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0. 버릴 것은 없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딤전 4:1-5
설교일시 20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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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것은 없다
딤전4:1-5
(2020/10/04, 창조절 제5주, 세계 성찬주일)

[성령께서 환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한 교훈은, 그 양심에 낙인이 찍힌 거짓말쟁이의 속임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과 진리를 아는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밥상 공동체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한가위가 되면 각지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한 식탁에 앉는 것처럼, 갈라지고 찢긴 온 세상 사람들이 주님의 식탁 앞에 앉아 치유와 회복을 모색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가족이라는 말보다 식구라는 말을 들을 때 훨씬 더 친밀함을 느낍니다. 가족이라는 말이 수직적 계보로서의 족보를 연상시키는 반면, 식구라는 말은 삶의 애환을 함께 겪어온 이들의 깊은 결속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일 겁니다. ‘식구‘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혈연으로 연결된 이들 말고도 객식구들과 가축까지 떠오릅니다. ‘밥‘이 매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식구 하면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 밥을 지었던 시절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불땀 좋은 마른 솔잎에 불이 붙으면 삭정이를 넣어 불을 키우고, 부지깽이로 불을 들쑤시기다가 거기 불이 붙으면 솥을 가신 물을 받아놓던 구정물 통에 담가 불을 끄기도 했습니다. 뜸들일 때 새어나오는 밥내는 정말 황홀했습니다. 겨울이면 어머니는 늘 밥 한 공기를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두곤 했습니다. 그것은 불시에 찾아올지도 모를 손님 혹은 나그네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집 대문은 늘 열려 있었고, 낯선 이들조차 환대받았습니다. 식구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푸근한 기억입니다. 골고루 가난하던 그 시절 인심이 오히려 더 푸졌습니다. 그러나 절대적 빈곤이 어지간히 해소된 오늘날 우리는 식구라는 말에서 그런 포근한 정서를 느끼지 못합니다. ‘내 식구 먼저 챙겨야 한다’는 말은 집단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예수 운동의 특색 가운데 하나로 ‘밥상 공동체’를 꼽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 어디에서나 소박하고 정겨운 음식 나눔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식탁이 여느 식탁과 달랐던 것은 거기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는 이들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세리의 손님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거리낌 없는 행동은 세리가 비록 민족 배신자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도 또한 아픔과 서러움을 안고 사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멀어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밥상은 ‘받아들여짐의 식탁’이었고, 용서의 식탁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호숫가에서 밤새 시달린 제자들을 위해 아침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물고기와 빵으로 차린 그 식탁은 제자들이 비록 주님의 길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한 번도 주님의 사랑에서 배제된 적은 없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주님의 성찬 상 앞에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자장 속으로 들어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쁜 종교의 특색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랑의 친교를 해치는 무리를 경계하라고 가르칩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를 것입니다”(딤전4:1). 여기서 말하는 ‘어떤 사람들’은 에베소 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유대적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지주의적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로마세계에 널리 퍼졌던 신화들과 창세기의 족보들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교인들을 오도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종교성을 ‘특별한 깨우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뭔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누가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로 분명히 있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측정할 수도 없는 물질을 과학자들은 ‘암흑 물질’이라 부릅니다. 인간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미지의 것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두려움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지의 것의 실체를 파악하고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바로 그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아는 척 하며 사람들을 호도합니다. 거짓 교사들, 사이비 종교인들이 득세하는 것은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려는 사람들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뒤흔들었던 이들은 종교적 깨달음은 일상적 삶과 구분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혼인을 금했습니다. 금욕적인 삶을 통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떤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이것은 율법에 나오는 정결법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외적 행위를 통해 그들은 남과 구별되려 했습니다. 구별됨에 대한 자각은 바로 타자에 대한 배제 혹은 오만으로 연결됩니다. 자기는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기에 다른 이들을 깔보고 혐오하기도 합니다. 나쁜 종교란 이런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것을 가리켜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르는 것’, ‘양심에 낙인이 찍힌 거짓말쟁이의 속임수에서 나온 것’이라 말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해 지키려 했던 ‘정결법’ 전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위생학적 이유 때문이든 문화적 요인 때문이든 그건 그때 꼭 필요했던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적 당위가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옛 문자에 집착한다면 그건 고집일 뿐입니다. 율법에 나온다고 하여 우리가 돼지고기를 안 먹는 것도 아니고, 비늘이 없다 하여 장어를 안 먹는 것도 아닙니다. 변통하지 못하면 썩게 마련입니다. 옛말에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라는 말이 있습니다. 막히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게 되고, 통하면 오래 간다는 말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자기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주저앉아 울거나 남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자꾸 살 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바뀌면 문제도 사라집니다. 젊었을 때는 저도 나름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세우고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러니까 못 마땅할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있는 그대로 사람들을 대하고 바라봅니다. 대접받을 생각을 내려놓고, 고쳐줄 생각을 내려놓으니 참 편합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며 산다는 말이 아니라 조금 떨어져서 현실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문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뜻을 붙잡으셨습니다. 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함부로 대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과 진리를 아는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딤전4:3b-4)

