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4. 사막에 강을 내겠다.
설교자 이범석
본문 사 43:16-21
설교일시 201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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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강을 내겠다.
사 43:16-21
(2019/04/07, 사순절 제5주)

“내가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냈다. 내가 병거와 말과 병력과 용사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쓰러뜨려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마치 꺼져 가는 등잔 심지같이 꺼버렸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들짐승들도 나를 공경할 것이다. 이리와 타조도 나를 찬양할 것이다. 내가 택한 내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 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내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크신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이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또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 담임 목사님과 샌디에고 교회 회중에게도 같은 은총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강원도 산불로 크나큰 피해를 입은 고성, 속초, 강릉, 동해, 인제 등지의 이재민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돌보심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재의 수요일 예배로 사순절을 시작한 것이 바로 얼마 전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사순절 묵상과 기도, 경건의 실천으로 지내고 계시는 여러분에게, 성령님께서 계속 지속할 힘을 공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의 의미를 곱씹는 절기입니다. 어둠이 짙고 깊은 만큼, 부활의 꿈을 더욱 키워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죽음과 생명을 묵상하다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나사로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서 좀 더 머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시니, 나사로는 이미 죽어 장례를 치른 뒤였습니다. 예수님을 마중 나온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주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말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건네기는커녕 생뚱맞게도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고 답변합니다. 원론적으로 본다면 훌륭한 답변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26)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되살리실 것을 예감조차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자신이 믿는다고 답변합니다. 이 또한 원론적으로 보자면 아주 훌륭한 답변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그녀가 현실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살며 냉랭한 현실의 경험치가 많이 쌓이다 보면, 마르다와 비슷한 태도를 갖게 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는 주님의 질문이 저의 마음을 날카롭게 파고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나의 이성을 뛰어 넘어 먼저 역사하고 계시는데도, 너무나 자주 제가 그걸 잊고 지내기 때문입니다.

* 바벨론 포로기
오늘 함께 들은 이사야서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잠깐 살펴보려 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패배당하고, 이후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패배당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궁은 불타 버렸습니다. 이들은 삶의 터전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를 당합니다. 이제 고향마저 잃은 신세가 됩니다. 이 시기를 바벨론 포로기라고 부릅니다.
조국 땅에서 강제로 옮겨져 이역만리 바벨론 땅에서 삶을 이어가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곱씹고 또 곱씹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유가 매우 명확하다고 결론 맺었습니다. 바로 자기들이 야웨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벌 받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자기들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복역의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이 시기 사람들의 신세를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41:14)라고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이들은 바벨론 제국의 누구에게나 짓밟힐 수 있는 벌레와 같이 무력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광야 같은 곳에서, “가련하고 빈궁한” 이들이 “물을 찾지 못하여 갈증으로” 혀가 타들어 가고 있었습니다.(41:17) 한 마디로 이들은 상해 버려 곧 꺾일 갈대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과오를 돌이켜 보며,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세대가 가고 두 세대가 지나도, ‘복역의 때’가 끝나지 않자, 죄책감과 송구한 마음은 점차 흐려지고, 도대체 언제까지 징벌의 때를 살아야 하나, 의구심이 짙어집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바벨론 제국이 자신들의 복역을 끝마쳐 줄 기미를 찾을 수 없고, 자신들의 힘으로 제국을 극복하고 귀향할 수 있는 방책은 더더욱 찾을 수 없었기에, 이들은 점점 더 깊은 절망에 빠져 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완전히 잊으셨는가, 버리셨는가, 라는 절망에 휩싸입니다. 예전에 유행했던 줄임말 중에 ‘이생망’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생을 마감하는 분들이 이렇게 말하여도 서글플 텐데, 주로 젊은이들이 한계 지워진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기를 보내고 있는 젊은 유대인들도 ‘이생망’의 절망감 속에 있었습니다.

