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4. 정의의 비를 기다리며
설교자 김기석
본문 호 10:9-15
설교일시 2017/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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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비를 기다리며
호10:9-15
(2017/04/02, 사순절 제5주)

["이스라엘아, 너는 기브아에 살던 때부터 죄를 짓기 시작해서 이제까지 죄를 짓고 있다. 거기에서부터 나에게 반항하였으니, 어찌 전쟁이 기브아에서 죄짓는 자에게 미치지 않겠느냐? 내가 원하는 그 때에 이 백성을 쳐서 벌하겠다. 이방 나라들도 나와 함께 이 백성을 칠 것이다. 나 주를 떠나고 우상을 섬긴 이 두 가지 죄를 벌하겠다. 한때 에브라임은 길이 잘 든 암소와 같아서, 곡식을 밟아서 잘도 떨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씌워 에브라임은 수레를 끌게 하고, 유다는 밭을 갈게 하고, 야곱은 써레질을 하게 하겠다. 내가 일렀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 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 그러나 너희는 밭을 갈아서 죄악의 씨를 뿌리고, 반역을 거두어서 거짓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는 네가 병거와 많은 수의 군인을 믿고 마음을 놓은 탓이다. 그러므로 네 백성을 공격하는 전쟁의 함성이 들려 올 것이다. 벳아벨이 살만에게 공격을 받고 파괴된 날과 같이, 너의 요새들이 모조리 파괴될 것이다. 그 날에 자식들이 박살 난 바로 그 바위 위에서 어머니들마저 박살 나지 않았느냐? 베델아, 내가 그것과 똑같이 너희들에게 하겠다. 너희가 지은 심히 무서운 죄악 때문에 그렇다. 이스라엘 왕은 전쟁이 시작되는 새벽녘에 틀림없이 잡혀 죽을 것이다."]

• 기둥이 무너질 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뭍으로 떠오른 세월호를 바라보며 통곡을 터뜨린 세월호 유가족들과 미수습자 가족들에게도 주님의 위로가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정치 상황의 암울함이제 사순절 순례 여정의 막바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푯대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서고 계신지요? 가끔 인생은 미로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중심에 가까이 이르렀다 싶은 순간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은 순간 중심을 향한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중심을 향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강이 바다를 그리워하여 아래로 아래로 흐르듯이,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은 낮은 곳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웃이 겪는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 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강물에 몸을 싣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삼고, 주님이 아파하시는 것을 함께 아파하고, 주님이 하시려는 일을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삶과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일종의 허위의식일 뿐입니다.

신앙이 허위의식이 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악취를 맡습니다. 바울 사도는 일찍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 말했습니다. 꽃이 피면 향기는 절로 퍼져나갑니다. 대상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우리 내면에 그리스도라는 꽃이 피었다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사람들이 먼저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러나 꽃의 보람은 수정(受精, fertilization) 되어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어느 결에 우리 신앙생활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저어 주지 않으면 더껑이(걸쭉한 액체의 거죽에 생기는 엉겨 굳거나 말라서 생긴 껍질)가 앉는 팥죽처럼, 우리 마음도 적절한 자극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하지 않으면 익숙한 길, 편한 길, 넓은 길만 선택하게 마련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호세아가 전하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호세아는 세계 정세의 변동 속에서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리던 여로보암 2세와 그 이후 세대를 향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늘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에 모처럼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현인인 노자는 도덕경 30장에서 "군사가 주둔하던 곳엔 가시엉겅퀴가 자라나고 큰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따르게 된다"(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고 말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는 전쟁과 또 다른 전쟁 사이의 휴지기 같은 시대였습니다.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새로운 의욕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했고, 힘 있는 이들의 억압과 착취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호세아는 자기 시대를 가리켜 진실과 사랑이 사라진 시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진 시대라 진단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그 시대는 오히려 저주, 사기, 살인, 도둑질, 간음, 살육, 학살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4:1-2).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6:7). 사회 정의는 무너졌고, 종교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풍요로움이 덫이 된 셈입니다.

• 기브아에서의 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의 뿌리가 매우 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기브아에서 살던 때부터 죄를 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하나님께 반항까지 하더라는 것입니다. 기브아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사사기 19장 이하를 참고해야 합니다. 에브라임 산골에 살고 있던 레위 사람 하나가 베들레헴에서 한 여자를 첩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인이 화가 나서 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레위인은 처가에 가서 여인을 잘 달래서 집으로 데려가게 되었습니다. 랬습니다. 먼 행로 가운데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에 당도했습니다. 한 노인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물녘 성읍의 무뢰배들이 찾아와 나그네와 재미를 좀 보겠다면서 그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주인은 자기 집에 오신 손님에게 그럴 수는 없다면서 그들을 달래보려 하지만 무뢰배들은 좀처럼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레위 사람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줍니다. 참 무책임한 처사입니다. 무뢰배들은 그 여인을 밤새도록 윤간했습니다. 새벽녘에 여인은 그 노인의 집 앞에 버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조금 끔찍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레위인은 첩의 시신을 토막 내 이스라엘의 온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그런 참담한 일이 벌어진 현실을 개탄하면서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사사기의 저자가 이런 끔찍한 일을 자기 책의 말미에 기록한 것은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필요성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쨌든 호세아는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기브아에서 벌어진 만행이 그 시대에도 재현되고 있다는 것일 겁니다. 풍요의 환상에 빠져 사람들이 서로를 귀히 여기지 않는 세상, 존엄한 인간을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세상, 낯선 이들을 환대하지 않는 세상은 멸망을 앞둔 사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류학자인 김현경 선생은 '인간'과 '사람'을 구별해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입니다. 생명을 받아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인정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가 머물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설 자기를 배정받지 못한 이들, 사회나 집단이 어떤 선택을 하든 늘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들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야말로 환대입니다. 그 집단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이 안심하면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기브아에서부터 시작된 죄란 환대의 의무를 저버린 채 형제와 자매를 수단으로 삼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요 거역입니다.

