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8. 꾸밈없이 한결같이
설교자 이범석
본문 벧전 1:17-23
설교일시 201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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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없이 한결같이
벧전 1:17-23
(2017/04/30, 부활절 제3주)

[그리고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를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미리 아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썩을 씨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 봄비 맞은 연록 빛깔 잎사귀
부활절 세 번째 주일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때로 잠시 짬을 내어, 화창한 봄날을 만끽할 틈을 만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 내내 바깥 공기가 비교적 나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에 걸려있는 하얀 조각구름도 꽤 볼 수 있었습니다. 봄꽃인 매화,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 라일락 등은 모두 떨어졌지만, 그 자리에 나뭇잎들이 새로운 풍성함을 더해가며 서로 멋진 빛깔을 드러내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떤 색의 나뭇잎을 좋아하시나요? 가을에 무르익은 단풍의 깊고 찬란한 빛깔이나 한여름의 짙은 녹색 빛깔도 매력적이지만, 저는 이 계절 잎사귀의 연록 빛깔이 참 좋습니다. 겨울이 뒤로 지나가고, 다가온 새 봄의 빛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겨울 동안 나무들은 많이 움츠러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생명이 정지한 것 같았지요. 나무껍질을 보면, 가뭄에 논바닥 터지듯, 표면이 갈라져 있었습니다. 바싹 메말라 겉이 먼지처럼 바스러질 것 같은 가지들을 보노라면, 때로 먹먹하고 답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겨울이 지나고 완연한 봄이 되면, 새 순이 돋기 시작하고, 신기하게도 가지에 윤기가 더해집니다. 유약해 보이지만, 저는 새 봄의 연록색이 참 좋습니다. 특히 비가 내린 뒤, 물기를 담뿍 먹고 한껏 솟아오른 잎새들을 보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듯합니다.
부활절이 바로 이런 계절에 있다는 사실이 저는 참 좋습니다. ‘계절을 탄다’는 표현이 있지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 만물이 새로이 소생하는 계절에,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기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나라 계절을 잘 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과 저도 부활절기라는 신앙의 중요한 흐름을 잘 맞이해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려내시는 부활의 은총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캄캄하게 구름 낀 날, 길을 잃다
오늘은 부활을 체험한 여러 사람들 중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든든한 제자요, 첫 신앙고백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마16:16)
이 신앙 고백의 의미를 곱씹기 위해서, 우리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은 무척 풍요로운 땅입니다. 이스라엘을 보통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 속에 담습니다. 북쪽 끝이 바로 단이요, 남단은 브엘세바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북쪽 끝 단 옆에 있습니다. 바니아스 폭포가 있고, 숲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흘러 넘치는 샘이 있습니다. 물이 모자란 이스라엘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적절한 강우량, 풍성한 샘, 좋은 토질 등 살기 좋은 지역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풍요로운 지방입니다.
그래서인가요. 헤롯 왕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해 판(Pan- 사람 상반신에 염소 몸을 한 목축신) 신 신전을 이곳에 건립했습니다. 또 옆에는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도 있었습니다. 헤롯은 헌정의 의미에서 도시 이름에 ‘가이사’(로마 황제)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이후 헤롯 빌립이 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자기 이름을 덧붙입니다. 그래서 지역 이름이 ‘가이사랴 빌립보’가 된 것입니다. 판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지명은 ‘바니아스(p→b)’입니다.
한편으론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어서 아쉬움이 없는 지방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헤롯과 로마의 정치권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지방입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에는, 이런 세상의 우상을 정면으로 거부하겠다는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풍요를 좇아간다 해도, 또 권력을 좇아가서 엎드린다 해도, 나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겠다고 천명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세상의 우상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혹거리인 경제적 풍요와 권력에 무릎 꿇지 않고,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꿈에 동참한 베드로의 당찬 호기가 그의 신앙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베드로의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요13:37)라는 호기로운 외침은 곧 부끄러운 ‘부인’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한 하녀로부터 불시에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라고 지적을 받자, 베드로는 얼결에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며, 부인했습니다. 이후 또 같은 이야기를 듣자, 이번에는 확실하게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세 번 같은 질문을 받자, 베드로는 아예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26:69-74)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호기로운 외침은 어떻게 모른다는 맹세로 바뀌었을까요. 그냥 움찔하고 뒤로 물러나 주춤거린 걸까요. 예수님과 같이 잡힐까봐 갑자기 두려웠을까요.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순간 현실적으로 느껴졌을까요. 본능적으로, 살려면 일단 피하고 봐야한다는 직감이 찾아왔을까요. 그 어떤 마음이었든지, 베드로는 그 순간 완전히 그야말로 처절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는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비통하게 울었습니다.(눅22:62)

