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9.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맞서
설교자 김재흥
본문 사 58:6-12
설교일시 201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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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맞서
사 58:6-12
(2019/09/29, 창조절 5주)

여러분 모두에게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시원한 가을바람 같은 은혜와 파란 하늘 같은 새로움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링링과 타파, 연이은 태풍으로 큰 피해를 보고 망연자실해 있는 농어민과 이번 아프리카 돼지 열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축산 농가 위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암울한 현실
9월, 10월은 한국 개신교 교단별 총회가 열리는 달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가을은 긴장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각 총회가 또 어떤 충격적인 결정을 하게 될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각 총회에서 들려온 소식은 암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느 교단은 가톨릭을 이단으로 정죄해야 하느냐, 이교로 정의해야 하느냐를 두고 크게 논쟁을 벌였습니다. 한 회원은 가톨릭을 이단으로 정죄해야 하는 이유를 강변하면서 프란체스코 교황이 예수를 부인했다고 말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며 사실이 아닙니다. 또 장로교 통합 총회는 이미 불법으로 판명된 명성교회의 세습을 합법적으로 인정해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총회 수습전권위원장 목사가 연단에서 마이크를 잡고 발언했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무서운 것을 보았습니다. 흑암의 권세가 우리가 서로 싸우고 있는 동안에 어부지리 고사처럼 우리를 조개와 새처럼 집어 담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목사는 이 사태를 여기서 끝내야 한다며 일부 회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삼환 목사에게 마이크를 넘겼습니다. 김삼환 목사는 잘 봐달라는 부탁을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합동 측에서는 없는 법도 만들어서 사랑의 교회를 살리고 (오정현) 목사님을 살려주셨습니다. 잘 품어 주십시오.“ 이는 자신들의 불법을 합법화할 수 있는 불법을 저질러 달라는 청탁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통합 총회는 그 불법에 대한 청탁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한국 개신교회의 상황은 그들의 말 그대로 흑암의 권세가 가득합니다.

