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8. 눈여겨 보시는 하나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32:1-11
설교일시 202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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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여겨 보시는 하나님
시32:1-11
(2020/09/20, 창조절 제3주)

[복되어라! 거역한 죄 용서받고 허물을 벗은 그 사람! 주님께서 죄 없는 자로 여겨주시는 그 사람! 마음에 속임수가 없는 그 사람! 그는 복되고 복되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습니다.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 가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 (셀라)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거역한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님께서는 나의 죄악을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 (셀라) 경건한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에, 모두 주님께 기도하게 해주십시오. 고난이 홍수처럼 밀어닥쳐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를 재난에서 지켜 주실 분!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니, 나는 소리 높여 주님의 구원을 노래하렵니다. (셀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너에게 지시하고 가르쳐 주마. 너를 눈여겨 보며 너의 조언자가 되어 주겠다." "너희는 재갈과 굴레를 씌워야만 잡아 둘 수 있는 분별없는 노새나 말처럼 되지 말아라." 악한 자에게는 고통이 많으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은 사랑이 넘친다. 의인들아, 너희는 주님을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정직한 사람들아, 너희는 다 함께 기뻐 환호하여라.]

∙누가 행복한가?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내일 모레면 추분 절기가 시작됩니다. 조석으로 바람이 제법 선득합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시금치 같은 겨울 남새 씨를 심고, 조나 수수를 수확하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벼도 수확해야 할 것입니다. 바쁘지만 충만한 계절입니다. 가을의 초입인 지금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Rosh Hashana, 곧 신년 축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 무렵부터 팔레스타인은 우기로 접어듭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른 비가 내리는 때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새해로부터 열흘째 되는 날이 욤 키푸르Yom Kippur 곧 대속죄일이고, 그날로부터 닷새째 되는 날이 초막절의 시작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지금은 매우 흥분되는 시간인 셈입니다. 은총으로 열린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쁨, 지나온 삶에 대한 절절한 통회, 언약 백성으로서의 재각성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가을도 은총의 나날이 되기를 빕니다.

오늘의 시편은 ‘복되어라!’(‘esher)라는 탄성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행복하다‘고 번역해도 무방합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욕망하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거역한 죄 용서받고 허물을 벗은 사람!’, ‘주님께서 죄 없는 자로 여겨주시는 그 사람!’, ‘마음에 속임수가 없는 그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용서 받은 사람입니다. 시인은 인간이 빠져들기 쉬운 죄를 죽 열거하고 있습니다. 반역한 죄(페샤pesha’)는 적극적인 위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저항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욕심에 이끌려 죄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허물(해타아chata’ah)는 ‘빗나감, 누락, 미치지 못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위임해주신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누구도 죄 없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을 냉혹하게 벌하지 않으십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이 우리를 감싸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자꾸 넘어지고, 어긋난 길로 나가고, 반항적이고, 신실하지 못한 우리를 가엾게 여기십니다. 다른 히브리의 시인도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시103:13-14)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시는 까닭은 우리를 응석받이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으로 회복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웃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사랑의 수고를 다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은총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래서 말했습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고전13:11)

미성숙한 시절의 일을 버리고 자기 삶에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것은 죄와 허물을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백은 문을 두드려 여는 것
처음부터 시인이 이런 인식에 이르렀던 것은 아닙니다. 시간 속을 걷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일입니다. 불안의 풍랑이 우리를 쉼 없이 몰아치기 때문입니다. 삶을 누리기는커녕 버텨야 할 때가 많습니다. 더러 평안을 누릴 때도 있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다음 순간 또 다른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기쁨과 슬픔, 불안과 안도감, 충만함과 탈진이 갈마들며 우리 인생의 무늬를 만듭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앙버티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다운 삶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가끔은 반성조차 없이 시간의 물결에 떠밀리며 살기도 합니다. 이상한 무거움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 무거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시인의 고백입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습니다.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 가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3-4)

