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44. 거룩함을 향한 순례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 6:17-23
설교일시 201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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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을 향한 순례
롬6:17-23
(2016/10/30, 종교개혁기념주일)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와서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마는, 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 광신을 경계함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아름다운 가을날입니다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은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소위 최순실 게이트라 불리는 사태로 인해 국정이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폭로에 국민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공식적인 통치 기구를 무력화시킨 비선들의 은밀한 전횡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우리는 실감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믿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순실'은 '진실'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시행됩니다. 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하고 또 염려하는 것은 이 모든 사단이 사이비 영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정황이 그런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타락한 종교 혹은 영성은 마성적입니다.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노예로 만듭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 499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란 말은 적절한 번역어가 아닙니다. 차라리 '기독교의 본질 회복운동'이라 말하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루터는 지나치게 제도화된 결과 권력으로 변한 종교, 본질을 잃어버린 당시의 가톨릭에 도전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역사에 의해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예수님은 맛 잃은 소금은 땅에 버려져 짓밟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종교처럼 추한 게 없습니다. 한자로 종교는 마루 혹은 일의 근본을 뜻하는 '종宗' 자와 가르칠 '敎' 자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종교는 그러니까 '으뜸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가르침이 으뜸되는 가르침일까요? 참 사람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요? 종교라는 한자어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religion' 단어의 번역어입니다. 'religion'은 '다시 결합시키다'라는 뜻의 라틴어 'religare'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우리는 땅의 인력에 끌려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잊고 삽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잊을 때 우리 삶은 방만해집니다. 종교는 그런 느슨해진 우리 마음을 근원에 다시 연결시킴으로 사람됨의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해줍니다.

타락한 종교는 사람들의 정신을 얽어매는 오랏줄입니다.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은 마치 자기가 하늘의 신비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에게 예속시킵니다. 종교의 본령은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인데, 오히려 사람들을 종이 되게 만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라는 말만 잘 붙들어도 우리 삶이 비루함에 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세상이 혼란하고 삶이 힘겨울수록 사람들은 어떤 강한 권위에 종속되기를 원합니다. 삶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견딜 내적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단 종파들이나 나쁜 종교인들은 그런 마음의 틈새를 파고들어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그들의 지배를 받는 이들은 광신적인 모습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존 웨슬리는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광신은 "잘못 상상된 하나님의 힘과 감화에서 나오는 것"(한국웨슬리학회 편, <웨슬리설교전집3>, 조종남 외 공역, 대한기독교서회, 2006년 5월 30일, p.20)이라고 말합니다. '잘못 상상된 하나님의 힘과 감화'라는 말이 강력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혹은 계시가 주어졌다고 상상합니다. 그들은 "생활의 가장 사소한 일들에서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같은 책, p.25)입니다. 건전한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성과 경험을 잘 활용하면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성령은 말씀의 뜻을 일깨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광신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교만입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무시합니다. 다른 이들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불친절하고 탐욕스럽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사랑의 샘물, 그리고 의와 참된 성결의 샘물을 말려 버립니다"(같은 책, p.31). 광신자들은 건강한 시민으로서 살지 못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이들이 더욱 인류를 경멸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어딘가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은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 죄의 종, 의의 종
바울 사도는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직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롬6:16). 죄의 종도 있고 순종의 종도 있습니다. 죄의 종은 자기 영혼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버린 사람입니다. 악한 영이 되었든, 어떤 사람이 되었든 하나님 이외의 누구도 우리 영혼의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의 종 노릇 하는 이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 맺는 생의 열매는 의입니다.

죄의 종으로 산다는 말을 바울은 쉽게 풀어 설명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19). 죄의 종 노릇 하는 사람은 선물로 받은 고귀한 삶을 더럽고 추한 일에 바친다는 뜻입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세를 얻기 위해 불법의 종이 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영혼을 빼앗긴 채 얻는 돈이, 명예와 권세가 무슨 소용입니까? 요즘 우리는 얼이 빠진 사람들을 참 많이 봅니다.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기들의 양심을 파는 일을 서슴치 않는 이들 말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거리와 광장에서 외치는 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절박한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윗 사람의 눈치만 살핍니다. 타락이고 전락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자신의 몸을 불의의 종으로 바쳤습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도 꾸짖지 않았습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기 위해 나팔을 불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 편에 가담하여 특권을 누렸습니다. 강자들의 편의에 복무하는 교회는 참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게 한국 주류교회의 참담한 현실입니다. 절실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실되게 만나고, 그 가르침을 마음으로 순종하는 이들의 삶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칩니다. 그래서 거룩함에 이릅니다. 금년은 오방 최흥종 목사님의 서거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낯선 이름이지요? 1880년에 태어나 1966년에 세상을 떠나신 최흥종 목사님은 광주 지역의 기독교의 개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분입니다. 그는 회심을 경험한 후에 평생을 한센병과 결핵 퇴치, 그리고 빈민운동에 바쳤습니다. 신간회 광주지회장을 맡기도 했고, 해방 이후 전남 건국준비위원장으로 헌신했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삶에 대한 비관에 빠져 뒷골목 왈패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포사이트 선교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포사이트는 어느 날 길에서 만난 한센병 환자를 데려와 선교부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입원한 사람들이 반발하자 그는 병원 뒤의 가마로 그녀를 옮겨야 했는데, 온몸에서 피고름이 나고 진물이 흘러내리던 그녀를 포사이트는 거리낌 없이 부축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환자가 한 손에 짚고 있던 지팡이를 놓쳤습니다. 포사이트는 옆에 서있던 최흥종에게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고름에 핏물까지 잔뜩 묻은 지팡이를 선뜻 집어들기 어려웠지만, 그는 용기를 내 그것을 집어 올려 환자에게 건넸습니다. 환자는 그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별것 아닌 미소였는데, 그 순간 최흥종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밀려왔습니다(2016년 한센복지협회지에 게재된 김희정의 글, '한센 환자의 지팡이가 되다, 오방 최흥종 목사' 참고). 영적인 개안의 순간, 혹은 중생체험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거룩함의 문지방을 넘은 사건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포사이트 선교사를 통해 아가페적 사랑의 능력을 경험한 그는 그때부터 고통받는 이들을 섬기는 황홀한 기쁨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1909년이었습니다.

