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 주님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면류관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62:1-7
설교일시 201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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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손에 들린 아름다운 면류관
사62:1-7
(2019/01/20, 주현 후 제2주)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 이방 나라들이 네게서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뭇 왕이 네가 받은 영광을 볼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부를 때에, 주님께서 네게 지어 주신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또한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너를 두고 '버림받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너의 땅을 일컬어 '버림받은 아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너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 이라고 부르고, 네 땅을 '결혼한 여인' 이라고 부를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너를 좋아하시며, 네 땅을 아내로 맞아 주는 신랑과 같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듯이, 너의 아들들이 너와 결혼하며,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이, 네 하나님께서 너를 반기실 것이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 예루살렘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주님께서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단순함을 회복하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날이 비교적 따뜻하지만 절기상으로는 이미 大寒에 이르렀습니다. 대한이 24 절기의 마지막이니까 농사력으로는 이제 한 해의 마지막 때입니다. 대한이 지나면 입춘입니다. 때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 삶의 지혜일 텐데, 자연과 유리된 채 살아가는 우리들은 때를 따라 주시는 은총을 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눈앞에 있는 아름다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먼 데 있는 아름다움을 찾느라 허덕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요?

전도서 기자는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전4:6),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욕심에 사로잡혀서 헤매는 것보다 낫다”(전6:9b)고 말합니다. 인간이 가리산지리산 헤매는 것은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코헬렛은 자기가 깨달은 바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전7:29). 단순함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비결입니다. 말년에 덕소에 터 잡고 살았던 장욱진 화백은 술에 취하면 늘 “나는 심플하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일종의 자기 다짐일 겁니다. 피카소는 ‘어린아이처럼 되기 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삶의 풍상을 겪으면서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남는 것이 바로 천진함이라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마음을 단순하게 유지하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을 늘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아 거기에 자기 마음을 조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대체로 욕망을 기준음 삼아 조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늘 불협화음을 내고, 다른 이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저명한 바이올린 제작자인 마틴 슐레스케는 산상 수훈을 읽은 후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아홉 가지 황폐한 속성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불평불만, 걱정, 인색함, 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 세간에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 무절제함, 지혜 없이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는 아집, 삶의 나침반을 흐트러뜨리는 탐욕, 자신의 흠은 보지 못하고 타인의 흠만 지적하는 무조건적인 비판 욕구가 그것들입니다“(마틴 슐레스케, <바이올린과 순례자>, 유영미 옮김, 니케북스, 2018년 8월 15일, p.226-7). 이런 황폐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언자로 살아간다는 것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죄에 따른 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분간 당신의 백성들이 이방 땅에 잡혀가 치욕을 당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고난의 세월은 일종의 풀무와 같았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이 저절로 우리를 정화하는 풀무 혹은 용광로가 되지는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철저히 자기를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희구하는 이들에게 고난은 복된 기회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제 욕망을 따라 살다가 고난을 자초했습니다. 풍요에 대한 욕망은 힘이 아주 셉니다. 거역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돈은 사람에게 유사 전능성을 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자기가 마치 전능자가 된 것 같은 생각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경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웃을 존중하고 배려하라는 율법의 가르침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 앞에서 무기력합니다. 이사야는 욕망이 빚어낸 세상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래서 공평이 뒤로 밀려나고 공의가 멀어졌으며, 성실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정직이 발붙이지 못합니다. 성실이 사라지니, 악에서 떠난 자가 오히려 약탈을 당합니다.”(사59:14-15)

이사야는 주님이 세상에 공평이 없는 것을 보고 슬퍼하신다고 말합니다. 압박받은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놀라신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역사 속에 개입하십니다. 공의의 갑옷을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시고, 응징을 속옷으로 입으시고, 열심을 겉옷으로 입으신 주님이 세상일을 바로잡으십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사61:3a)고 말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절망의 한 복판에서 희망을 선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죽음의 땅에 생명의 씨앗을 심으며 사는 것입니다.

악이 번성하는 것은 선한 이들이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이 세상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밝히셨습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눅16:8b). 의도의 순수함만으로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무기력한 선함은 악의 밥이 될 뿐입니다. 뱀처럼 지혜로우면서도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악을 이길 힘은 악의 정체를 꿰뚫어보는 데서 발현됩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들큼한 말로 당신을 유혹하는 사탄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마4:10) 외치셨습니다. 주님은 거라사의 광인을 흉포하게 만드는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눅8:29)고 꾸짖으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드러내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이고 사랑입니다.

이사야는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쉬지 않겠다”(사62:1)고 강다짐합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의 양심을 습격하는 자입니다. 나름대로 체계화된 질서에 틈을 만들어 새로움이 유입되도록 하고, 불의를 불의로 고발합니다. 그는 언어를 박탈당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입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언자가 지향하는 세상은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세상입니다. 그는 현실이 어둡다 하여 낙심하지 않습니다. 일을 지레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새 이름
이사야는 정의와 공의가 회복된 시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라봄이 희망입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자기 꿈으로 삼은 이들의 헌신을 통해 열립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산고를 겪는 것처럼 아파하는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아픔이 없이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쯤 나아졌다면 그것은 치열하게 어둠에 부딪치면서 파란 불꽃을 만들어낸 이들 덕분입니다.

