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2. 주님이 놓으신 기초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89:11-18
설교일시 2017/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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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놓으신 기초
시 89:11-18
(2017/05/28, 승천주일)

[하늘은 주님은 것, 땅도 주님의 것, 세계와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이 모두 주님께서 기초를 놓으신 것입니다. 자폰 산과 아마누스 산을 주님이 창조하셨으니, 다볼 산과 헤르몬 산이 주님의 이름을 크게 찬양합니다. 주님의 팔에 능력이 있으며 주님의 손에는 힘이 있으며, 주님의 오른손은 높이 들렸습니다. 정의와 공정이 주님의 보좌를 받들고, 사랑과 신실이 주님을 시중들며 앞장서 갑니다.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온종일 주님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주님의 의로우심을 기뻐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광스러운 힘이십니다. 주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는 승리의 뿔을 높이 쳐들게 됩니다. 주님, 참으로 주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 참으로 주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 승천하신 주님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며칠 하늘이 청명했습니다. 먼지가 사라져 가시거리가 멀어지자 마음의 울울함도 함께 스러졌습니다. 우리 역사에 드리웠던 먹장구름도 그렇게 걷히기를 빕니다. 지난 목요일은 주님의 승천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승천일을 크게 기념하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이 날을 매우 중요한 축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휴일로 지정한 나라도 있다고 합니다. 스스로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승천을 말하는 이들을 보고 광신자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승천이란 신화적 사고의 잔재에 불과하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승천은 땅에 속했던 몸이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을 통해 죄의 권세를 멸하신 주님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넘겨 받으셨음을 뜻합니다. 루터는 승천을 주님께서 마침내 "생명의 정의, 모든 선한 것과 은총의 주인으로 좌정"(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최주훈 옮김, 복 있는 사람, p.211) 하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유럽에 있는 유서깊은 예배당에 가면 천정 위 반구형의 돔이나 앱스(apse)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담긴 모자이크화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모습을 판토크라토르(Pantokrator)라고 합니다. '전능의 주'라는 뜻입니다. 저는 갈릴리의 민중들과 흉허물없이 어울리며 함께 울고 웃었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에게 깊은 매력을 느끼지만, 세상의 주권자이신 주님 앞에서는 깊은 경외감을 느끼곤 합니다. 온 우주를 사랑과 정의의 원리로 지배하시는 주님을 믿는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요?

몇 해 전 터키의 이스탄불에 갔을 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저는 토카피 궁전 옆에 있는 '이레네(Irene)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그 성당은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 봉헌되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공연장으로 사용되는 곳입니다. 그곳을 찾아갔던 까닭은 그곳에서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381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소집한 이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요체를 담은 '니케아 신조'와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그 회의의 복잡한 전후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게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저는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중요한 기독교 유적이 너무 황폐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의 그 건물은 15세기에 이슬람의 손에 넘어간 후에 병기고로 쓰였고 나중에는 무기 박물관과 군사 박물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가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것은 '판토크라토르'가 그려져 있었을 예배당 꼭대기 중앙 천장에 각종 무기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랑과 평화가 아니라 힘과 무기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높은 곳에 그런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한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힘을 숭상하는 사람일 겁니다. 세상은 정말 힘을 가진 이들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 숙고하고 있는 것은 그런 현실 너머에 있는 다른 현실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존재의 기반
오늘 우리가 읽은 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혼돈을 잠잠케 하고 질서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다스리시며, 뛰노는 파도도 진정시키십니다. 주님은 라합을 격파하여 죽이시고, 주님의 원수들을 주님의 강한 팔로 흩으셨습니다"(89:9-10). '소용돌이치는 바다', '뛰노는 바다'는 단순히 사납게 일렁이는 자연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겁니다. 인생을 항해에 빗대 설명하는 것은 유구한 전통입니다. 사노라면 바람이 잠잠하고 햇살 양양하여 마음 상쾌한 날도 있지만, 예기치 않은 풍랑이 일어 우리를 위험으로 몰아넣는 일도 많습니다. '라합'은 옛 사람들이 바다 괴물로 여기는 동물이지만 사실 우리 삶을 혼돈에 빠뜨리는 압도적인 힘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가난, 질병, 실패, 고독,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고가 마치 지진처럼, 화산처럼 우리 삶을 덮칠 때 우리는 무기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인은 그런 경험 가운데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혼돈을 극복하고 질서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에 시인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주님의 것, 땅도 주님의 것, 세계와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이 모두 주님께서 기초를 놓으신 것입니다. 자폰 산과 아마누스 산을 주님이 창조하셨으니, 다볼 산과 헤르몬 산이 주님의 이름을 크게 찬양합니다. 주님의 팔에 능력이 있으며 주님의 손에는 힘이 있으며, 주님의 오른손은 높이 들렸습니다."(89:11-13)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자폰 산'과 '아마누스 산', '다볼 산'과 '헤르몬 산'은 중근동의 신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산의 이름입니다. 시인은 이방인들이 신성시하고 있는 그 산들도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 주님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존재의 기반'(ground of Being)이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저 위, 우리의 손이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든든히 떠받들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우리도 세상도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입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만 거룩한 곳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모든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니 경거망동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선 듯 조심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 세상의 기초
주님이 지배하시는 세상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걸 알면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상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욕망 위에 건설된 것일까요? 미움과 증오 혹은 지배 욕망 위에 세워진 것일까요? 히브리의 시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정의와 공정이 주님의 보좌를 받들고, 사랑과 신실이 주님을 시중들며 앞장서 갑니다"(89:14)

