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9. 용기를 내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31:19-24
설교일시 201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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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내라
시31:19-24
(2019/12/08, 대림절 제2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주시려고 주님께서 마련해 두신 복이 어찌 그리도 큰지요? 주님께서는 주님께로 피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십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복을 베푸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주님의 날개 그늘에 숨기시어 거짓말을 지어 헐뜯는 무리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고, 그들을 안전한 곳에 감추시어 말다툼하는 자들에게서 건져 주셨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포위당했을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푸셨기에,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포위되었을 그 때, 나는 놀란 나머지 "내가 이제 주님의 눈 밖에 났구나" 생각하며 좌절도 했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는, 내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너희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서 신실한 사람은 지켜 주시나, 거만한 사람은 가차없이 벌하신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아, 힘을 내어라. 용기를 내어라.]

∙인생은 기다림
지금도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이 자리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동안의 미국 보스턴에서 열렸던 리뉴 집회에 잘 다녀왔습니다. 젊은이들의 뜨겁고 진지한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점점 살벌한 곳으로 변해가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산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저 멀리 보이는 불빛 하나에 희망을 품듯, 어둠이 지극한 세상에서 자기를 바쳐 빛을 발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참 고맙고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빛이 비록 미약해 보일지 몰라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믿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따지고 보면 삶이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어쩌면 삶 자체가 기다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다림의 표정은 절박함, 두려움, 설렘, 권태…등 실로 다양합니다. 대홍수가 끝나고 물이 빠졌는지를 알아보려고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내놓고 기다리는 노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우여곡절 끝에 베냐민을 데리고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간 형들이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요셉을 기다릴 때의 심정은 초조함 혹은 불안함이었을 겁니다(창43:25).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는 백성들은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을 겁니다(출24:14). 욥은 지속적인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의 상황을 ‘저물기를 기다리는 종‘(욥7:2)의 심정에 빗대 말했습니다. 부정의한 현실에 질렸던 하박국은 망대 위에 올라가서 주님께서 뭐라 답하실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습니다(합2:1). 유한한 인생의 슬픔과 답답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온 집안 식구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도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행10:24).

기다림의 얼굴은 이렇듯 다양합니다.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다립니다. 대림절기는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주님을 기억하는 절기이지만,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 천 년 전에 이미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께 ‘오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오신 주님은 다시 오실 주님이기도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그 주님이 우리 삶을 완성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는 주님을 기다린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도울 수 없으며,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임재, 당신의 진리, 당신이 가지신 생명의 풍성함이 우리에게 내려오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지혜, 당신의 정의, 당신의 선, 당신의 자비에 호소하며, 당신이 직접 오셔서 우리의 유한성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우리의 가난을 부요함으로, 우리의 시간을 영원으로 바꿔 주시기를 간구합니다.“(‘칼 라너의 기도‘, 12월 중에 손성현의 번역으로 출간 예정)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총만이 유한성의 장벽에 갇힌 우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의 풍성함이 우리 속에 흘러들 때, 비로소 우리는 영원에 잇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대림절은 바로 그런 소망을 가슴에 새기는 기간이어야 합니다.