* 제2 이사야와 출바벨론
이 처절한 절망 속에 나타난 한 무명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제2 이사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끝날 것 같지 않아서, 괴로워하며 삶의 희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는 이전의 심판 예언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선포를 합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40:1) 이제 ‘복역의 때’는 끝나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는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출현과 움직임을 명민하게 살펴본 사람입니다. 고레스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방의 표징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선지자는 멸망의 표징뿐 아니라 해방의 표징도 읽을 줄 아는 이입니다. 그 표징으로부터 과거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방향과 형태를 떠올리고,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그리 하시리라 믿고, 그 길을 따라 함께 나아가자고 독려하는 이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대언합니다.

“내가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냈다. ...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43:16,19)

그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현실 상황에 맞지 않는 희망의 상상이 황당하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니 바다에 어떻게 길을 낸답니까? 거센 물결을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겁니까. 광야와 사막에, 무슨 수로 길과 강을 냅니까. 이게 상징적 표현이라고요? 그렇다면 더욱 어이없는 것 아닙니까. 둘러보면 바벨론 제국에 의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매몰당해 있는데, 어쩌라는 겁니까. 이들 처지에 새 희망이 가당키나 한답니까.
현실 세력이 최종적이라고 믿고, 미래를 그 토대에서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고착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들은 손 안에 쥔 가장 작은 희망의 조각조차도, 이성, 언어, 인식론을 동원해 억눌러 버립니다.

제2 이사야는 위의 선포에서, 온 몸으로 겪고 있는 절망이 너무 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해방하시는 손길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과거의 한 사건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바로 그 사건. 그 공동체의 가장 뿌리 깊은 기억에 새겨진 사건. 하나님께 의지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제국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열 번의 시도와 실패 끝에 그들로부터 탈출한 사건. 홍해 바닷물이 둘로 갈라지고 그 사이에 난 길을 건넌 사건.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를 채우고 때때로 터져 나온 샘에서 목을 축이며, 황막한 광야 길을 건넌 사건. 하나님이 하신 그 사건 말입니다.
현실의 끔찍함과 미래 없음에 매몰당해, 시커멓게 죽어버린 마음들을 향해, 제2 이사야는 크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출애굽 사건의 새 버전을 바벨론에서 일으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미 시작된 새로운 출애굽, 곧 출바벨론의 사건을 보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압도적인 힘으로 “병거와 말과 병력과 용사들”을 쓰러뜨리실 겁니다.(17) 바다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실 겁니다. 하나님은 그 길에서 “목자와 같이 ... 어린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을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40:11) 인도하실 겁니다.
이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그 길 위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갈증을 해소하고, 상쾌한 마음과 발걸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갈 겁니다. 그 길에는 귀향하는 이들의 함성 소리와 웃음 소리가 가득할 겁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노랫소리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라.”(출15:21) 이 찬양이 다시 한번 그 길 위에 울려 퍼질 겁니다.

