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5. 사랑안에서 연결될 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엡 4:13-16
설교일시 202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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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서 연결될 때
엡4:13-16
(2020/11/08, 창조절 제10주)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연결의 신비
자비로우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온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결과가 어느 정도 결정된 것 같긴 합니다만 미국 사회의 혼란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습니다. 미국 선거 제도가 우리와 많이 달라서 깊이 이해하긴 어렵지만 미국 사회가 심각할 정도로 분열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에 자꾸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 한반도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롭게 마무리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보다는 관심이 조금 덜할지 몰라도 개그우먼인 박지선 씨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충격과 아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를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더군요. 고등학생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피부 질환이 그를 몹시도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너무나 곤고하게 사시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 꽤 많습니다. 젊은 자살자들도 늘고 있고, 노년 자살자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삶이 그만큼 팍팍해졌다는 말일 겁니다. 극심한 고통, 절망, 외로움, 두려움, 상실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음을 선택한 이들에게 세상은 지옥처럼 무서운 곳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해 전 김대근 교우가 들려준 사회복지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서 제 마음에 크게 와 닿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노숙자로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사회적 연결망이 거의 다 끊긴 상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적 어려움 혹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가까웠던 이들과의 만남이 뜸해지고, 결국 고립 속에 방치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삶의 주변부로 내몰리다보면 자꾸 거칠어지기 쉽고, 자기를 존엄한 존재로 여기기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혹은 소외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 절실합니다. 이런 생각에 골똘했기 때문일까요? 지금까지 무심히 보아오던 성경 구절이 유독 깊이 다가왔습니다. 출애굽기 25장과 26장에 나오는 성막과 등잔대 이야기는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자꾸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어놓아라”, “연결시켜라”가 그것입니다. 등잔대의 세부 모양이 하나하나 지시되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성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견강부회일 수도 있지만 이게 제게는 범상치 않게 들립니다. 신앙이란 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의 멀어진 관계를 잇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도는 다리 놓는 사람, 혹은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입니다. 여전히 현장 예배에 동참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세계 각지에 흩어진 이들이 영상 예배를 통해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저곳 어딘가에 우리와 한 마음 한 뜻으로 연결된 이들이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얼굴을 맞대고 다정한 말을 주고받을 날을 기대하지만, 당분간 이렇게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꿈
교회의 모든 실천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꿈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엡1:10)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온 세상을 통일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다는 말은 세속적인 통치권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모든 행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장 연약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셨고, 병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정결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규정된 이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불길하다 여기지 않고 그들의 존엄을 회복시키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배고픈 이들의 시린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스스로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다른 이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특권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착취와 억압을 통해 자기 권리를 확보하려는 권력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배우지 못했다 하여 멸시당하지 않고, 가진 것 없다 하여 다른 이들의 쾌락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척박한 역사의 대지 위에 그 마음의 씨를 뿌리고 가꾸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원의 교리를 내세워 미움과 차별을 당연시하고, 자기들만이 구원을 독점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거대한 착각입니다. 스스로 불법을 행하면서도 입으로 ‘주님, 주님’ 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뭐라 하십니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7:23) 남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고 나서면서도 정작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도된 영혼들입니다.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는(엡4:14) 사람들이 가엾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신앙은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몰상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성을 주신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사리를 분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성은 뒤로 미루고 특별한 계시와 깨달음에만 집착할 때 광신이 시작됩니다. 광신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의 토대를 허무는 자들입니다.

정치가 잘못된 종교와 결합될 때 사회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특정한 정치인이나 종교인들을 그저 좋아하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문제는 자기가 지지하는 이들을 우상화하는 경우입니다. 그도 실수할 수 있고, 잘못도 저지르는 한갓 인간일 뿐입니다. 무오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종교인을 비판하면 못 견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현종 선생님은 ‘우상화는 죽음’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저 좋아하고 그저/사랑하고 사뭇/찬탄은 하리로되/神格은 우습지.“(<우상화는 죽음이니> 중에서) 시인은 “사람이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든/하나밖에 없으면 말할 나위없이/전면적인 죽음이니─“라고 노래합니다. 누군가를 우상화하는 순간 우리 몸과 마음이 경직되게 마련이고, 경직은 죽음에 가깝습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부드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기에 품지 못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단어 ‘텔레이오스(teleios)‘는 목적, 영원, 종결을 뜻하는 헬라어 ‘텔로스’(telos)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목적론(teleology)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주팔자의 영향 아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잊고 사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겠습니다.