호세아는 에브라임의 죄를 '주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긴 것'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풍요의 환상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마련입니다. 길이 잘 든 암소 같아서 타작하기를 좋아했던 에브라임이 이제 죄악의 도성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세상을 하나님은 못 본 척하지 않으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에 멍에를 씌워 남의 수레를 끌고, 밭을 갈고, 써레질을 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이들의 운명이 그와 같습니다.

• 그릇된 믿음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이들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요? 호세아의 진단은 매우 예리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밭을 갈아서 죄악의 씨를 뿌리고, 반역을 거두어서 거짓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는 네가 병거와 많은 수의 군인을 믿고 마음을 놓은 탓이다."(13) 문제의 뿌리는 병거와 많은 수의 군인을 믿은 데 있습니다. 결국 자기 힘에 대한 과신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매사가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오만에 빠져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가끔 실패와 곤경이 찾아오는 것은 우리가 한낱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인간의 자부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밝혀보여줍니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전9:11)

다소 비관적으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전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자기 힘과 능력에 대한 헛된 자만심을 경계하라는 말일 겁니다. 잠언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말처럼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이루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은 이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자기를 강화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밭을 갈아 죄악의 씨를 뿌리고, 반역을 거두어 거짓의 열매를 먹습니다. 그런 삶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호세아는 전쟁의 함성이 들려오고 요새가 무너지는 날이 올 거라고 말합니다. 자식들이 박살난 바위 위에서 어머니들마저 박살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장면입니다. 호세아의 예언은 마침내 베델의 운명에 이릅니다.

"베델아, 내가 그것과 똑같이 너희들에게 하겠다. 너희가 지은 심히 무서운 죄악 때문에 그렇다. 이스라엘 왕은 전쟁이 시작되는 새벽녘에 틀림없이 잡혀 죽을 것이다."(15)

베델은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곤 하는 순례의 성지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벌어지는 불경한 일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곳을 무너뜨리시려 합니다. 거룩해야 할 곳이 죄로 얼룩질 때 하나님은 가차없이 그곳을 치십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이 시작되는 새벽녘에 잡혀 죽을 것입니다. 새벽녘은 성경에서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가 도래하는 시간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뒤엎고 있습니다. 이런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묵은 땅을 갈아 엎을 때
답은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 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12) 핵심은 정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무릎을 꿇고 사는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하는 비장한 결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이들과 좋은 것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웃들을 나와 무관한 사람으로 보지 말고 함께 살아가야 할 소중한 존재로 보는 것이 정의의 시작입니다. 그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의 몫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 바로 호세아가 말하는 정의입니다. 그 정의의 열매가 사랑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온몸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바람처럼 다가와 무감각한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기도 하고, 망치처럼 다가와 우리의 못난 자아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한다면 순간순간 묵은 땅과 같이 굳어진 우리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땅은 씨앗을 품지 못하는 법입니다. 예레미야는 똑같은 메시지를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라"(렘4:3)는 말 속에 담아냅니다. 새로움은 언제나 아픔을 동반합니다. 새로울 '신新' 자를 설 '립立' 나무 '목木' 도끼 '근斤'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 있는 나무를 도낏날로 내려칠 때 나무가 느끼는 아픔 혹은 그때 번져나오는 생생한 향기와 같은 것이 새로움입니다. 우리 존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결단이라 하는 것입니다. 가르고 끊는 것이 바로 결단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애쓸 때, 하나님은 이 땅에 정의를 비처럼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웃들을 증오하고, 배제하고, 냉소하고, 함부로 대하는 일들을 내려놓으십시오. 서로 아끼고 보살피고 존경하십시오.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우리의 일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심는 씨가 죽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해도 그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로 맺힐 날이 올 겁니다. 믿는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세상을 앞당겨 보는 사람입니다. 스피노자는 사과 한 알 속에서 과수원을 보는 게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일찍이 시편 기자는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 바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추는 세상,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는 세상(시85:10-11)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온힘을 다해 지향하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점점 묵정밭으로 변해가는 자기 마음 밭을 갈아엎으며, 정의의 씨를 뿌리는 이들을 통해 느리지만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그러한 땀 흘림의 현장야말로 진정한 예배의 자리입니다. 사순절 막바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정의의 씨를 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4월 02일 10시 56분 5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