이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묻혔습니다. 베드로는 여성들로부터 빈 무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달려가 확인하고는, 이상히 여길 뿐, 주님을 찾으러 나서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때까지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헛헛한 가슴으로 고향 땅 갈릴리 호수에 물고기를 잡으러 내려갑니다.

* 목자가 먼저 찾아오시다
베드로전서 기자는 우리 삶을 “나그네 삶”이라고 지칭합니다.(벧전1:17) 인생길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분명히 알든 모르든, 우리는 분명히 긴 여정의 중간 어디쯤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그네가 맞습니다. 우리가 있는 ‘지금 여기’는 영원한 목적지가 아님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에, ‘지금 여기’는 우리 숨이 붙어 있는 한 잠시 들러 있다가 다시 떠나야할 노정의 중간 기착지일 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중간 기착지이기에 우리는 때로 확신에 가득 차 소리칠 수도 있고, 실망과 자책, 두려움 속에 무너져 내려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지금 여기가 최종이라면, 현재의 모습으로 확정되고 끝난다면, 정말 큰 일이지요. 다행히 그렇지 않습니다. 중간 기착지입니다. 여행의 중간 기착지에 해야할 건, 다시 채비를 차리고 목표하고 있는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만 다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숙고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기자는 “헛된 생활방식”에서 벗어나야 함을 일러줍니다. 삶에서 진짜 두려워해야할 것은 오류나 잘못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오류와 잘못에 나를 내맡기고 익숙해지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다 못해 ‘헛된 생활방식’이 편안하기까지 한 것이 문제입니다. 살다보면 베드로처럼 나의 전부라고 선언했던 것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서글픈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간 기착지에서 서글픔에만 매몰당해 있으면 안 됩니다. 다시 새 여행을 떠나야합니다.

낙향한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낚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거기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오십니다. 겨울 막바지에 이르러 바싹 메마른 나뭇가지같이 까칠하게 여윈 제자들에게 생선과 빵을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요21:15)
그는 세 번의 사랑 고백을 통해, 용서와 회복을 체험합니다.

이제 그는 죽음과도 같은 짙은 어두움에 삼켜진 베드로가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 즉 예수님보다, 믿음을 고백하는 나 자신을 더 크게 믿었다가 무너지고 실망했던 모습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훌륭했습니다. 경제적 정치적 달콤함을 거부한, 믿음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주님 앞에서 외치는 구호가 전부는 아닙니다. 외침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믿음의 선언에 더해, 그 마음으로 주님의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사랑의 수고를 행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을 새롭게 회복시키신 예수님의 부활 사랑으로 뭇 형제자매들을 다시 생명력 넘치는 세계로 초대하는 일입니다. 이걸 깨달은 순간 베드로는 마치 비온 뒤 물기 머금은 연록 빛깔 새싹처럼 다시 태어났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질문도 변하였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던 주님께서, 이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질문이 변하니, 답변도 변합니다. 이제부터 베드로는 몸을 움직여 행동하는 사랑으로 예수님께 답변합니다.

