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3. 어려운 시절
설교자 김기석
본문 딤후 3:1-9
설교일시 2017/03/26
오디오파일 s20170326.mp3 [1470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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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절
딤후3:1-9
(2017/03/26, 사순절 제4주)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그들 가운데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서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자들은 여러 가지 정욕에 이끌려 죄에 짓눌려 있고, 늘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전혀 이를 수 없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배반한 것과 같이 진리를 배반합니다. 그들은 마음이 부패한 사람이요, 믿음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도 그 두 사람의 경우와 같이, 모든 사람 앞에 환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데스페라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마음 졸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던 세월호가 마침내 떠올랐습니다. 1073일, 너무 긴 시간이었습니다. 떠오르는 배를 보며 미수습자 가족들과 세월호 유족들은 오열했습니다. 애도의 시작입니다. 동거차도에 천막을 세워놓고 그 어둡고 차가운 맹골수도를 날마다 바라보고 있었던 가족들의 마음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세월호 이야기가 또 다시 전면에 부상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을 내려놓고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시린 마음을 감싸 안아 줄 때입니다. 9명의 미수습자들이 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세월호는 어쩌면 인간의 오만과 탐욕의 상징으로 남겨두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호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열기 위한 단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이들의 죽음을 허비하지 않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참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엊그제도 영국 국회의사당과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자동차가 테러의 무기로 변하고 있습니다. 사건도 끔찍하지만 그 아비규환의 테러 현장에서 셀카봉을 뽑아 올리고 셀카를 찍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벌어진 한 사건도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여성에게 다가간 한 젊은이가 '한국인이냐?'고 물은 후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는, 어딘가에서 흉기를 가져와 그 여성을 무차별로 폭행한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CCTV에 찍힌 그 영상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약자들과 여성을 향한 이런 혐오 범죄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세상을 보며 저는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에서 성행했던 부두(Voodoo)교에서 유래했다는 좀비족들이 정말 있는 것 같습니다. 좀비(zombie)란 영력으로 되살아났지만 자기 의지와 기억을 빼앗긴 살아있는 시체를 이르는 말입니다. 영혼을 빼앗긴 이들이 거리를 횡행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합니다. 스페인의 위대한 사상가인 미구엘 데 우나무노는 스페인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후에 자기를 찾아온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의 원인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데스페라도desperado'라고 칭합니다.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기에 황폐하게 변하고, 급기야 거친 분노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스페인 기행>>, 열린책들, 204쪽 참고).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하지만 바로 믿어야 합니다. 잘못 믿으면 좀비처럼 다른 의지의 지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랑의 대상
디모데후서의 저자는 말세에 나타날 일을 우주적 파국이 아닌 윤리적 파탄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말세는 세상의 끝이 아니라 옛 질서가 끝나는 때입니다. 그때는 동시에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때입니다. 본문은 그때를 '어려운 때'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그때를 식별할 수 있는 징표는 무려 19가지나 됩니다. 그걸 일일이 다 풀어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핵심어에 주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입니다. 김세환 씨가 부른 노래 가운데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사랑받은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사랑이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랑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랑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2절과 4절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모두 사랑의 대상을 잘못 설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돈',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의 행태를 아주 단순화시켜 말합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빌2:21). 이들은 오직 자기와 자기 가족의 안위와 행복에만 골몰할 뿐, 예수의 일 곧 우리가 함께 살아갈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남들이 피땀 흘리며 쟁취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뿐,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와 모순을 다 지고 가셨기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정작 누구의 짐도 함께 나눠질 생각이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돈은 사용하는 것이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을 사랑합니다. 늘 말씀드리는 바와 마찬가지로 돈은 '유사 전능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 관계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깊은 정을 나누며 살던 공동체는 다 깨지고 말았습니다. 공동체가 주는 따뜻함을 잃어버려 우리 삶이 빈곤해졌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큐피디타스(cupiditas)는 탐욕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하나님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사용하면서 세상에서의 만족을 구하는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은 사용하고, 정작 이용해야 할 것은 사랑하는 전도된 사랑이 곧 죄요 탐욕입니다. 카리타스(caritas)는 살기 위해 세상의 것들을 사용하면서도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품고 사는 사랑을 뜻합니다. 사용해야 할 것과 사랑해야 할 대상을 뒤집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실패한 이들의 마음에 깃드는 것은 헛헛함과 불안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잊기 위해 쾌락을 추구합니다. 쾌락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맹렬히 추구하는 삶은 문제입니다. 쾌락의 종류도 다양하기는 합니다만, 쾌락은 탐닉을 전제로 합니다. 뭔가에 푹 빠지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다 잊게 됩니다. 아끼고 존중해야 할 이들을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삶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뽐냄, 교만, 불순종, 감사할 줄 모름, 불경함, 무정함, 원한, 비방, 절제하지 못함, 난폭함, 악행, 배신, 무모함 등은 이런 삶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삶은 이런 것들과 무관한지요?

