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6. 새 나라 꿈틀거림
설교자 김기석
본문 겔 36:22-28
설교일시 2017/06/25
오디오파일 s20170625.mp3 [1564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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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나라 꿈틀거림
겔36:22-28
(2017/06/25, 성령강림 후 제3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렵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드러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너희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 끝나지 않은 전쟁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지 오늘로 꼭 67년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분단상태를 극복하지 못한 이 나라 위에도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유럽이 테러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면, 한반도는 전면적인 전쟁의 위기에 항시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지속적인 미사일 실험, 전쟁을 가상한 한미연합훈련을 보면서 1956년에 박봉우 시인이 쓴 '휴전선'이 떠올랐습니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분단상황을 떠올리며 시인은 진저리를 칩니다.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이 땅에 불고 있는 이 징그러운 바람은 언제 잦아들고, 천둥을 예감케 하는 불안한 느낌은 언제나 스러질까요? 주님 오시기 전 8세기 무렵, 전쟁의 참화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은 전쟁이 없는 세상의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사2:4, 미4:3)

세상 물정 모르는 몽상가들의 어처구니 없는 꿈처럼 들리지만, 이런 꿈조차 없는 세상이라면 어떻게 숨을 쉬며 살 수 있겠습니까? 정치가들은 현실적인 사고를 하게 마련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역사를 종말의 빛 앞에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종말은 시간 저편에 있는 세상의 끝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우리 삶 속에 엄습하는 현실입니다. 종말이라는 표현이 오해의 소지가 많다면 '하나님 나라'라고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현실의 논리에 따라 사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꿈에 지펴 사는 이들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세상은 그런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통해 열리는 법입니다.

• 연금술
믿음을 연금술에 빗대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연금술(alchemy)이란 철이나 구리, 납 따위의 흔한 금속을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으로 변화시키려는 유사과학 기술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연금술의 진짜 목표는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어 불사의 존재가 되는 데 있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꿈이지만, 그 꿈이 화학 기술을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신앙이 연금술과 유사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일까요?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긍정적인 경험도 있고 부정적인 경험도 있습니다. 늘 긍정적인 경험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질병, 실패, 상처, 좌절, 이별, 배신, 외로움, 공포, 미움, 시기, 증오, 테러가 불청객처럼 찾아와 우리를 괴롭힙니다. 가급적이면 그런 경험들을 멀리 하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부득이 겪어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가급적 빨리 지나가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압니다. 그런 경험조차 우리 삶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외시하고 싶었던 그 일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좁장한 자아에 갇힌 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슬픔을 겪어보았기에 지금 슬픔에 처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고, 아픔을 경험했기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좌절을 경험해봤기에 지금 넘어진 사람들 곁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외로움에 몸서리쳐 보았기에 누군가의 벗이 되어주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알았고, 증오심에 사로잡혀 보았기에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촉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부정적인 경험을 하나님 앞에 가져갈 때 그것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길 안내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이런 일들을 겪어낼 때 우리 영혼을 어둡게 만들었던 어두운 그림자는 흰 그림자로 변합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에게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평등 공동체의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국의 공포를 맛보았기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깨달음에 당도했습니다. 압박과 설움을 겪던 포로민들이 부른 '고난받는 종의 노래'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들은 다른 이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인양 여기고, 다른 이의 죄를 자기 몸에 짊어진 채 매를 맞는 고난 받는 종에게서 세상을 구원하는 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인간 정신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고난과 시련을 타자에 대한 빛나는 사랑으로 바꾸는 것, 바로 이것이 신앙적 연금술입니다.

• 구원하시는 하나님
바벨론 포로 시기에 활동했던 에스겔은 참담하게 무너진 조국의 현실을 보고 슬퍼했지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한용운의 말처럼,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그 희망의 뿌리는 물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죄 지은 백성을 징계하시지만, 그들을 끝내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이유를 아주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이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려 그 땅을 더럽혔으며, 온갖 우상을 섬겨 그 땅을 더럽혔으므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아 부었다"(겔36:18)