이 구절이 참 장엄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정의', '공정', '사랑', '신실'은 히브리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어들입니다. 정의는 '의' 혹은 '옳음'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옳은 것으로 여기실까요? 힘 있는 이들이 힘 없는 이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들이 존엄성을 유지한 채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율법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배우지 못했다고 하여 무시당하지 않고, 돈이 없다 하여 굴욕을 당하지 않고, 병약하게 태어났다고 하여 천대받지 않는 세상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세상입니다. 구의역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20세의 젊은 노동자가 죽은지 1년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그런 위험에 처해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정의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억울한 죽음이 더 이상 없는 세상을 이루라고 명령하십니다.

공정은 사적인 이해관계나 편견에 따라 사람을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분'이라는 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분의 사전적 정의는 '주위의 환경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서 사람이 마음 속에 갖는 즐겁거나 들뜨거나 혹은 울적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불콰하게 술이 취한 아버지가 애교를 부리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면서 '그래, 기분이다!' 하고 말하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이해나 판단보다 기분이 우리의 행동을 좌우할 때가 많습니다.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이들이 기분에 휘둘려서는 곤란합니다. 공적인 돈을 선심쓰듯 부하 직원들에게 나눠주면 안됩니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노자는 '天地不仁'(도덕경 5장)이라 말했습니다. 천지가 인자하지 않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늘은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말하지만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엄격하신지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러나 너만은 내가 멸망시키지 않고, 법에 따라서 징계하겠다. 나는 절대로, 네가 벌을 면하게 하지는 않겠다."(렘46:28c)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세계의 토대가 정의와 공정이라면, 그 세계의 지배 원리는 사랑과 신실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언약을 맺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지은 백성들 때문에 속이 터지지만 그렇다고 하여 쉽게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의 한 오점이라 할 수 있는 일화를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들은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송아지 상 앞에서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며 뛰어놀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없이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그 변덕스러운 백성을 보며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그 타락한 백성들을 쳐서 없애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진노의 팔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지배하는 숨겨진 원리입니다.

그리고 '신실'은 '견고함', '충실함'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변덕스러운 분이 아닙니다. 시편의 한 시인은 평안하던 시절에 하나님을 잊고 지냈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시30:7). 건강할 때 우리가 몸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삶이 평안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앉고 일어서고, 걷고 멈추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모르고 삽니다. 지금도 터전이 흔들리는 것 같은 현실 때문에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그 흔들림 가운데서도 우리 손을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 말입니다.

• 은총 안에서 살다
물론 삶은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세상에서 괴로움을 겪지 않는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는 사람이나 세상을 떠난 사람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바울 사도가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빌1:23)이라고 말했을까요?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거룩한 일, 즉 모든 사람들이 형제애/자매애를 나누며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서 고난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 말입니다. 정의와 공의, 사랑과 신실로 세상을 지탱하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 희망의 든든한 뿌리입니다. 세상에 여전히 비참과 눈물이 있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 시인은 그런 든든함을 맛본 이들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89:15)

누가 축제의 함성을 외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눈물의 골짜기를 거닌다고 해도 그곳을 은총의 샘물이 넘치는 곳으로 바꿔주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요즘 만나는 사람들에게 삶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도 함께 경축하며 살자고 말하곤 합니다. 세상 일에 시달리다 보니 우리는 기뻐할 줄 아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의도적으로라도 기쁨을 나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너무 합리성을 따지다보면 삶이 무거워집니다. 주님은 당신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삶을 경축할 줄 알아야 어려운 사람도 도울 수 있는 법입니다. 죄인들은 홀로 즐거워하지만 성도는 함께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탄식하는 백성들에게 한 말이 기억납니다.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십시오"(느8:10). 주님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주님의 의로우심을 기뻐할 때 우리 속에는 기쁨과 감사가 깃들게 됩니다.

맨체스터의 한 공연장에서 폭탄이 터져 수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이집트에서도 종파 갈등으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세상 도처에 기근과 테러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희망보다 절망의 조짐이 더 많아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강대국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권력보다 더 근원적인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패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승천하신 주님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상처입은 어린양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약한 자, 상처입은 자들 곁에 다가오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이 땅을 치유하기 원하십니다. 이 거룩한 초대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5월 28일 11시 09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