최흥종 목사의 일화는 정말 놀라운 게 많습니다. 1932년에 그는 나환자들의 자립을 위한 정착촌 대책을 세워달라고 아가키(宇垣) 총독에게 진정서를 올렸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 유명한 '구라(救癩)대행진'을 벌입니다. 광주에서 150여 명의 나환자와 함께 걸어서 총독부까지 들어가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전국의 나환자들 일부가 합세하여 행진에 참여한 이들이 400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11일 동안의 행진 끝에 그들은 총독부 앞에 도착했고, 총독이 만나줄 때까지 기나긴 농성을 벌인 끝에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어냈습니다. 그 결과가 소록도 갱생원 확충으로 나타났습니다. 믿음의 삶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역동적인 것입니다.

• 거룩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의 사역에 감동한 백범 김구 선생은 최흥종 목사에게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휘호를 보내 격려했습니다. 화광동진은 노자(4장)에 나오는 '화기광和其光 동기진同其塵'이라는 대목을 축약한 것으로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빛이라고 마구 뻐기거나 내세우지 않고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다른 이들이 다가설 수 있도록 하고,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과 하나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참 사람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이런 삶을 빌립보서에서 인상깊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a)

진짜 거룩함이란 이런 것입니다. 직통 계시니 뭐니 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호리는 사람들은 사실은 더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향하는 삶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삶과 거의 무관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오로지 마음의 평안함만을 구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영성에서 아주 먼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자기를 도드라지게 만들어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화기광'도 어렵지만 '동기진'은 더욱 어렵습니다. 행여라도 내 옷이 더러워질까, 괜히 불편한 일에 연루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이 우리 행동을 제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예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모시려면 그런 이들 곁에 조금씩이라도 다가서야 합니다. 한센병 환자의 지팡이를 집어들 수는 없다면 굶주린 아이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닦아주어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낮은 자리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마음과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이야말로 하늘문이 열리는 곳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일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엔도 슈사쿠의 문학과 일본 기독교' 강연은 참 유익했습니다. 엔도는 <침묵>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던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 소설에서 포르투갈 출신의 신실하고 강직한 선교사 로드리고는 관원들에게 붙잡혀서 회유를 당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화가 그려진 나무판(후미에, 踏繪)를 밟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럴 수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한 평생 그 얼굴을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어려움이 닥쳐왔다 하여 어찌 그분을 배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관원들은 그가 후미에를 밟으면 잡혀온 기독교인들을 살려주겠지만, 거절한다면 그들을 모두 처형하겠다고 말합니다. 로드리고는 고심을 거듭하다가 결국 후미에를 밟기로 합니다. 그는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밟"아야 했습니다. 저릿한 아픔이 그의 온 몸을 감쌌을 것입니다. 그때 목판 속의 그분이 로드리고에게 말합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엔도 슈사쿠, <침묵>, 바오로딸, 2016년 8월 10일, p.296-7). '동기진'이란 이런 것입니다. 로드리고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내려놓으려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깊은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이 마음을 얻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 사람됨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성서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잡지를 만드는 김기돈 목사님은 사소하고 연약한 것에 대한 '글썽임'을 믿음의 본질로 설명하더군요. 그렇다고 하여 늘 풀이 죽어 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작은 것들, 사소한 것들, 약한 것들이 강자들의 폭력 앞에 유린될 때는 스프링처럼 일어나 불의와 싸워야 합니다. 불의를 보고도 '저항'하지 않는 믿음은 산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작고 연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불의에 대한 저항은 우리 믿음의 두 가지 초점입니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는 허위의식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늘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섭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바칠 것인지, 의의 종으로 바칠 것인지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선택의 결과를 명쾌한 어조로 요약합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23)

우리 교회는 물론이고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비본래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이 소란한 세상에 평화의 씨, 생명의 씨를 심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10월 30일 11시 57분 5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