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47. 다른 삶을 상상하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17:20-25
설교일시 2016/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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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라
눅 17:20-25
(2016/11/20/ 왕국주일)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인자의 날들 가운데서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 할 때가 오겠으나,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더러 말하기를 '보아라, 저기에 계신다', 또는 '보아라, 여기에 계신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따라 나서지도 말고, 찾아다니지도 말아라. 마치 번개가 하늘 이 끝에서 번쩍하여 하늘 저 끝까지 비치는 것처럼, 인자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고,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

•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기가 시작되기 직전 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를 통해 개시된 하나님 나라를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주님 나라는 의와 평화/성령 안에 있는 기쁨/주님 열어주소서 그 문 우리 안에". 매 주일 아침 우리는 이 찬양으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요즘 들어 이 찬양이 더욱 절실하게 와닿습니다. 이 나라 백성으로 산다는 게 가엾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에 노래패 '노찾사'가 불렀던 '그날이 오면'이라는 곡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은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이 실현되는 날을 사람들은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어둠의 세월, 겨울 왕국은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우직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국민들로부터 위임된 권력을 사익을 취하기 위해 악용하는 자들이 어쩜 이리도 많습니까?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도 그런 현실을 목도하면서 깊은 시름에 잠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의 자리에 계속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았기에 그들은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그들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여호와의 날이 다가온다"고 외쳤습니다. 그날은 좋은 날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이들에게는 감격의 날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두려운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은 이웃의 고통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사는 사람들과 불의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 날, 옛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날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왕이 용기를 잃고, 지도자들도 낙담하고, 제사장들도 당황하고, 예언자들도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4:9)

그런 날은 분명히 오고야 말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역사 속으로 돌입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시간을 내다보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진정 믿음의 사람이라면 다가오는 종말의 빛 속에서 삶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이들은 낙심할 수 없습니다.

• 자고 일어나는 하는 사이에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옵니까?" 그들의 질문이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지 말 꼬투리를 잡기 위한 것인지를 가리는 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뜬금없이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일관된 가르침이었으니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첫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 이 네 마디는 이후에 전개될 예수님의 선포와 사역의 핵심어입니다. 이 외침을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 분리하여 소비해 버리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로마 제국의 가혹한 수탈과 억압, 그리고 강도의 굴혈로 변한 성전 체제로 인해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태풍이 바닷물을 한번 뒤집어엎듯이 세상이 한번 뒤집혔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지금은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너무 더디신 것처럼 보이지만 때를 놓치시는 법은 없습니다. 임계점(critical moment)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물리학에서 임계점은 "물질의 구조와 성질이 다른 상태로 바뀔 때의 온도와 압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임계점은 물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으면 역사는 새로운 질서로 넘어갑니다. 종교개혁 같은 것이 그 예가 되겠습니다. 구름이 짙어지면 자체의 무게를 못 이겨 비가 되어 쏟아지듯 역사 또한 그렇게 변화되게 마련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 개입입니다. 억압받는 이들의 외침 혹은 신음소리가 높아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두렵게 자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위로부터 돌입하는 나라입니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거기에 동참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장을 기어오르는 담쟁이처럼 조용히 자라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처음부터 떠들썩하게 격렬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현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은밀한 도래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막4:26b-27). 식물의 성장 과정처럼, 포도주가 익어가는 것처럼 보이진 않아도 그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증거입니다. 지배, 경쟁, 억압, 착취가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에 주님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가치인 섬김, 돌봄, 사랑, 나눔을 가져오셨습니다. 지배, 경쟁, 억압, 착취가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것들이라면 섬김, 돌봄, 사랑, 나눔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 원리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거듭난 자', '어린아이 같은 자', '가난한 자'라야 그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있는 곳에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 깃듭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불의한 자, 투기하는 자, 음행하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보내주신 이웃들을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불의와 불화, 혼돈과 어둠을 조장하는 자들입니다.