∙무정 세월
오늘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로 인도하는 시인은 인생살이 가운데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어려움을 겪어낸 사람입니다. 시편 31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다양한 은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하여 숨을 수 있는 바위’, ‘견고한 요새’, ‘나의 피난처’.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기에 우리의 경험을 이런 은유 속에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위, 요새, 피난처라고 고백하는 이들의 삶이 평탄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쓸쓸함과 불안함 그리고 두려움이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기가 막힌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원수들이 몰래 쳐 놓은 그물이 그를 위험에 빠뜨리고, 친구들조차 그를 비난하고 마치 더러운 것을 만난 것처럼 혐오스러워 합니다.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조차 그를 깨진 그릇 취급합니다. 사회적 연결망이 다 끊어지고 그는 고독한 새처럼 외롭습니다. 시인은 울다 지쳐서 시력조차 잃고 몸과 마음의 활력을 잃었다고 고백합니다. 참담한 상황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사진이 떠오릅니다. 학교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엄마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어린이보호구역 교통사고 예방을 위한 관련법, 소위 말하는 ‘민식이법’ 제정을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아 달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정한 사회는 피해를 당한 이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기보다는 그들의 존재를 불편해하고,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립니다.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당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시인의 상황도 이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만한 자세로, 경멸하는 태도로, 의로운 사람을 거슬러서 함부로 말하는 거짓말쟁이들의 입을 막아 주십시오”(시31:18)라고 기도합니다. 그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이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들강변‘이라는 노래를 아시지요? 노들 강변은 버드나무가 늘어진 강변을 연상시키지만 실은 노량 나루터를 일컫는 말이라 합니다. 나루터는 온갖 인생사가 뒤섞이는 곳이니 애환이 많은 곳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마다/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볼까/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흐르는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휘휘 늘어진 가지마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동여 매볼까 한다는 노랫말이 참 처연합니다. 달관인가요, 체념인가요? 그리스 사람들은 운명은 바꿀 수 없다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잘못된 현실은 받아들일 게 아니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기에 기존 질서에 의해 불온의 낙인이 찍히곤 합니다. 그 낙인은 어쩌면 훈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마5:11)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픔은 아픔이고, 두려움은 두려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아픔과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현실에 굴종하지 않습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바름을 지향합니다.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비장합니다. 손에 물을 묻히지 않으려는 게 문제입니다. 믿음의 길은 외로움 속에서도 걸어야 할 길이고, 해가 저무는 것처럼 보여도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렇게 걸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시인은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라고 노래합니다. 우리의 시린 손을 잡아줄 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오늘의 시인에게 마주 잡을 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바위처럼 든든히 지켜주시는 하나님, 언제라도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그는 흔들림 속에서도 망설임 없이 의의 길을 걸어갑니다. 일반적으로 ‘고난’과 ‘고통‘은 우리 시야를 좁아지게 만듭니다. 당면한 문제에 사로잡혀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고난 혹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시선을 들어 올려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때 고난은 더 큰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이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7, 16)을 깊이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영혼의 아픔을 잘 아십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것을 깨달았기에 시인은 “주님의 손에 나의 생명을 맡깁니다”(5), “나는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6)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을 알기에 시인은 결연한 의지를 담아 고백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14)

신앙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신뢰하는 것이 신앙이고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 당신의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이해할 수 있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심 앞에 그저 엎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복을 베푸시고 크신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십니다. ‘주님의 날개 그늘‘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새끼들을 품에 안는 어미닭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것은 ‘하나님 현존의 비밀스런 장소’에 숨기신다는 뜻을 이미지로 나타낸 것입니다. ‘장소’라는 말이 또 문제입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 현존하시고 우리를 지키신다는 확신을 구상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주님을 거처로 삼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감리교회의 ‘아침을 여는 기도’에는 ‘우리를 주님의 거처로 삼으소서‘라는 간구가 나옵니다. 우리를 통해 주님의 현존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주님을 거처로 삼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 우리는 비로소 무기력과 우울을 떨쳐버리고 일어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빛을 뿌리는 사람들
하나님은 거짓말을 지어 헐뜯는 무리들로부터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지켜주십니다. 헐뜯는 사람은 여전히 헐뜯겠지만 경외하는 이들은 그 말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악플에 시달리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평가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부정적인 평가일수록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이 떳떳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잇댄 채 살고 있다면 그런 평가에 연연할 필요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겪은 온갖 시련 이야기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고전4:12-13)

세상은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하는 사람, 세상의 쓰레기 취급을 받으면서도 당당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도 그런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갈 길이 멀지만 지레 포기하지 마십시오. 온갖 비방과 혐오와 협잡에 시달리면서도 시인이 끝내 자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쩨다카(의로우신)의 하나님, 헤세드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런 확신 끝에 사람들에게 주님을 사랑하라고 권합니다. 맡기신 일을 이룰 때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길이 신뢰하고 사랑할 때, 우리를 에워싸고 있던 음습한 어둠과 절망은 스러질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아, 힘을 내어라. 용기를 내어라”(24). 주님의 임재, 주님의 진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기다린다면 현실이 어떠하든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를 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야 합니다. 윤동주의 시 ‘눈 감고 간다’는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어둔 밤이지만 눈을 감고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고 권고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주변에 빛을 뿌리며 살아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와 다정한 말, 친절한 손길을 건네십시오. 특히 홀로 버려진 듯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한 걸음이라도 다가서십시오. 지금 울고 있는 이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의 바른 자세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 주님의 마음과 더 깊이 접속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12월 08일 12시 21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