유대인들은 티쿤 올람(Tikkun Olam)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티쿤은 ‘고치다‘, ‘개선하다’는 뜻이고 올람은 ‘세계’라는 뜻입니다. 합하면 ‘세상을 고친다‘는 뜻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네가 태어날 때의 세상보다 네가 떠날 때의 세상이 더 아름다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그렇게 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뜻만큼은 꼭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곳에 있기에 불의를 도모하던 이들이 주춤하고, 조금이라도 따뜻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협력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그곳에 있기에 절망에 빠졌던 이들이 희망을 되찾고, 슬픔의 벼랑 끝에 서 있던 사람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일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다면/나는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다면/한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면/기운을 잃은 개똥지빠귀 한 마리를/둥지에 데려다 줄 수 있다면/나는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만이라도 사랑해 보십시오. 한 사람을 위해 설 땅이 되어보십시오. 그 마음이 세상을 치유합니다.

이사야는 시온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와 구원의 횃불을 이방 나라가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산 위의 마을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곳은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라는 프로그램에 등장한 후부터 우리가 늘 다니던 식당에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골목 안으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섭니다. 오후 1시 30분만 되어도 준비한 재료가 소진되어 영업을 종료했다는 쪽지가 내걸립니다. 참 낯선 풍경입니다.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참으로 막강합니다. 목사로서 무기력함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비교가 안 되니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면 안 됩니다. 무쇠솥처럼 은근하고 지속적으로 열을 품어야 합니다. 결실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심는 씨앗이 죽은 씨가 아니라면 때가 이르면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정의와 공의가 회복된 이스라엘을 가리켜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라고 말합니다. 감히 이런 이름을 소망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이게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 욕망의 길을 걷다가 파멸에 이른 이스라엘은 ‘버림받은 자’, ‘버림받은 아내’라고 일컬어졌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이라 부르고, 그 땅은 ‘결혼한 여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파수꾼
그러나 사람들이 언제나 충만함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유혹의 시간이 다가오고, 과거의 시련과 아픔은 망각되곤 합니다. 또 다른 전락이 기다립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영혼의 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아시지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로마의 왕이나 장군들은 영예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자기들에게 죽음을 상기시키는 하인들을 둠으로써 자기 본분과 한계를 잊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게 지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소개하고 있는 파수꾼의 역할은 좀 다릅니다. 그에게 부여된 소명은 사람들을 혼곤한 영의 잠에서 깨우는 것이 아닙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주님께 늘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게으름을 피우신다는 말인가요?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의 속뜻은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께 언약을 상기시키는 일은 동시에 백성에게 언약을 따라 살 것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프랑스 리옹 미술관에서 만났던 그림 한 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루벤스(Pierre-Paul Rubens, 1577-1640)의 <그리스도의 진노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성 도미니크와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상당히 큰 그림인데 화면의 상단에는 죄악에 가득 찬 세상을 보고 진노하여 손에 갈대로 만든 채찍을 들고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몸에 두른 붉은 망토는 그분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주님의 왼편에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마치 그의 손을 잡으려는 듯이 다가서고 있는 성모의 모습이 보입니다. 성모의 옷은 푸른색이고 거기에는 영롱한 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을 나타냅니다. 오른편에는 근심스런 표정의 성부와 비둘기로 형상화된 성령이 있습니다. 화면의 하단에는 뱀이 휘감고 있는 지구본이 보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구본 위에 걸터앉은 도미니크 성인과 그 위에 손을 얹고 있는 프란체스코 성인입니다. 둘은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맨발에 누더기 차림입니다. 그들의 팔은 마치 내리치는 그리스도의 팔을 막으려는 듯 위로 치켜올려져 있습니다. 두 성인의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루벤스가 이 작품에 착수한 것은 1602년부터라고 합니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일으키는 격랑 속에서 유럽이 표류하고 있던 때입니다. 종교가 폭력의 뿌리가 되고 있던 시대, 루벤스는 그런 시대를 향해 도미니크와 프란체스코 두 성인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두 성인 모두 탁발 수도원 운동을 벌였던 이들입니다. 프란체스코는 '가난 부인'과 결혼한 사람이었고, 도미니크 역시 그러했습니다. 도미니크는 세상을 떠날 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형제들 간에 서로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 보화를 만들어 가라."

이런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기 위해 깨어 있는 영적인 파수꾼들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역할도 같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회복되는 세상의 꿈, 사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의 몫을 한껏 살아내는 세상의 꿈을 상기시키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 목표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손을 빌려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우리 삶을 걸고 살면 삶의 비애는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앞서 가신 길을 따라 가며 살아 있음의 기쁨을 누리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1월 20일 11시 42분 0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