우상을 섬기는 것과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일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까닭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고 싶어서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욕망을 거스를 때가 많습니다. 욕망은 독점을 지향하는데 하나님은 나눔을 명하십니다. 욕망은 지배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섬김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상에게 돌아설 때가 많습니다. 우상은 그런 삶을 요구하지 않으며, 우리 욕망에 충실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우상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과도한 욕망을 추구하는 이들은 타자들에 대해 늘 폭력적입니다. 우상숭배와 피 흘림으로 요약되는 세상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회복시키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천대받으며 산 것은 죄에 대한 합당한 징계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 백성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려 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렵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36:22). 말은 무뚝뚝한 듯하지만 깊은 정이 느껴지지 않나요? 어느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악어를 닮았다고 했습니다. 악어는 옹니여서 한번 물은 먹이는 뱉어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한번 물면 삼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도 하나님깨 삼켜져서 흡수통일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맞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밉다 하여 함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욕망의 길을 따라 걷다가 더럽힌 주님의 이름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그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흩어진 곳에서 데리고 나와 한데 모으고, 그들을 데리고 자유와 해방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상으로 인해 더럽혀진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닦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맑은 물을 뿌려 그들을 깨끗하게 씻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회복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인용해서 유명해진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아실 겁니다.

"광야에서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사40:3-4)

함석헌 선생님은 이 대목에 나오는 광야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 황량한 땅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민중의 가슴에 있는 빈 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빈 들에 자라는 것은 가시나무 뿐입니다. 그 가시는 어떻게 자라게 된 것일까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정치가 그들 가슴에 가시밭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서로에게 살갑게 다가설 수 없습니다. 다가설 수 없으니 더욱 외로워집니다. 하룻밤의 쉼도 녹록치 않습니다. 그런 상황을 함선생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불툭 나온 바위 같은 것이 있고, 쑥 들어간 구멍 같은 것이 있어 거기 사자, 여우가 엎디고 독사가 깃들이었다."(함석헌 저작집3, <새 나라 꿈틀거림>, 한길사, 2009년 3월 13일, p.130)

이게 참 적나라한 우리 마음 풍경이 아닌지요? 그런 가슴에 길을 내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사랑이 있고 의가 있는 사람이라야 길을 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 사랑은 그리고 우리 의는 변덕스럽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우리 임금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임금으로 모실 때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추는 세상,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는 세상이 열립니다(시85:10-11). 하늘 빛이 우리에게 비칠 때 비로소 우리 속에 있는 맹수와 독사가 물러갑니다. 맹수와 독사가 물러갈 때 지긋지긋한 분단의 영도 물러갈 것입니다.

• 새 나라를 바라보며
백성들 속에 있는 더러움을 깨끗하게 닦아주시는 하나님은 또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 심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은 무정한 마음입니다.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없는 마음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마음은 본래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민중신학자인 박재순 박사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보라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돌로 만든 떡을 먹었기에 우리 가슴이 돌가슴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철학자 김상봉 교수는 '힘의 나라'와 '뜻의 나라'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만 손에 쥐면 이룰 것을 다 이룬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사는 나라가 힘의 나라입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왔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는지 묻는 이들이 사는 나라가 뜻의 나라입니다. 지금 세상은 급격히 힘의 나라로 기울고 있습니다. 힘의 나라 주민들이 만드는 세상은 살풍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 전체가 남녀노소,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까지도 힘만 추구할 뿐 뜻을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딜 가나 호연지기는 없고 사사로운 이익에만 밝은 비루한 속물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숲속의 나무가 땅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아름드리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깊은 뜻을 마음에 품을 때 큰 일을 할 수 있는 법인데, 우리 사회가 수십 년 동안 돈과 권력 말고는 다른 어떤 가치도 모르는 사회가 되어버려 정신의 크기나 깊이를 보여주는 사람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워졌어요. 하나같이 잇속을 계산하면서 잔머리 굴리는 사람들 뿐이잖아요."(김상봉, <네가 나라다>, 길, 2017년 5월 20일, p.130)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시는 세계는 힘의 나라가 아니라 뜻의 나라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방 민족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리지만,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려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5-27)고 하셨습니다. 뜻이 들어가야 참 사람이 됩니다. 야훼 하나님은 당신을 갈망하는 이들 속에 새로운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넣어 주시마고 약속하십니다. 그 마음과 영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평화와 생명이 넘실대는 세상은 우리의 꿈인 동시에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하고, 정성을 다해 대할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분단의 세력은 물러가고 평화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새 나라는 그렇게 태동됩니다. 여전히 우리 역사는 어둡고 척박합니다. 그렇기에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이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일에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새 마음과 새 뜻을 품고, 새로운 역사를 낳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6월 25일 11시 57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