교계의 상황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도 어둡습니다. 한 달 이상 지속되고 있는 검찰과 법무부 장관의 대립은 한국 사회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기보다는 혼돈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불법을 저질렀다.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라는 주장이 담긴 뉴스가 하루에도 몇 건씩 매일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입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그 이야기입니다. 어느 뉴스를 보아도 그 이야기입니다. 어느 신문을 보아도 그 이야기입니다. 한일 갈등 문제, 북한 문제, 아프리카 돼지 열병 문제 등 직면한 과제가 산적해 있건만 그 어떤 것도 중심주제가 되고 있지 못합니다. 이제 형국은 검찰 총장이나 법무부 장관이나 어느 한 쪽이 물러나거나 양쪽이 물러나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 사회를 이루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뒤로 퇴보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과 이런 혼란과 혼동의 시간이 앞으로도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 사회가 이번 몸살을 통해서 진정한 개혁과 올바른 변화를 이루어 내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의 자연환경에 대한 전망도 그리 밝지 않습니다. 지난 주간 뉴욕에서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가 열렸습니다. 각국의 정상들이 모여 자꾸 기온이 올라가고 있는 지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습니다. 지구의 온도는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1900년대 초반에 비해 1.1도 올랐습니다. 기온이 올라가며 빙하가 녹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인 22일에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서는 빙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해발고도 2,700미터에 있던 피졸 빙하, 여름에도 녹지 않고 만년설로 남아 있던 빙하가 완전히 녹아 없어진 것입니다. 극지방의 빙하들도 녹고 있습니다.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섬나라 투발루는 국토가 바다에 잠기면서 국민들이 순차적으로 뉴질랜드로 이주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 홋카이도의 하나키타 섬도 물에 완전히 잠겨 사라졌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을 잃고 낯선 땅으로 이주해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머지않아 우리의 모습,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유엔 정상 회의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석탄 발전을 줄일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온실가스를 다량으로 배출하고 있는 나라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배출량도 해마다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 정치 사회적 환경, 종교 문화적 환경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의 상태를 창세기 1:2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은 창조 이전의 상태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제3이사야
오늘의 성경본문은 유대인이 70년 동안의 바빌론 포로기를 마치고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소위 귀환기라고 부르는 시대가 배경입니다. 이때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했던 예언자는 제3이사야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이사야서 56장에서 66장까지를 그의 기록으로 보고 있습니다. 메세지의 내용과 포로기 이후 귀환기의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주전 8세기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이사야는 제1이사야, 예루살렘 멸망 이후 포로기에 바빌론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는 제2이사야입니다. 제2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고향땅에 돌아가도록 광야에 길을 만들고 사막에 강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당시 바빌론에 살던 이들은 대부분 포로기 2세대였습니다. 포로기 1세대는 거의 바빌론에서 죽었습니다.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인 예루살렘으로 나아간 것은 포로 2세대였습니다.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고향땅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오랜 노예살이에 지치고 절망하고 있던 유대인에게 자유와 해방과 풍요와 안식에 대한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온 단어들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6절에 부당한 결박, 멍에, 압제, 7절에 굶주림, 헐벗음, 8절에 상처, 9절에 폭력, 폭언, 10절에 어둠, 캄캄한 밤, 11절에 메마름, 12절에 해묵은 폐허, 갈라진 벽, 길바닥. 이 단어들로 설명되고 있는 땅은 어딥니까? 노예살이하던 바빌론 땅입니까? 약속의 땅 예루살렘입니까? 바빌론이 아닙니다. 자유와 해방과 풍요와 안식에 대한 약속이 있던 땅, 가나안 땅, 예루살렘입니다. 나중에 스룹바벨이 나서서 무너진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했지만 예전의 성전과 비교했을 때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전 성전을 기억하는 포로기1세대들은 그 차이가 서러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나서서 성벽을 재건하긴 했지만 중간에 주변 나라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훼방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 중에도 부자들은 동포 유대인의 재산을 착취하고 심지어 노예로 삼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노예살이의 땅 바빌론을 떠나 자유와 해방의 땅 예루살렘을 찾아왔지만 그곳에서마저 노예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동족 유대 사람 밑에서. 귀환자들에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땅이 아니라 또 하나의 바빌론, 또 하나의 애굽이었습니다. 귀환한 사람들이 느꼈을 절망과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느껴지십니까?

그런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가득한 중에도 유대인들은 나름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아니 혼돈되고 공허하고 어둠이 가득했기에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더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금식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습관 내지는 전통이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이사야는 그들의 신앙생활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형식은 있었지만 신앙의 본질인 진정성과 일상과의 일치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자기는 금식하면서 일꾼들에게는 중한 노동을 시켰습니다. 또 금식은 했지만 다른 육적인 향락은 계속 즐겼습니다. 때로는 금식하면서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그런 금식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그 뒤에 소개되는 내용을 보았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읽는 것이 더 좋을듯합니다. 하나의 종교적 행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사람,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사람,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사람,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계속 이어가며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 시대의 어둠을 물리칠 빛과 같은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 시대의 목마름을 해결할 샘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야말로 갈라진 벽을 고치고 길바닥 같은 곳을 고쳐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이사야는 지금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누리는 자유와 해방과 풍요와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땅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는 땅이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하며 기도한다고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부당한 결박과 압제에 저항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불의에 저항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약자의 고통에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비록 바빌론과 애굽과 같은 곳에 살더라도 그곳을 약속의 땅으로 바꾸어 가는 사람입니다.