이스라엘 선조들이 분명히 경험했고 그 핏속에 대대로 흐르고 있던 출애굽의 기억이, 바벨론이라는 현실의 비루함 속에 가뭇해졌습니다. 마음 밑바닥에는 예루살렘, 그 그리운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꿈이 사무치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지만, 현실이 암담하니 그 바람을 꼬깃꼬깃 꾸겨 저 구석에 던져 버렸습니다. 싹 잊어버렸습니다. 이들은 ‘안 될 거야, 지금 내 처지를 보라고, 내 주변 상황을 살펴보라고, 절대 안 돼. 괜히 떠올려봤자, 나만 비참하고 서글퍼져, 그러니 잊자, 잊자, 잊자’ 했던 포로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표징이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과거로부터 그 놀라운 기억을 끌어 올리지 못했습니다.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이들을 향해, 제2 이사야는, 새롭게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라고, 큰 목소리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모든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미리암의 노래를 같이 부르자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구석에서라도 희망의 찬양 소리가 울릴 때, 절망으로 점철된 제국에 균열이 일어날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희망, 하나님의 꿈
가혹할 정도로 냉정한 현실 인식과 반복된 실패로 인한 절망의 경험 때문에, 저 구석으로 밀어둔 꿈과 상상이 우리에게도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 해 전 교회학교 어린이들과 꿈과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한 친구의 바람이 친구들로부터 많은 동의를 받았습니다. 집 밖의 모든 길과 학교, 학원 건물들을 모두 놀이동산으로 바꾸고 싶다는 상상이었습니다. 집 대문을 나서면, 롤러코스터와 바이킹 등등이 가득한 세상 말입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그 상상을 언젠가 꼭 이루기 바란다고 말해줬는데, 머리가 굵어진 그 친구가 그 상상을 아직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도 꼭 이뤄졌으면 하고 바라는 상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제 딸이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때에는, 여성이기 때문에 불안하고 부당한 일을 겪지 않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 녀석들은 땅으로도 바다로도 저 대륙의 끝까지 막힘없이 다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총부리 끝에서 빨주노초파남보 예쁜 폭죽이 터지면 좋겠습니다. 하늘이 아무리 푸르러도, 밤에 은하수가 제아무리 뚜렷하게 보여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 이외에 도대체 할 일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 아이들이 새 시대에서 활기차게 살아가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바닷길과 사막길을 내시는 꿈을 선포하시고, 일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해서는 어떤 꿈을 꾸시고 일하고 계실까요? 비슷한 꿈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병거와 말을 누르셨듯이, 이 땅에서도 모든 죽음의 세력들을 소멸시키길 원하십니다.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과 자연에 폭력을 가하고도 반성하기는커녕, 모른 척 아닌 척으로 거짓을 일삼으며, 공멸의 가속 페달을 밟는 이들의 삶을 뒤집어 놓기를 원하십니다. 갈증으로 허덕이는 포로민들에게 시원한 강물을 허락하셨듯이, 이 땅에서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소외된 모든 연약한 생명들에게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새 생명의 활력을 불어 넣길 원하십니다. 사막과 바다로 가로막힌 곳에, 따사로운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새 길을 내셨듯이, 이 땅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으려 세워진 담장을 허물어 버리고, 갈라지고 쪼개진 관계를 화해시키고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끊어진 한반도를 다시 잇는 평화의 다리가 건설되기를 원하십니다.

2500여 년 전 바벨론에서 낙담하며 사느라,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의 선포가 서먹하기까지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를 향한 주님의 꿈과 일하심이 생소하다면, 우리 기억의 사진첩을 꺼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붙잡으시고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셨던 주님과의 기억을 꺼내 열어 보고, 다시 한번 곁에 있는 이들의 손을 꼭 잡고 함께 일어서면 좋겠습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기에,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40:28~31)
성전 권력과 로마 제국이 아무리 강성해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꿈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의지를 완전히 믿기에, 모든 억압적인 사망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완성할 희망으로, 고난을 당하시면서 당신의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서두에서 말씀 드렸던, 나사로 사건의 맺음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의 기도를 올립니다. 무덤을 막은 돌이 옮겨지고, 마침내 죽었던 나사로가 일어났습니다. 이후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리아는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신 물음에 대한, 마르다와 마리아 나름의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세력을 파하시고, 생명력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꿈과 그것을 이뤄 나가실 주님의 능력을 확고하게 믿으며, 그 실현 과정에 자신들도 헌신하겠다며, 두 자매가 주님께 온몸으로 드리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도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현실 가운데 발목을 잡는 모든 부자유한 힘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빌3:12~14) 있다고 선언합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암울한 세태의 절망으로부터 일어나, 크신 하나님을 믿고,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판정해버린 하나님의 꿈, 참생명과 평화의 꿈을 함께 부여 잡고, 힘껏 달려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4월 07일 11시 03분 3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