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 주여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소서
설교자 신진식
본문 요 19:38-42
설교일시 2018/12/30
오디오파일 s20181230.mp3 [1060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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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소서
요 19:38-42
(2018/12/30, 송년주일)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그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그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함께하는 여러분과 저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대림절 4주와 성탄절을 보내고 송년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대림절기 동안 기다림을 묵상했습니다. 그 묵상 가운데 기다림이라는 것이 막연한 정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신앙의 행위임을 알았습니다. 그 기다림의 열매가 새로 시작되는 2019년 새해 우리 삶과 신앙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시므온의 기다림
로마제국이 유대 땅을 다스리던 시절,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시므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누가복음은 시므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 그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눅2:25-26)

그러던 어느 날, 시므온은 간절히 기다렸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성령의 인도로 성전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정결례를 위해 성전에 들어 온 한 부부와 아기를 봅니다. 시므온은 그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합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눅2:29-30)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조명하심으로 눈이 열려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시므온의 기다림의 열매입니다. 어떻게 보면 밋밋한 이 장면을 의미 있게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누가복음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이 가족이 성전에 오기까지의 삶의 경로를 다큐멘터리를 찍듯 추적합니다. 유대 땅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칙령이 내립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하라는 명령입니다. 요셉은 아내가 만삭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 떠납니다. 그 길은 100Km가 훨씬 넘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해산할 날이 되어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자, 여관을 구하지 못한 요셉은 마구간 구유에 아기를 눕힙니다. 그리고 정결하게 되는 날이 차서, 모세의 법대로 아기를 주님께 드리려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가난한 부부 요셉과 마리아의 고단한 삶의 발걸음이 느껴지십니까? 로마 황제의 칙령도 모세의 율법도 요셉과 마리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어기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무가치한 존재가 되고 쓸데없는 인생이 될 거라는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로마제국과 유대 민족의 거대하고 뜨거운 이야기들이 하늘을 덮고 있는 유대 땅, 한 부부의 고단한 삶, 연약한 삶, 어떻게 보면 무능한 삶 가운데 태어난 아기에게서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고백이 자신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현현이 맞닿아 있는 운명을 짊어진,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려온 시므온의 기다림의 열매였습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터져 나온 시므온의 이 고백이 어쩌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소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
요한복음은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하며 시작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육신’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사륵스’(σάρξ)의 의미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몸을 지칭하는 단어는 구분되어 사용되는데, 사륵스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즉, 육신은 이 세상과 결합된 존재, 덧없고 헛된 존재, 기댈 곳이 없는 존재, 인간 실존의 무상함의 의미로 쓰입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포는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합니다.

이 예수를 밤에 찾아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요한복음은 니고데모를 바리새파 사람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소개합니다. 신학자 안셀름 그륀(Anselm Grun)은 밤에 예수를 찾아 온 니고데모의 내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인간의 삶이 어떻게 실현되고, 어떻게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유대인의 물음만이 아니라 그리스인의 전형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모든 시대의 전형적인 물음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 나선 때는 밤이다. 시간 설정은 요한복음에서 항상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밤은 여기서 내적 어둠과 암흑, 감각의 무디어진 상태를 상징한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무의미한 삶에 괴로운 나머지 예수를 찾아 나서고, 그분에게서 자신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를 원한다.” (안셀름 그륀, 김선태 역, 『요한복음 묵상- 예수, 생명의 문』 (분도출판사, 2009), 66.)

니고데모의 이 갈급한 물음에 예수는 ‘거듭남’의 화두를 던집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3:3)

우리는 이 거듭남의 신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토라의 출애굽기에도 니고데모가 경험한 하나님 체험의 원형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모세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출애굽기 3:1-2)

삶의 무엇이 모세로 하여금 광야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게 했을까요?
변할 것 같지 않은 일상의 권태로움 때문이었을까요?
혹은 장인과 아내와의 불화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과거 이집트 제국의 화려했던 왕자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요?

어쨌든, 모세는 자신의 일상의 공간인 광야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아가는 모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떨기 가운데서 타는 불꽃, 그러나 떨기를 하나도 태우지 않는 신비한 불꽃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호명하고 하신 첫 말씀입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출3:5)

니고데모와 모세는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거듭남’과 ‘신을 벗는 것’입니다.

∎ 가능성의 존재
거듭나야 되고, 신을 벗어야 볼 수 있는 ‘구원의 실재’는 무엇일까요? 거듭나지 않고, 신을 벗지 않는 인간에게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창세기는 양 갈래 길 위에 서 있는 인간 존재의 실존을 이야기 합니다.

주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을 선포하시고, 삶의 짐들을 지워, 에덴 동산 밖으로 내쫓으셨습니다. 에덴 동산 밖, 그 낯선 곳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을 낳았고, 그들의 삶은 인류 앞에 열려진 가능성이 되었습니다.

첫째 아들 가인은 질투에 휩싸여 자신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가인은 불안해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으로 가서 자식 에녹을 낳고 도시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 이름을 따서 에녹으로 정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벨 대신에 아담과 하와에게 또 한 명의 아들을 허락합니다. 하와는 자식의 이름을 셋이라고 짓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로 짓습니다. 창세기는 “그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창4:2-26)

창세기는 가능성의 존재인 인간 앞에 양 갈래 길이 놓여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가인과 에녹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셋과 에노스의 길입니다. 가인과 에녹의 길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 자신의 힘과 욕망대로 사는 삶이고, 셋과 에노스의 길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능성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삶입니다.

∎ 니고데모가 선택한 길
니고데모는 거듭남의 의미를 깨달았을까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밤에 예수를 찾아 온 니고데모가, 다시 예수를 찾아 온 곳은 예수께서 매달린 십자가 앞입니다.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로마제국의 거대한 이야기와 유대 민족의 뜨거운 이야기가 요동치는 곳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때로는 나지막이 속삭이며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꺼림칙한 것이라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미련한 것이라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곳에서 험악한 소리에 짓눌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니고데모가 나타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몸에서 ‘구원의 실재’를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의미심장하게 니고데모가 바라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의 그 몸을 헬라어 ‘사륵스’(σάρξ)가 아닌 헬라어 ‘소마’(σώμα)로 표현했습니다.

그 몸이란 윤리적·도덕적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의 몸일까요?
그 몸이란 아픈 곳 없이 무병장수한 사람의 몸일까요?
그 몸이란 대단한 성공을 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사람의 몸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몸들은 어쩌면 가인의 도시에서 선전하는 구원 받은 몸일지 모르겠습니다. 예수의 그 몸은 자신의 육체가 ‘사륵스’임을 깨닫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낸 온전한 인간의 ‘소마’입니다.

이 몸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살아야 할 삶의 실재입니다. 이 몸은 새롭게 태어나 하늘로부터 난 몸입니다. 이 몸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세상도, 자기 삶의 역사도, 부모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참된 존엄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 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산 제물이라고 말하면서, 이 몸을 헬라어 ‘소마’(σώμα)로 표현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12:1-2)


∎ 주여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소서
청파교회의 새교우분들과 함께 청파교회의 예배와 지향을 나눌 때 마다 가슴이 떨렸습니다. 그 떨림의 감정은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의 사역자라는 자부심이기도 했고, 나 한 사람으로 인해 교회에 누가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제가 이렇게 서 있는 것은 여전히 제 마음 가운데 그 떨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하면서 청파교회의 지향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 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 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 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아멘.


거둠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아름다운 삶, 참 된 삶의 길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그 몸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아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12월 30일 11시 33분 3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