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2. 누구를 섬길 것인가
설교자 김기석
본문 수 24:14-18
설교일시 201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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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섬길 것인가
수24:14-18
(2019/12/29, 성탄 후 제1주)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당신들은 이제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섬기십시오.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백성들이 대답하였다. “주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은 우리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을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 사람까지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할아버지의 천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이 큽니다. 마지막은 언제나 우리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값없이 받은 시간이라는 선물을 잘 활용하며 살아왔는지요? 시간을 타고 살지 못하고 시간에 떠밀리며 살아온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엄벙덤벙, 갈팡질팡, 가리사니 없이 걸어온 삶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52주 동안 우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고, 어두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히며 살려고 애썼으며, 냉랭한 세상을 조금은 따스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진력을 다했습니다. 더 성심껏 하지 못했다는 자책은 있지만 그래도 지향을 잃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출애굽 공동체를 이끌었던 여호수아도 마침내 자기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갖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출애굽 공동체를 가나안에 정착시키라는 역사적 소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그는 이제 공적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자각하고는 모든 지파의 장로들과 우두머리들, 재판관들과 공직자들을 세겜에 불러 모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이끄셨는지를 주마간산 격으로 요약합니다. 유프라테스 강 저편에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출애굽의 과정, 그리고 가나안 정착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지. 모두 다 아는 이야기를 일부러 반복한 것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재천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공동체란 공동의 기억을 간직한 이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은 지금 가나안 정착 이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함께 겪었던 시련과 아픔, 그리고 그 속에서 지속되었던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떠올리며 자기들이 운명 공동체임을 재확인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스타카토식으로 전개되기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과 나눌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의 삶이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독일 동화작가인 유타 바우어의 <할아버지의 천사>라는 책을 좋아합니다. 이 책은 병상에 누워있는 할아버지가 찾아온 손자에게 들려주는 자기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아침마다 큰 광장을 가로질러 학교에 갔던 유년 시절, 버스에 치일 뻔했던 기억,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도 없었던 아이가 가끔 맞닥뜨려야 했던 위험한 순간들, 성인이 되었을 때 득세한 나치 치하에서 근근이 버텨야 했던 시간, 전쟁과 배고픔, 고된 노동,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나중에는 손자까지 생긴 생을 회고한 후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정말 운이 좋았단다.” 참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작가인 유타 바우어가 그린 삽화는 이야기 속에 담기지 않은 숨은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걸어온 삶의 모든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가 그를 든든히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유타 바우어, <할아버지의 천사>, 유혜자 옮김, 비룡소, 2002년). 하나님의 큰 손이 우리를 지금까지 지켜왔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즉각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늘 시간이 좀 흐르고 지난 삶을 돌아볼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이끄셨음을 깨닫습니다. 우린 그저 하나님의 옷자락을 볼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정확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의 대표들에게 그 은혜를 상기시킨 후에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조상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잘 압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출20:3) ‘내 앞에서’는 ‘나 밖에는‘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고대인들은 다신을 섬겼습니다. 그 신들은 각각 주재하는 영역과 주특기가 있었습니다. 그 신들은 신자들에게 도덕적 삶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 자신이 비윤리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 신들은 대개 기존 질서를 보존하는 데 동원되곤 했습니다. 신들은 기득권 편을 들 때가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 억압과 착취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던 사람들의 살 권리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역사 속에 심어진 하나님 통치의 모델이 되어야 했습니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이런 지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지 않습니까? 어느 신학자는 ‘사람은 삶을 위한 도구를 바꾸는 순간 신까지도 바꾼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적확한 말입니다. 삶이 편안해지고 가진 것이 많아지면 삶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기 마련이고, 그것은 결국 다른 신을 섬기는 일로 귀착되게 마련입니다. 여호수아가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정착생활을 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할 것과 그 분을 성실하게 섬길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사실 조금 불편한 게 사실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살지 못하고 남 좋을 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변질된 번영의 복음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담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 불편한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번역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들의 권력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기독교를 싸구려로 변질시키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인생은 선택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입니다. 갈림길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망설입니다. 어느 것이 더 옳은 길인지, 더 나은 길인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선택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살다보면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자책할 것 없습니다. 붓글씨를 쓰는 이들은 한 글자의 획이 잘못 되면 다른 글자를 통해 균형을 잡는다고 합니다. 한 행이 잘못 되면 다른 행으로 커버하기도 합니다. 사는 것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지향입니다. 작고 사소한 잘못은 저질러도 괜찮지만 삶의 지향을 잘못 잡으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명한 푯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 목표가 흔들리면 안 됩니다.

주일무적主一無適, 성리학에서 마음을 한 곳에 모으고 다른 데 한눈 팔지 않는 ‘경敬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주님을 우리 주인으로 모셨으면 다른 것들에 마음을 주면 안 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수24:15). 그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단호하게 밝힙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이러한 결단이 우리를 지켜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때로 패배할 수는 있지만 구차하게 굴복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비인간적인 수용소에서의 삶을 인류 앞에 증언했던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가 떠오릅니다. 그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에서 수용소는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증언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슈타인라우프라는 동료가 해준 말이 그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년, p.58)

믿음으로 산다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 세상이 아무리 냉혹해도 따뜻한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 세상이 약육강식의 전장으로 변해도 약자들의 좋은 이웃이 되려고 작정하는 것 말입니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이라는 여호수아의 고백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한 사람이 건너면
여호수아의 단호한 결심을 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은 자기들도 “주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은 우리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수24:16)라고 화답합니다. 나쁜 습관도 전염되지만 좋은 습관도 전염되는 법입니다. 한 사람이 건너면 다른 사람도 건너게 되어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본 광경이 떠오릅니다. 초원을 가로지르던 누 떼는 악어가 득시글거리는 강에 이르면 선뜻 뛰어들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 누 한 마리가 강으로 몸을 날리면 다른 누 떼들도 일제히 강으로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헤엄을 칩니다. 몇 마리는 결국 희생되고 맙니다. 하지만 악어가 두려워 강을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다면 누 떼는 결국 다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삶이란 이렇게 엄중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아스라한 장대 끝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것이 바로 신앙의 용기입니다. 법궤를 어깨에 멘 제사장들은 넘실거리는 홍해와 요단강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순간 물이 길을 내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가기 위해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여호수아가 확고한 결의를 밝히자 다른 이들도 그 결심에 동참했습니다.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앞서 여호수아가 들려주었던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자기들의 입으로 재진술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순간 그 기억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돌아보며 그 은총의 신비를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다른 신은 옆에 있지도 않았다”(신32:11-12).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살았으니 이제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도 다짐해야 합니다. 다른 신들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겠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접속시키고, 그 마음에 따라 우리 마음을 조율하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새 날을 앞에 둔 우리의 결심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삶이 유쾌하고 건강하게 유지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12월 29일 11시 14분 5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