• 참된 배움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해결사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도의 보람은 우리의 작은 마음을 하나님의 크신 마음에 잇댐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자기 문제를 풀어달라고 하나님께 청하고는,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다시금 세상일에 몰두하며 살아갑니다. 사랑, 용서, 화해, 믿음, 소망, 구원 등의 종교적인 언어를 수시로 사용하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자기 주위를 맴돌 뿐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런 삶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5) 겉꾸밈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삼상16:7). 경건의 능력이란 어떤 것일까요? 전원과 연결되면 힘을 발휘하는 가전제품을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전기 에너지는 빛으로 바뀌기도 하고, 열로 바뀌기도 하고, 기계를 돌리는 힘으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원에 접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과 접속된 채 살고 있는지는 우리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둔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산다면, 냉랭한 세상을 따뜻하게 바꾸는 열로 산다면, 가난하고 여린 이들을 돕는 힘으로 산다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자기 생명을 귀히 여기는 태도로 나타나고, 이웃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나타나고, 불의에 대한 분노로 나타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자기, 돈, 쾌락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줄을 끊어 우리로 하여금 무능한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사도는 경건한 척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당부합니다. 위선도 전염됩니다. 우리의 사귐이 서로의 나쁜 행실을 격려하고 덮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좋은 사귐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쁜 동무는 좋은 습성을 망친다"(고전15:33)면서 그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고전5:6)고도 말했습니다. 때로는 매몰찰 정도로 끊어야 할 것을 끊어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경건한 척 하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삶의 변화는 한사코 거부하면서 경건의 외양만 취하는 이들은 또 어떤 이들입니까? 그들은 "늘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를 깨닫는 데는 전혀 이를 수 없습니다"(7).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배우는 데는 꽤 열심입니다. 목마름 때문일 겁니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새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앎은 교만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아테네 선교 이야기를 전하면서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에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행17:21)고 말합니다. 그들은 새것에 대한 호기심은 많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는 진리에는 아직 당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의 저자는 이런 이들을 얀네와 얌브레라는 미지의 인물들에 빗대 설명하고 있습니다. 후기 유대교 전통은 이들이 바로의 면전에서 모세와 맞섰던 이집트의 마술사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직 진리의 깊은 세계에 풍덩 발을 들여놓지 못한 이들입니다

• 희망의 사람
이 어렵고 무정한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은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입증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뒤집힌 사랑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세상,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절망의 땅에 희망의 봄소식이 되어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뜻 말입니다. 희망은 본래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입니다. 마종기 시인의 시 '희망에 대하여'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함께 붙잡고 울 수 있는 것도 행복이란 것을 아는 이, 남의 깊은 속까지 다 믿고 있는 이가 희망의 신호다. 당당히 걸어서 사람의 마음속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마흔두 개의 초록> 중) 희망의 신호는 참 사소해 보이는 데 그게 실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만 자꾸 바라보면 우리 마음이 황폐해지기 쉽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 아주 작은 하나님 나라를 시작해야 합니다. 희망이 희망이기 위해서는 쉽게 낙심하지 않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제 책 <끙끙 앓는 하나님>을 몇몇 지인들에게 보내면서 '맑고 가볍게, 그리고 환하게'라고 적어서 보냈습니다. 책의 내용은 무겁고 아픈 데, 다소 뜬금없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무겁고 아픈 세상을 건너기 위해서는 중력에 이끌리듯 우울에 빠지려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려 맑고 가벼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랑하지 않고는 죄와 끈질기게 싸울 수도 없고, 먼 길을 갈 수도 없습니다. 시절이 어려울수록 아름다운 동행이 꼭 필요합니다. 지리산 뱀사골에서 스러진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는 제가 참 좋아하는 시인데 그 마지막 대목은 이렇게 끝납니다.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마주잡을 손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가 우리 삶에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누군가가 마주잡을 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 꿈을 위해 애쓸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3월 26일 11시 19분 0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