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45. 구원의 잔을 들고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116:7-15
설교일시 2016/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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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잔을 들고
시116:7-15
(2016/11/06, 추수감사주일)

[내 영혼아, 주님이 너를 너그럽게 대해 주셨으니 너는 마음을 편히 가져라. 주님, 주님께서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여 주셨으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 때, 몹시 두려워,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 하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서원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루겠습니다. 성도들의 죽음조차도 주님께서는 소중히 여기신다.]

• 현실이 너무 힘겨울 때
추수감사주일 아침,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추수감사주일입니다만 따뜻하고 즐거운 말로 말씀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우리는 참 착잡한 분노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온 국민들의 눈과 귀는 온통 국정을 농단한 이들과 대통령에게 쏠렸습니다. 권력을 사유화한 이들의 부패와 타락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출받은 학자금을 상환하기 위해 시급 6,0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는 젊은이들, 겨울이 다가와도 연탄조차 맘껏 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몇 십 억, 몇 백 억이라는 돈을 아무렇게나 주무른 이들을 보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법은 보통 사람들이 사는 법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사람들은 통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복잡한 셈법을 동원할 때가 아닙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은 그 무너짐이 크리라는 말씀을 아프게 들어야 합니다. 잘못한 이들은 잘못을 시인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제 사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면서 어물쩍 넘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국민들의 관심이 온통 정치권에 쏠리는 작금의 현실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야 이 땅에 있으니 서로 마음으로 의지하며 지내지만, 이역 땅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의 무너진 가슴을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심연에 갇혀 있던 이들 속에서 빛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역사 가운데도 나타나기를 빕니다.

저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두 가지 희망을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시편 2편 시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통치를 거역하고 자고하는 이들을 보면서 가소로워 웃음을 터뜨리신다고 말합니다. 더딘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엄정하게 집행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덮어 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마10:26) 하신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두려운 진실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선지자가 많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어제 광화문 광장에 서 있는 동안 김교신 선생님이 <성서조선>에 썼던 '조와弔蛙'라는 글이 떠올랐습니다. 일제의 폭압적 지배로 인해 온 땅에 어둠이 드리웠던 1942년 2월 경 선생은 늘 다니던 기도처 옆에 있던 물웅덩이를 들여다보았습니다. 혹독한 겨울 추위에 얼어 죽은 개구리들의 사체가 많았습니다. 왠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선생은 그 사체를 수습하여 땅에 묻어주고는 혹시 살아남은 게 없나 싶어 웅덩이 속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개구리 몇 마리가 살아 있었습니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움직임이 둔하긴 해도 죽음을 면한 그 개구리를 보며 선생은 실낱같은 희망을 보았던 것일까요? 일제는 이 글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알았기에 <성서조선>을 폐간시켰습니다. 하지만 '조와'라는 글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아무리 희미해 보일망정 희망은 완전히 사그러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지금 광장에 나와 정의를 외치는 이들은 세상을 불안하게 만드는 불순분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소리를 대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이 희망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삶은 계속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재 속에 묻힌 불씨라도 소중하게 여기고, 거기에 숨을 불어넣어 불꽃을 일으켜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도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눅11:34-35). 지금 우리는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욕심과 편견에 사로잡혀 세상을 왜곡하여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를 통해 우리 속에 환한 빛, 진리의 빛이 비쳐들기를 빕니다. 혼돈을 넘어 생성되고 있는 질서를 보고, 절망의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빛을 보는 눈이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시편116편 시인은 지금 고난 중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 시 속에 자주 언급되는 죽음의 이미지(3,8,15절)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에 처한 게 분명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뿐이었습니다.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얽어매고, 스올의 고통이 나를 엄습하여서, 고난과 고통이 나를 덮여 올 때에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간구합니다. 이 목숨을 구하여 주십시오' 하였습니다"(4). 너무나 기가 막혀 신음하듯 고통스럽게 내지르는 소리를 눌함(吶喊)이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름답게 치장된 언어보다 약자들의 신음소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십니다. 사라에게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하던 하갈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애굽의 전제 정치 하에서 신음하던 히브리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셨습니다. 시인은 이런 하나님에 대해 절대적 신뢰를 보냅니다.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우리의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주님은 순박한 사람을 지켜 주신다. 내가 가련하게 되었을 때에,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5-6)

