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42.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2:18-25
설교일시 2016/10/16
오디오파일 s20161016.mp3 [16841 KBytes]
목록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창2:18-25
(2016/10/16, 청파 가을 나들이)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그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 남자를 돕는 사람 곧 그의 짝이 없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다.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 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 깨끗함과 더러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모처럼의 나들이인데 날이 흐려 아쉽습니다. 서로가 햇살이 되어 따사롭게 몸과 마음을 녹여주라는 하늘의 초대인 것 같습니다. 한로寒露에서 상강霜降을 향해 가고 있는 가을의 한복판입니다.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해지는 때입니다. 가을은 돌아봄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회한이 깊어지는 것은 삶의 열매가 부실하다는 자각 때문일 겁니다.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수행하느라 분주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가을빛을 품은 곡식들처럼 여물지 못한 채 쭉정이로 시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지내십니까? 오늘은 창세기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근본을 돌아보려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지어진 세상을 보며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공들여 지으신 작품입니다. 곳곳에 하나님의 숨결과 아이디어가 숨어 있습니다. 눈 밝은 이들, 마음 깨끗한 이들에게 세상은 신적 광휘로 가득찬 곳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은 신비의 차원을 잃고 인간의 탐욕을 위한 도구로 변했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썩으면 악취가 나는 법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교란자가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자연은 어김없이 질서있게 운행됩니다. 이게 우리의 위안이라면 위안입니다. 바람이 서늘해지고 해가 짧아질 때부터 나무들은 겨울 준비를 서두릅니다. 이미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은 때가 되면 미련없이 줄기를 놓고 땅으로 떨어질 겁니다. 정현종 시인은 '마른 나뭇잎'이라는 시에서 "마른 나뭇잎을 본다//살아서 사람이 어떻게/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하고 노래했습니다. '깨끗함'의 반대말은 더러움입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더러움'을 '덜-없음'이라 설명했습니다. 자기를 말끔히 비우지 못할 때 우리 영혼이 더러워진다는 말일 겁니다. 깨끗함은 그러니까 비우고 또 비워 맑아진 상태인 셈입니다. 우리는 그런 깨끗함 혹은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 경탄할 줄 아는 사람
창조된 세계를 보고 좋아하시던 하나님은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홀로 있다는 것, 즉 마음 속에 찾아드는 외로움을 나눌 이가 없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입니다. 번거로움이 싫은 사람들은 홀로 있는 것이 차라리 홀가분하여 좋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가슴에 깃드는 회한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외로운 사람을 위해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시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흙으로 들 짐승들과 공중의 새를 만들어서 '그 사람'에게 데려옵니다. 그 사람은 물론 나중에 아담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아담은 그 동물들을 보며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아담은 그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그 동물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표정이 눈에 띠게 밝아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신 것은 무엇일까요? '함께 놀라고 경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의 걸작품들을 바라보며 함께 기뻐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아담은 아직 그런 기쁨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분주한 현대인들은 처리해야 할 많은 일에 쫓기며 삽니다. 시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은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경쟁과 효율을 숭상하는 세상에서 한눈을 팔았다가는 낙오자가 되기 쉽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삶을 한껏 누리지 못합니다. 일이 힘겹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내고 싶어집니다.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 오락거리에 몰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어느새 삶은 엔터테인먼트로 변했습니다. 재치와 재미가 웅숭깊은 사고와 깊은 유머를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마음 속의 공허함은 깊어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조화로운 세상에 눈길을 주기보다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의 낙원에 머물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낙원에 입장을 허락받은 사람은 소수이고 다수는 그들의 뒤를 좇느라 분주합니다. 여유가 없기에 심성은 점점 황폐하게 변하고, 기뻐하고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은 퇴화됩니다. 내 곁에 있는 이들은 나의 평온을 깨뜨리는 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은 자아의 감옥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관계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갈빗대로 사람을 만들어 아담 앞에 데려오십니다. 