어디서 나온 마음일까?
성경을 펼쳐 말씀을 거듭거듭 읽어가다 마음이 찡해졌습니다. 제3이사야 그도 그 시대에 가득했던 절망,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마음이 힘들었을 텐데, 그런 와중에 어떻게 그런 마음을 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모두가 자기 코가 석 자요, 골육의 어려움을 보고도 얼굴을 돌리는 게 당연하던 때에, 부당하게 결박당하고 멍에 매어지고 압제당하는 이의 사슬을 끊어주어야 한다는 생각,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벗어주어야 한다는 생각, 불쌍한 사람을 자기 집으로 들여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것이 그 어떤 종교적 행사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 귀한 마음은 어디서 나온 마음일까요?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는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는 사실 예수님이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3이사야의 선포였습니다. 몇 글자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사야서 61장 1,2절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중요한 마당에 많은 말씀 중 이 말씀을 선포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하실 일이 이사야가 선포한 것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자초하는 인간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같은 일을 합니다. 혼돈 속에 질서를 만들고 공허 속에 의미를 만들고 어둠 속에 빛을 만듭니다. 그것은 일종의 재창조입니다. 그들은 그저 막연히 어디선가 자유와 해방과 평화와 안식이 저절로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땅이 저절로 약속의 땅이 되길 기다리지 않습니다. 나부터 불의에 저항하고 약자의 고통에 참여하며 지금 살고 있는 바빌론의 땅을 약속의 땅으로 재창조해 나갑니다.

그레타 툰베리. 16살 소녀. 그 무섭다는 중2 나이인 15살에 환경운동가가 된 스웨덴 소녀입니다. 여름 평균 기온이 17도에서 20도 사이인 스웨덴이 2018년 여름에 34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이후 툰베리는 매주 금요일 학교에 가지 않고 스웨덴 국회 앞에 가서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법을 입법하라는 1인 시위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당신의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아이들의 눈앞에 있는 미래를 빼앗고 있다”라고 외쳤습니다. 150여 개 나라의 젊은이들이 이에 공감했고 지난달에는 세계 곳곳에서 400만 명이 거리와 광장에 나와 ‘국제사회는 기후문제를 해결하라‘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툰베리는 지난주 뉴욕에서 열렸던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 참석해서 연설을 했습니다. 툰베리는 분노와 슬픔이 배어든 목소리로 연설했습니다. “여러분은 헛된 말로 저의 꿈과 어린 시절을 빼앗았습니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어요.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멸종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돈과 끝없는 경제 성장의 신화에 대한 것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제 눈에는 툰베리 위에 주님의 영이 임한 듯 보였습니다. 툰베리는 인간의 탐욕으로 죽어가고 있는 생명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짐짓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리고 돈과 경제성장에 눈이 멀어 지구의 파국을 못 보고 있는 세계 정상들의 부정의함을 꾸짖었습니다. 툰베리는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십 대 연사가 아닙니다. 툰베리는 미국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서부터 2주간에 걸쳐 요트를 타고 미국에 갔습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바람을 이용해 항해하는 배를 타고 간 이유는 비행기의 항공유가 대기를 크게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툰베리는 죽을 때까지 새 옷을 사 입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과소비 문화가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묵하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칠 것이라고 하셨는데, 툰베리는 작지만 아주 단단한 돌이 되어 우리의 가슴에 날아와 박혔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맞서
우리 주변에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은 힘과 권력을 가지고 이 사회의 혼돈을 만들어 냅니다. 혼돈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 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혼돈 속에서 자리가 보존되고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리와 비진리를 착종시켜 만든 혼란은 이내 사회의 중요한 가치들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힘겹게 지켜온 가치들을 일거에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그런 무너짐은 금방 어둠이 되어 이 사회 곳곳에 내려앉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십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일어나십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혼돈을 만들어 낸 자가 버린 모퉁이 돌 같은 이들 속에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셔서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늘 그렇게 일해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나와 홍해 앞에 섰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때 홍해가 갈라졌는데 모세가 ‘홍해야 갈라져라’ 외쳤을 때 갈라진 것이 아니었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듣고 멀뚱히 서 있기만 했는데 한 소녀가 모세의 말을 듣고 홍해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갈라졌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품고 약속의 땅을 향한 한 발을 내딛는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곳곳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공의와 정의가 무너지면서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절망하거나 주눅 들거나 무서워하거나 지쳐 뒤로 물러서지 맙시다. 맞섭시다. 우리가 그에 맞설 때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맞서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실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청파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9월 29일 11시 55분 0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