여기서 순박한 사람이란 순량하고 소박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이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처지의 사람을 일컫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런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 삼중적 구원 체험
시인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바위보다 큰 무게로 그의 영혼을 짓누르던 일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거듭되는 어려움으로 인해 캄캄했던 그의 내면에 불 하나가 밝혀졌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자기 영혼을 향해 말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이 너를 너그럽게 대해 주셨으니 너는 마음을 편히 가져라"(7). 너그럽게 대해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지속됨을 이르는 말일 겁니다. 평안함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울 사도는 일찍이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롬14:8)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한 마디 속에 부활 신앙의 핵심이 다 담겨 있습니다. 살아도, 죽어도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기의 구원 체험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여 주셨으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8-9)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은 그의 영혼을 마치 거미줄처럼 옭아매던 일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셨다는 말일 겁니다. 생의 무거움이 우리를 짓누를 때 우리는 무기력, 무의미, 무책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죽음 곧 나태함입니다. 나태함에 빠진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생을 한껏 살아내지 못합니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악한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지친 이들은 냉소주의자가 되거나, 역사 비관주의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구하셔서 책임적 주체로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시인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눈물도 여러 가지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 뭔가에 감동했을 때 사람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을 정화시키는 눈물입니다. 이런 눈물은 많이 흘릴수록 좋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열심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니, 내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립니다"(시119:136). 하나님에 대한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열정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동족들이 겪는 고통과 하나님의 슬픔에 깊이 감염되어 눈물을 흘립니다.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 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렘9:1) 이런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맑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억울함, 절망감,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세상에는 '억눌리는 사람', '학대받는 사람'이 흘리는 눈물'(전4:1)이 참 많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전쟁과 신부>에서 어느 노인은 야나로스 신부에게 바다가 짠 것은 세상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 거기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무시 당하고, 짓밟히는 사람들의 눈물을 하나님은 모른 체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십니다. 그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그들이 존엄한 인격을 누리며 살도록 도우십니다.

시인은 또한 하나님께서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정말 우리 영혼을 실족하게 하는 걸림돌들이 많습니다. 자꾸 넘어지다보면 무릎에 멍이 들고, 이마도 깨집니다. 문제는 정신적 괴로움입니다. 넘어짐이 반복될 때 사람은 누구나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이 만들어집니다. 좌절에 빠진 영혼은 자포자기적인 심정에 사로잡힌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든든히 세워주십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은 환난을 자랑한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롬5:3-4). 지금 거친 돌짝밭을 걷는 것처럼 고단한 세월을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그 길을 걸으며 여러분을 꼭 붙잡고 계십니다.

• 신뢰함으로 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았기에 시인은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10)라고 고백합니다. 고통이 그를 속이 무른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오히려 그를 저력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새로운 삶을 다짐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9). 주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자기 좋을대로 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나무 뒤로 숨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웃들을 수단으로 삼으며 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역경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 역경을 하나님이라는 중심으로 이끄는 바람으로 이해합니다. 찬송가 373장 2절이 떠오릅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고통을 통과한 후에 얻어진 믿음은 장엄합니다. 고통에 짓눌려 자기에게 집중되었던 관심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싶은 열정으로 변화됩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12-13). 고통 속에서도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찬미하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또 있을까요? 믿음의 사람은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그는 구원의 잔을 들고 스스로만 행복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마른 목을 축여주는 사람입니다. 자기 고통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 손에는 어떤 잔이 들려 있습니까? 구원에 대한 감사의 잔입니까? 아니면 욕망의 잔 혹은 진노의 잔입니까? 믿음의 사람은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12) 묻고 또 물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고치고, 아름답게 만드시기 원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시원한 구원의 샘물, 기쁨의 샘물을 전하는 것, 하나님께 속한 생명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 가장 연약해 보이는 것들을 통해 세상에 빛이 유입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아름답고 멋진 일에 우리를 초대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이후 우리의 삶은 '구원의 잔'을 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일에 집중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11월 06일 10시 58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