톨스토이도 역시 이 문제로 깊이 고심했던 것 같습니다. <세 가지 질문>이라는 글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알고 싶어하는 한 왕을 등장시킵니다. 답은 여러분 대개 아는 바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그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삶을 이렇게 단순화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됩니다.

온전한 사람은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됩니다. 저는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로부터 인간됨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가 <누가 사람이냐>(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라는 책에서 한 말 몇 마디를 들어보십시오.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고 반응하고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시도하고 결정하고 도전하는 것이다.“(43쪽)
“사람은 누군가의 동료가 됨으로써, 남들을 보살핌으로써, 성숙한다. 그는 ‘이웃 사람의 짐을 함께 짐으로써’ 자기의 실존을 전개시켜 나간다.“(47쪽)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57-58쪽)

저는 이 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요약으로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이웃들에게 자기를 선물로 주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사람의 길이요,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아닐까요? 충만함을 뜻하는 ‘프렐로마(pleroma)’는 ‘가득 참’ ‘성취’ ‘풍성함’ 등의 뜻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바울 사도의 경우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에너지’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속된 사람은 자아의 틀을 깨고 나와 고난 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기를 기뻐하게 됩니다. 여기서 초월이란 우리의 일상을 뛰어넘는 특별한 지경을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기에게서 해방된다는 뜻입니다.

∙세 겹 줄처럼
몸은 유기체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지체들도 다 괴롭습니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는 고립을 심화시키는 이 세상에 맞서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양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이 세상이라면 교회는 약한 자들이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세상은 유능한 이들에게 상을 주고 명예를 안겨주지만, 교회는 그렇지 못한 이들까지도 귀히 여김을 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거창에 있는 샛별 초등학교의 초기 방향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홍종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언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그는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면 모든 아동들의 그림을 교실 뒷벽에 붙였습니다. 잘 그린 그림, 못 그린 그림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잘된 것만 골라 놓으면 학생들이 그 그림을 모방하느라 자기 표현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아이들의 글을 모아 한 권의 모음집을 엮곤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서로의 글을 읽고 친구들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학예회나 운동회 역시 같은 정신으로 진행되었습니다(전성은 전 교장의 증언).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가끔 돌담 쌓은 것을 감탄하며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저마다 생김새가 다른 돌들을 적재적소에 놓아 하나의 담을 쌓은 장인들의 솜씨가 신묘합니다. 하나님의 세계 또한 그러합니다. 생태계란 다양한 생물종들이 섞여 살며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합니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이들의 마음입니다. 각 지체가 각자가 맡은 분량대로 활동할 때 몸은 자라고,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버팀목입니다. 고립을 넘어 연대를 지향할 때 우리는 든든해집니다. 세상은 끝없이 우리를 고립시키려 합니다. 찬송가 475장은 ‘인류는 하나 되게 지음 받은 한 가족‘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도사린 죄악은 편당심과 차별의식을 넣어서 대화를 막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화해하는 본을 보여 불신의 땅 위에 믿음 사랑 되찾는 새 세계를 명하십니다. 사랑 안에 연결될 때 우리는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미국 감리교회 목사인 카렌 올리베토(Karen Oliveto)가 SNS에 올린 글을 보았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것에 적응된 세상이지만 나는 친절하게 살겠습니다.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세상이지만 나는 진실을 찾겠습니다. 불의에 눈을 감는 세상이지만 나는 정의를 추구하겠습니다. 증오가 편만한 세상이지만 나는 사랑을 선택하겠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나는 주변화된 사람들 편에 서고,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권좌에 앉은 이들을 불안하게 하는 이들로부터 배우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동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이 우리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4:12). 오늘도 내일도 믿음의 선한 싸움 싸우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혁의 누룩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11월 08일 10시 53분 2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