• 자라고 있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17:21) 가르치셨습니다. 새번역은 '너희 가운데'라고 옮겼지만 개역성경은 '너희 안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내심 천국'으로 이해하곤 했습니다. 찬송가 438장 2절이 대표적입니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 나라/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주님을 마음에 모시니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흔들리지 않을 뿐더러, 높은 산이나 거친 들 혹은 초막이나 궁궐 그 어디라도 다 하늘 나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부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마음 속에 든든한 기둥 하나를 세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입장'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가끔 풍랑이 일어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때도 있지만 그들은 예수라는 푯대를 바라보며 마땅히 가야 할 길로 돌이키곤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내심 천국을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으로 경험하는 일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를 다른 말로 하자면 '너희들이 맺는 다양한 관계'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시장통에서 맺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경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상적 삶과 무관한 하나님 나라의 꿈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 사람이라야 더 큰 생명의 품에 안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셨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넣으셨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평화의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런 실천을 통해 역사 속에 가시화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새 신자들을 VIP라 칭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새롭게 유입되는 신자들이 교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극진한 배려를 하려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용어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VIP의 세계는 특전과 예외를 허용하는 세계입니다. VIP라는 단어 속에 내장된 은밀한 권력관계가 제게는 불쾌하게만 느껴집니다. 돈과 지위가 만들어 준 허상일 뿐입니다. 누구든 거기에 익숙해지는 순간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며칠 전 한양대학교의 김종량 이사장을 만났습니다. 활달하면서도 겸손한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커피 한 잔 타 본 일이 없고, 만원 지하철에 시달려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사고가 일반인들의 사고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곁에 배석했던 한 분이 김 이사장이 참 소탈한 분이라며 들려준 이야기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주일마다 대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우들과 식탁교제를 나눈 후, 모든 이들이 돌아간 후에 식탁에 남은 흔적을 말끔이 닦아내고, 창을 열어 환기까지 시킨 후에 귀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작은 실천이지만 그게 작아 보이지 않는 것은 특권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통치'라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상기시키는 장소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가면 호흡이 절로 가지런해지고, 시린 가슴이 따뜻해지는 곳, 고향처럼 우리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이들이 있는 곳, 더 큰 세계를 향해 마음이 열리는 곳 말입니다. 저는 고은 선생의 소설 <화엄경>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벵골만을 지나는 선원들은 배에 마실 물이 떨어지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바다 한복판에서 담수를 솟구쳐 올리는 곳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제 아무리 어둡고 혼돈스럽다 해도, 어딘가에서 맑은 샘물을 솟쳐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게 악한 영들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이들입니다.

• 절망의 강 위에 다리놓기
경남 합천에 자리잡고 있는 '오두막 공동체'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 공동체의 설립자인 이재영 선생은 1983년 '에바다'라는 출판사를 세우고 개업예배를 드리던 중 말씀 한 구절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마태복음 5장 47절이었습니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이 며칠 동안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곱씹다가 그는 문득 '형제가 아닌 사람'에게 문안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가 누구일까 고심하던 그에게 떠오른 것이 재소자들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책들을 재소자들에게 보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 예기치 않은 방문자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출소는 했지만 갈 곳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정착을 도우려다 보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해도 받고, 모욕도 당하고, 위협도 당하고, 돈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중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찾아오는 이들이 늘어나자 그는 출판사 가까운 곳에 다섯 칸의 쪽방을 빌어 출소자들의 그룹 홈을 열었습니다. 그게 그 공동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합천에 있는 오두막 공동체에는 출소자, 알코올 중독자, 지적장애인과 보호자, 아이와 노인, 평신도와 목회자 등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 낮은 이의 높이와 가장 느린 이의 속도에 맞추어 단순한 순종과 환대를 실천하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이재영 선생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오두막에서는 상처 입고 아픈 이들의 속도에 맞춰 주고, 그들의 있는 그대로를 지켜봐 줄 뿐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이곳에서 안식하고 회복한다. 오두막에서는 누구라도 저마다 제자리를 찾는다. 한 조각이라도 없으면 완성되지 못하는 퍼즐처럼 모두가 소중한 공동체의 일부다. 깨진 유리 조각 같아 보일지라도 위대한 예술가의 손을 거치면 걸작 모자이크가 된다.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시는 작품은 결코 실패작이 될 수 없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안에서라야 생생하게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이다."(이재영, <오두막>, Ivp, 2016년 6월 24일, p.134)

깨진 유리 조각이 예술가의 손을 거치면 모자이크가 됩니다. 깨진 유리들이라 해도 그곳에 햇빛이 비치면 반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저 화려하고 큰 예배당이 아니라 '오두막'과 같은 곳에서 경험되는 현실입니다.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크다', '작다' 순위를 매겨 차별하지 않는 곳, 모두가 똑같아질 것을 요구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현상 질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상상하는 사람들입니다. 애굽 땅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들, 로마 제국의 압제 하에 살면서도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천국의 전령들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알기에 어떤 방해와 장벽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치인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게 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의식 속에서 국민들은 개, 돼지와 같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광장 발언대에 선 한 고등학생은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면서 "000, 너나 꺼져!"라고 외쳤습니다. 놀라운 패기와 재치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꿈은 바람이 분다고 하여 꺼지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평소에는 물처럼 보입니다. 물은 늘 아래로 흐릅니다. 웅덩이를 만나면 잠시 쉬기도 하지만 다른 물과 만나 웅덩이를 벗어납니다. 바위가 있으면 바위를 휘돌아 나갑니다. 하지만 흐름이 격렬하면 바위를 굴리기도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빛이신 주님을 의지하여 한 걸음씩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열기 위해 나아가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11월 20일 11시 02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