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0. 광야로 나간 까닭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11:2-11
설교일시 2019-12-15
오디오파일 s20191215.mp3 [1164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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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로 나간 까닭
마11:2-11
(2019/12/15, 대림절 제3주)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영혼의 죽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초에 세 번째 불이 밝혀졌습니다. 기다림과 소망, 회개와 평화, 그리고 사랑과 나눔의 기쁨이 빛으로 형상화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그런 불이 밝혀지기를 빕니다. 우리가 대림절에 꼭 기억해야 하는 사람 중 하나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여겼던 사람, 자기의 부족함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조금의 유보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인정했던 사람이기에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존경받고 있습니다.

들 사람 요한은 오랜 식민지 생활에 찌들어 그들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까맣게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었던 동족들의 영혼을 죽비처럼 내리쳤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쇠북소리처럼 쟁쟁하게 울리는 그 야인의 소리에 많은 이들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마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3:5-6)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라고 번역된 ‘hamartia‘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다’ 혹은 ‘생각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구체적인 죄 하나하나를 고백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을 떠나 살아온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참회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 앞에 나온 이들 가운데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유대교 변혁 운동의 대표적인 두 분파 사람들까지 요한에게 나온 것을 보면 그가 유대 사회에 던진 파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보고도 사자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매우 신랄한 어조입니다. 요한은 백성들로부터 높임을 받는 일에 익숙했던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릅니다. 사악하고 교활하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바리새파’, ‘사두개파’라는 자부심에 가득 차서 다른 이들을 은근히 낮춰보던 그들의 허위의식을 사정없이 폭로한 것입니다. 제 욕심껏 살면서 거룩함의 의상까지 갖춰 입으려던 그들의 실상을 요한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알량한 자부심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 엄중한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명분과 실재가 다른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에 합당한 삶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 다른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 다른 이를 복되게 하기 위해 자기 특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광야에 서 있네
그런데 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줄곧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세례자 요한처럼 죽비를 들어 사람들의 느른한 일상을 뒤흔드는 예언자가 드물다는 생각과 아울러, 그런 소리가 설사 들린다 해도 그 소리에 반응하여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루틴을 깨뜨리기 싫어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를 수없이 대며 삽니다. 사람들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 하늘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고난이 주는 유익도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는 망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암담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시119:71)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인생의 광야를 지나는 분들이 계십니까? 올 봄에 소개한 적이 있는 ‘광야에 서 있네’(장진숙 글, 곡)라는 찬양 가사에 많은 이들이 공감을 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질문하는 용기
광야의 사람 세례자 요한은 헤롯이 사해 동쪽 산언덕에 만든 마케루스 (Machaerus) 요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지 못합니다. 가슴에는 여전히 불이 일고 있으나 그 불이 옮겨 붙을 가슴이 주변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그의 새로운 광야였습니다. 그는 권력자의 비위를 건드렸다가 죽음의 위기에 내몰렸습니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의 선포와 사역이 중단되는 것을 그는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초조함이 스멀스멀 그의 가슴을 파고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제자 둘을 예수님께 보내 묻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11:3)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일찍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자기는 그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의문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이 자기의 길과 사뭇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면서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라고 말했고, 오실 주님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마3:10, 12)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메시야는 죄로 얼룩진 세상을 가차없이 심판하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은 요한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소외된 이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요한이 태우는 불이었다면 예수님은 따뜻하게 덥혀주는 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생각과 편견에 따라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주님께 묻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의 길
요한의 그 물음을 들으신 주님의 대답은 우리의 예상을 빗나갑니다. ‘맞다’ 혹은 ‘아니다’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다만 당신이 계신 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가리켜 보이셨습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마11:4-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위로 당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더불어 벌어지는 생명 회복의 사건을 가리키실 뿐입니다. 사람을 치유하여 온전케 하고, 자기 존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주님은 은혜의 해, 곧 희년의 구현이십니다. 주님은 세상의 슬픔과 연약함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셨습니다. 고난 받는 종의 노래에 나오듯 주님은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습니다(사53:4). 그에게는 당신과 무관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외부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꾸짖고, 매섭게 죽비를 내려치는 스승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상한 자들의 상처와 슬픔과 연약함을 부둥켜안고, 그 속에서 빛을 창조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 가없는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누구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침묵>의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死海의 호반>이라는 책에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빌라도가 묻고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그러면 너는 저 의원들의 말대로 민중을 선동했는가?” “나는 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픈 인생을 가로질러…그들을 사랑하려고 했을 뿐이오.” “황제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고 말했는가?” “황제보다도, 예루살렘보다도, 로마보다도 오래 오래 계속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 것이오.” “무엇이 로마보다 오래오래 지속되느냐?” “그 사람들의 인생에 내가 가 닿은 흔적이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가로질러 남겨놓은 흔적,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오.”(엔도 슈사꾸, <死海의 호반>, 박소연 옮김, 청노루출판사, 1988, p.185-6)

엔도의 또 다른 책인 <깊은 강>에서 오오츠는 예수라는 이름 듣기를 꺼리는 나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루세 씨는 일본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도망가고 싶겠지요. 가능하면 예수라는 이름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사랑이라는 말이 낡아빠진 느낌이 든다면 ‘생명의 따스함’, 그렇게 불러 주세요“(<깊은 강>, 이성순 옮김, 고려원, 1994, p.188)

물론 예수님이 그저 말랑말랑한 분이었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불의를 꾸짖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여 거칠지는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의 말미에서 주님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11:28) 이르셨습니다. 그 사랑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큰 자와 작은 자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후에 주님은 사람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마11:7, 9).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무슨 뜻일까요? ‘크다’와 ‘작다’는 표현 때문에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오해하곤 합니다.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공간적인 지각이 좀 필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옛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질서로 이행하는 지점에 서 있는 분입니다. 길 닦는 사람인 그의 역할이 끝난 지점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구원의 질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세례자 요한을 폄하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로운 질서에 속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면 그만입니다. 중뿔나게 우리와 남을 구분하거나 우월감을 느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욕망의 벌판에서 허덕이며 사는 우리들도 가끔은 광야에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나른한 정신을 후려치는 말씀과 만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못난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따뜻하게 감싸 안으시는 주님의 사랑과 더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알몸으로 오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실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12월 15일 12시 28분 0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