촉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그곳에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관념도 신학 이론도 아닙니다. 삶을 통해 실증되는 현실입니다. 처음에는 여인들도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당혹스러워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압니다. 많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위협도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그들의 발걸음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그 놀라운 사건을 사람들에게 증언했고, 그것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징표가 되었습니다. 부활은 먼 훗날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상처 자국과의 접속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상처라는 그림물감
주님의 손바닥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본 후에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됐습니다. 그는 비로소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몸에 난 상처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볼 때 우리 앞에 영생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상처 입은 자만이 상처 입은 이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도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것을 아름다운 영혼의 풍경으로 바꿔내십시오. 우리의 상처를 주님께 드러내 보일 용기를 낼 때 주님은 그 상처를 들어 세상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그 상처를 통해 상처를 입은 이들을 보십시오. 그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때 상처는 거룩한 삶의 열쇠가 됩니다. 고진하 시인은 그 놀라운 진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상처야말로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는 물감이다. 상처가 있기에 우리는 진정 깊은 사랑을 할 수 있고, 상처 때문에 따뜻하고 정직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상처를 통해 한층 고결한 영혼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뉴스앤조이, 2001년 09월 11일, ‘상처가 만든 아름다운 무늬’ 중에서)

주님은 어쩌면 지금 상처 입은 이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 방황하는 청소년들, 홀로 아기를 기르는 미혼모들, 난민들, 노숙인들, 차별 속에 살아가는 장애인들, 소수자,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신음하는 피조세계의 상처를 보듬으십시오. 그들이 직면한 아픔을 외면한 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시길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 넘치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4월 21일 10시 57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