살기 위해서 우리는 타협합니다. 세상과도 타협하고 자기 자신과도 타협합니다. 젊은 시절, 우리는 꽤 엄정한 척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부딪치면서 우리는 모서리를 잃어버린 네모꼴처럼 되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갈등을 마무리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삶의 기준을 자꾸만 낮추며 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삶은 무거워집니다. 시인은 그 까닭이 우리의 감춰진 죄, 드러나지 않은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그런 죄를 모른 체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시인은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다‘고 말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적당히 엉너리 치며 사는 것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숨겨진 죄, 용서받지 못한 죄는 우리 삶을 무겁게 만듭니다. 숨겨둔 죄는 우리 영혼을 흐리게 만들어 맑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의 부산물인 부정적 감정과 죄는 쓰레기와 같습니다. 그것을 자꾸 떠나가게 해야(letting-go) 삶이 맑아집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검은 봉지에 담아 집에 고이 모셔두는 사람이 있나요?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시인은 자기의 죄를 덮어두지 않고 다 털어놓자 주님께서 기꺼이 용서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자기의 이중성과 대면한다는 말인 동시에 문을 열어 하나님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추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시인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때 하나님은 즉시 용서해주십니다. 이웃을 무정하게 대한 죄, 누군가를 혐오한 죄, 누군가를 수단으로 삼은 죄, 불의를 방조한 죄를 주님 앞에 고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다짐해야 합니다. 용서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사라지고 친교가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수영 잘 하는 이가 물에 몸을 맡기듯 하나님의 부력을 신뢰하며 살 때 두려움과 원망의 버릇이 줄어듭니다. 우리를 칭칭 동여매던 것들의 힘이 약해지고 비로소 자유롭게 하나님의 꿈을 꾸며 살 수 있습니다.

∙피하려 들지 말아라
이러한 신앙의 신비를 경험했기에 시인은 고난의 때에 경건한 사람들이 주님께 기도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사람들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폭풍처럼 다가오는 험난한 일들이 우리를 흔들고, 절망의 벼랑으로 내몰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레슬리 브란트가 시편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번역한 <오늘의 시편>이 제게 큰 위로와 도전을 줍니다.

“하느님, 당신은 나의 피신처,
어려운 문제들 감연히 대처케 하시고
내가 좌절하지 않게 돌보십니다.
우리를 뒤덮는 어둠 속에서도,
일상생활의 소란 가운데서도
자주 들을 수 있는 하느님의 소리
‘어둠이나 소란도
그대의 삶에 있어야 할 것들.
자꾸 피하려 들지 말아라.
그대를 위해 내가 마련한 길 가려면
으레 거쳐야 하는 길목들이다.
저 주책없는 수당나귀처럼
고집스레 어리석은 짓 그만하여라.
그들은 막대기나 회초리로 몰아야 한다.’”
(레슬리 브란트, <오늘의 시편>, 김윤주 옮김, 분도출판사, 1980, P.79)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여 인생의 어려운 문제가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 문제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의 큰 세계로 안내하는 안내자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자꾸만 우리 시야를 협소하게 만들어 자기 문제에만 골똘하게 만들지만,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난 믿음의 사람들은 잗다란 일들로 말미암아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 지혜로운 삶에 대한 권고
인생의 신맛,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한 시인은 마침내 자기 내면에 우렁우렁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너에게 지시하고 가르쳐주마. 너를 눈여겨 보며 너의 조언자가 되어 주겠다.”(8)

자동차를 타고 낯선 곳을 찾아갈 때면 내비게이션이 유용합니다. 요즘은 그걸 사용하지 않는 운전자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누구 차를 얻어 타고 가다가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들을 때면 가끔 ‘우리 삶에도 저런 안내자가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내 깨닫습니다. 최단거리로 가는 것만이 인생길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생을 길에 빗대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아도 도로에 빗대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두 지점 사이의 최단거리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 도로라면, 길은 사연을 품고 구비구비 돌아가면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길은 사람들 사이로 나 있습니다. 그 길은 세상의 아픔과 슬픔의 물줄기를 따라 이어집니다. 그 길은 갈등과 경쟁으로 찢긴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고, 흐르고 흘러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당도하도록 인도해줍니다. 우리는 그 길의 사람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욕심에 들뜬 귀에는 그분의 음성이 잘 들려오지 않는 법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면서, 주님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며 살 때 삶이 쉬워집니다. 예수님도 같은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9-30) 허망한 일에 마음 쓰는 일 없이, 자기 역량에 맞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시편 131편의 시인도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1)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게 지혜입니다.

“악한 자에게는 고통이 많으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은 사랑이 넘친다.“(10)

‘악한 자’(라샤rasha’)는 물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아니라 자기의 경험, 지식, 판단을 의지합니다. 공동의 일에는 관심없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몰두합니다. 이웃들의 아픔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늘 전전긍긍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고통이 없지는 않으나, 한결같은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편안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에 그는 늘 기쁨을 누립니다. 지금 없는 것, 부재하는 것 때문에 속상해하기 보다는 지금 누릴 수 있는 것 때문에 감사하며 삽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 곁에 서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기에게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의인들’과 ’정직한 사람들’을 기쁨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코로나19가 만들어낸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위기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프고 쓰리지만 견뎌야 합니다.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을 의미와 보람, 기쁨과 감사로 채울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9월 20일 11시 55분 5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