잠에게 깨어난 아담은 자기 앞에 나타난 낯선 존재를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존재에 대한 찬탄을 늘어놓습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마치 꿈 속에서 보았던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같습니다. 무뚝뚝했던 아담의 말문이 터졌습니다. 그의 고백은 시처럼 간결하지만 강렬합니다.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부를 것이다".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아주 중대한 진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인간은 생명을 나눈 사이라는 것 말입니다. 다시 말해 '너 없이는 나도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상호 공속된 존재입니다. 나의 있음은 너의 있음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 속에 차오르는 감정은 '고마움' 그리고 '사랑'입니다. 네가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사랑은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입니다. 이게 인간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 가시는 녹여내야
그러나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떤가요? 이런 고마움, 이런 사랑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나요? 오히려 의구심과 미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냉소하고, 비아냥거리고, 무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에 뾰족한 가시를 만들며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함부로 다가오는 이들을 가차없이 찌를 준비를 갖추는 것이지요. 나무에 달린 가시는 남을 찌르지만, 우리 속에서 만들어진 가시는 자기도 찌르게 마련입니다. 우리 가슴에 있는 그 수많은 상처들은 남의 가시에 찔린 것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찌른 것도 많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가시는 인위적으로 뽑아낼 수 없습니다. 녹여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느 목사님은 오랫동안 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괌의 바다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해안 가까운 곳과 조금 떨어진 곳의 물빛이 사뭇 다릅니다. 가까운 곳은 투명하면서도 맑은 빛이 나고 난바다의 물빛은 군청색입니다. 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안선 가까운 곳은 깊지 않습니다. 산호가 자연 방파제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산호 군락지가 끝나는 지점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다가 목사님 한 분이 그만 산호에 발을 찔려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어 밀려온 파도가 사정없이 밀어붙여 그는 성게밭 위를 뒹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통이 아주 심했습니다. 급히 밖으로 나와 가시를 뽑으려 해봤지만 부드러운 가시는 톡톡 부러질 뿐 뽑히질 않았습니다. 나중에 현지인 의사가 아주 간편한 치료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식초를 붓고 몸을 거기 담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살 속에 박혀 있던 가시가 녹아내리면서 고통도 사라졌습니다. 그렇지요. 우리 속에 박혀 있는 가시도 억지로 뽑으려 하기보다는 녹여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이런 것이 아닐까요? 꾸짖고, 비판하고, 비아냥거리고, 냉소하는 것으로는 아름다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상대방의 방어기제만 강화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존재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옳음'의 강요는 폭력적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폭력적이지 않으려면 자꾸 더 큰 세계 앞에 서보아야 합니다. 일부러 자연 앞에 머무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연 안에 머무는 순간 우리 호흡이 가지런해질 때가 많습니다. 현기영 선생의 산문집을 읽다가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예컨대 강둑에 홀로 서서 서편 하늘과 강물 위에 붉게 번진 장엄한 낙조를 볼 때, 느닷없이 까닭 없이 눈물이 솟구치는 수가 있다. 아니, 그것은 까닭 없는 눈물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에 남아 있던 자연의 조그만 흔적이 몸 밖의 대자연과 제대로 만나는 순간의 감동 때문이다. 뭔가 영혼의 한복판이 꿰뚫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내가 저 강물, 저 대자연의 어쩔 수 없는 일부로구나, 하는 자각이 눈물을 솟구치게 한 것이다."(현기영 산문,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다산책방, 2016년 7월 1일, p.125-6)

어디 강둑에 섰을 때 뿐이겠습니까? 오늘처럼 숲의 품에 안길 때도 그렇고, 초원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도 그럴 겁니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 한복판에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스며든 독기가 슬며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마쳐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함으로 참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온기를 가슴 시린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야말로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의 인력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세상은 우울하지만, 그 우울함에 갇혀 지내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은 가까운 이들과 생을 경축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의한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고, 힘써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보며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하며 반길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문지방을 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10월 16일 08시 33분 0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