이 말은 혁명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이들이라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을 다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옛 말에도 참 사람은 물건이나 사람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無棄物, 無棄人)고 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이 밝은 마음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가 진리의 길에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차별이 있습니다. 인종주의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지금 미국 사회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y)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부색의 차이가 인간 존엄의 차이를 만든다는 생각 자체가 반생명적이고 반신앙적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이러한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무시하는 말과 태도가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종교가 차별의 근거로 작동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큰 품으로 안을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하는 일을 비판하고 때로는 저항도 해야 하겠지만 혐오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먼저 이런 태도를 익혀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 마음 속에 누군가를 향한 혐오의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치유를 청하십시오. 그 마음은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에게도 상처를 남기지만 우리 마음에 더 큰 어둠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찬의 신비 속으로
오늘 우리는 주님의 성찬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빵과 포도주는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는 물질입니다. 직접 만드신 분도 계시겠지만 마트에서 사 온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빵과 포도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을 기억하려 합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마음과 접속될 때 비로소 우리의 성찬은 거룩한 행위가 됩니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이란 “비단 인간에 의한 조형과 소유의 대상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담고 있는 그릇이며 구원을 만나는 장소”(레오나르도 보프, <聖事란 무엇인가>,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5, p.1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담고 있는 그릇’, ‘구원을 만나는 장소’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성찬의 도구인 빵과 포도주를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성찬에 사용되는 사물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때 그 사물은 이미 하나의 사물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의 표징이 되고 상징이 되어 나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해 주고(e-vocar) 촉구하며(pro-vocar) 나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불러모아(con-vocar) 그 사물이 구체화하며 제시하고 있는 상황들과 기억들과 의미내용들을 말해준다.”(레오나르도 보프, 앞의 책, p.20-30)

신학자의 말이어서 조금 어렵습니다. 풀어서 말해 보겠습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입니다. 가련한 이들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과 더불어 팔레스타인 땅을 거닐며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셨던 그리스도 말입니다. 그리고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라고 촉구합니다. 그 마음을 품기 위해 욕망에 이끌리곤 하는 우리 마음을 자꾸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고립된 삶에서 벗어나 연대하는 삶으로 나아가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가끔 외로움 혹은 고립감이 우리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형제자매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분쟁과 갈등 속에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인도와 중국의 국경 충돌도 심각한 지경입니다. 분단국가인 우리의 처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의 식탁 앞에 모인 우리는 생명과 평화의 씨를 심는 자가 되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국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정치적 능력은 없지만 우리 주변에서만이라도 일단 평화와 생명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일상 속에 하늘의 빛을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그러한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10월 04일 11시 34분 0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