* 사랑을 살다
베드로는 욥바에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의 로마 백인부대 부대장 고넬료의 하인 둘과 부하 병사가 베드로를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불러들여서 묵게” 하였습니다.(행10:23) 유대인인 베드로는 이방인을 맞아들여 묵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저들이 누구인지보다, 저들과 내가 어떤 사랑을 나눌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가름의 굴레와 같은 헛된 생활방식에서 벗어났습니다.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가이사랴는 헤롯왕이 건설한 신도시입니다. 로마 총독 주재지요, 만 명을 수용하는 대형 기마 경기장, 원형 극장, 관청들, 온갖 시설과 호화 주택, 특히 유대 지역 최대의 인공항구가 있었습니다. 헤롯 왕가의 해상 교역 거점이요, 유대 지방 내의 ‘작은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그런 곳의 로마 군대 장교의 집으로 베드로는 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며칠 더 그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할례 받은 유대인이요, 십자가에서 스승을 잃었던 베드로에게 백부장 고넬료는 어떤 사람으로 느껴졌겠습니까. 고넬료는 할례 받지 않았기에 상종하거나 접촉하면 안 되는 이방인입니다. 불결한 존재입니다. 게다가 로마 군인은 스승 예수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안겼고, 발가벗기고 가시관을 씌우며 모욕과 수치를 안긴 채,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사람들입니다. 고넬료 역시 그 일원입니다. 베드로 사도로서는 구태여 초청에 응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길을 떠났고, 고넬료를 만났고, 함께 식사하고, 세례까지 베풀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의 진리에 자신을 조율시켰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벧전1:22)

세상은 죽음의 세력이 뒤덮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모든 것들 말입니다. 이를테면, 하루하루 애쓰고 수고하며 열심히 일한 평범한 시민들을 맥 빠지게 만드는 것들, 편을 가르고 그 사이에 높은 담을 세우며, 화해와 평화의 발걸음을 무력화시키려는 것들, 부당한 이름을 명패에 새겨 덮어씌우고 배척하는 검은 계략을 꾸미는 모사꾼들, 썩어질 은과 금과 같은 것들, 백 년을 가지 못할 권세들. 또 그런 것들이 간사하게 속삭이는 유혹들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죽음의 권세로부터 승리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생명의 진리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바에 담겨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34)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요21:15)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에 자신의 마음을 조율시키고 붙들어 매자, 그 안의 부정적인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혐오하고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로마 백부장을 마주 대할 수 있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고 한 이방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차하게라도 내 목숨 부지하고 싶다는 욕구와 한 자리 차지하고 호령하며 살겠다는 욕망은 아예 뒤로 하고, 한 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미움, 선입견, 욕망들이 모두 가라앉자, 아무런 ‘꾸밈없이’ 온전하게 ‘너’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한 명의 사람으로 본다는 것만 힘든 일인가요. 우리도 누군가를 마냥 한 명의 사람으로 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의 생김새, 차림새, 지위나, 소유가 사람 그 자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내가 이용하고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내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에 따라, 때로는 시기하고 기만하고 위선을 떨면서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매몰차게 외면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아예 무관심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도 투명인간 취급하기도 하지요.
베드로전서 기자는 한 명의 사람을 그 자체로 보라고, 한 마디로 의뭉스러운 꿍꿍이셈 없이 그냥 상대방을 만나보라고, “꾸밈없이” 서로 만나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베드로와 고넬료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새번역 성경은 “뜨겁게”를 “변함없이” 또는 “깊게”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 뜨겁게 사랑한다는 말은, 젊은 연인들의 불꽃같은 사랑을 뜻한다기보다, 어머니의 깊고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 성경의 번역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도 참 좋습니다. 친구 사이에 한결같음보다 더 큰 덕목도 드물 것입니다.

베드로는 형제자매들을 선입견이나 욕망 없이 즉 ‘꾸밈없이 순결’한 마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서로 뜨겁게 한결같이’ 사랑했습니다.

* 서로 사랑하니 살 맛 나네
오늘 저는 어마어마한 사랑을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핏방울을 땀방울처럼 흘리는 희생을 하시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시는 위대한 분들을 존경하고 따르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내 욕망, 혐오, 선입견 등을 비우고, 꾸밈없이, 한결같이,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서로 사랑하고 생명력을 북돋우는 삶이 부활의 삶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윤성희 씨의 소설집 『베개를 베다』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살면서 여러 결핍 속에 시달리는 이들입니다. 서로간의 관계는 일견 느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빛나는 순간 따위는 없어 보이는 이들이, 서로 기대거나 마주하며 그래도 다시 한 번 희망을 품고 살만한 세상을 꾸려나가고 있음을 작가를 보여줍니다.
단편 「다정한 핀잔」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미희 언니의 조카가 호빵을 사왔다. 저녁을 먹고 오라며 내보냈더니 오 분 만에 호빵 두 개를 들고 돌아온 것이다. ... 손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호빵을 감싸보았다. 따뜻했다. ... 팥냄새가 코에서 느껴지지 않고 배꼽 어딘가에서 느껴졌다. 내 코가 냄새를 맡기도 전에 냄새가 먼저 내 몸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나는 아이에게 호빵 반쪽을 주었다. ... 팥은 혀가 델 만큼 뜨거웠고, 달았다.”
저는 추운 겨울을 녹였던 호빵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궁핍하고 힘들고 아팠던 그 시절을 함께 견디며 서로에게 따사로운 손길이 되었던 식구들, 친구들, 이웃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미희씨가 교통사고로 6시간 넘게 대수술을 받고 있는 동안, 수술실 보호자 대기실에, 화자인 ‘나’와 동생 미애씨와 미애씨의 아들 형욱, 이렇게 셋이 기다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미희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새아버지와 8살 동생이 함께 살던 집을 나왔습니다. 그의 20대는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열두 시까지 일을 하며, 십 년 안에 성공해서 집으로 돌아가려 했던, 한 마디로 ‘야망과 소화불량’의 시기였습니다.
동생 미애씨는 언니가 집을 나간 8살 이후, 변변찮은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때로 술에 절어있는 아버지 곁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살았습니다.
미희씨보다 12살 어리지만 친구인 ‘나’는 오빠에게 밀려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었습니다.
모두 어두운 삶의 무게에 짓눌려있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미희씨는 제목처럼 ‘다정한 핀잔’으로 서로의 삶에 빛을 더하는 사람이었다고 ‘나’는 회상합니다.
회상 장면 몇 개를 들려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미희 언니가 부점장으로 있던 햄버거 가게에 청소도 제대로 못하는 아르바이트 생이었습니다. 대학입시 시험 전날, 일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나’를 미희 언니는 불러서 만 원이 들어있는 봉투를 주었습니다. 내일은 아르바이트 안 나와도 된다고, 시험 끝나고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합니다.
미희 언니는 실연의 아픔 속에 눈이 퉁퉁 부어 나타난 아르바이트생이 혼자 있을 수 있도록, 창고로 보냅니다. 그리고 몰래 크림수프를 끓여다주고, 따뜻한 커피를 가져다줍니다.
이후 ‘나’는 대학을 포기하고 사무보조로 취직했습니다. 거기서 성추행을 당합니다. 게다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게 속상해서, 울며 전화했을 때, 미희 언니는 매운 닭발과 달걀찜을 사와서는, 같이 먹고, 자신의 씁쓸한 20대의 단편을 들려줍니다.
이야기와 인물들에게 엄청나게 극적인 장면이나 순간은 없습니다. 대단한 감동을 자아내지도 않습니다. 인물들이 더할 나위 없이 착한 것도 아닙니다. ‘일일 연속극 엑스트라’ 같은 사람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모자라고 어설프고 답답한 사람들, 우리 주변에 있는 그냥 그저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만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친구에게 또 다시 어두움이 들이닥쳤을 때, 이들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꼭 피가 섞인 건 아니라고 해도 유사가족 같은 이들은, 서로에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가가서, 교감하고, 이해하고, 애써 보살피며, 그가 어둠의 굴레에 질식당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아무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곁에 있어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살뜰함으로 인해 상대방을 위로하고 다시 세워줄 뿐만 아니라, 사랑을 베푼 나도 역시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또 하나의 힘을 거기서 얻습니다.

베드로전서 1:22을 메시지 신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거기에 달려 있다는 듯이 사랑하십시오.” (메시지 신약, 벧전1:22)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 하나하나를 ‘서로 사랑하기’라는 굵은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 인생은 더 굳건해질 것입니다.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내가 더 큰 힘을 얻도록 설계해 놓으신 것 같습니다. 사랑의 샘물은, 퍼서 주고나면 사라지는 물이 아니라, 다시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입니다. 오늘밖에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일이면 사랑할 수 없음에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거기에 달려 있다는 듯이 사랑하십시오.”
부디 ‘오늘 여기’ 나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만나는 이들을, 꾸밈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깊게 한결같이 사랑하시며, 부활의 생명력을 나누실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4월 30일 11시 20분 3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