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9. 사가랴의 어떤 하루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1:8-17
설교일시 2020-12-06
오디오파일 s20201206.mp3 [4114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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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의 어떤 하루
눅1:8-17
(2020/12/06, 대림절 제2주)

[사가랴가 자기 조의 차례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어느 날 제사직의 관례를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온 백성은 다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다. 그는 천사를 보고 놀라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간구를 주님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그 아들은 네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많은 사람이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그는 포도주와 독한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앞서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의 길로 돌아서게 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을 마련할 것이다."]

∙가짜 뉴스에 휘둘리는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내일이 대설(大雪)입니다. 찬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오고, 얼음이 어는 때에 마음조차 푼푼하지 못합니다. 월가월령가 11월의 노래는 가을에 거둔 곡식들을 팔아 돈을 조금 마련하고, 일부는 세금으로 내고, 또 일부는 제삿밥 짓기 위해 떼어놓고, 이듬해 심어야 할 종자를 여퉈두고, 땅 주인에게 도지를 내고, 장리빚 다 갚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농민들의 서러운 처지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엄부렁하던 것이 남저지 바이 없다” 엄부렁하다는 말은 성기고 옹골차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추수할 때는 제법 두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는 탄식입니다. 12월을 맞이한 우리 심정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느긋한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 물결은 사정없이 우리를 휘몰아칩니다. 코로나19로 말미암아 물질적·육체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고, 코로나 블루를 호소하는 이들도 많습니다만, 정치권은 검찰 개혁을 둘러싼 지루한 공방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대의는 간 곳 없고 진영 간의 싸움만 도드라져 보입니다. 가짜 뉴스는 그렇지 않아도 허전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 증오와 적개심을 심어주려 합니다. 며칠 전 가까운 지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다짜고짜 “유튜브와 카톡이 들끓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영문을 몰라 하는 제게 그분은 여당 국회의원들이 교회 폐쇄법을 발의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의 명단까지 나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웃으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씀드렸지만, 의구심을 거두지는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이 암울한 시대에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분별력 혹은 식별의 능력입니다. 영을 분별하는 것도 은사입니다(고전12:10).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이니 더욱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오도하는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삶을 헐뜯고, 소외시키고, 위험에 빠뜨립니다. 사람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들의 열심을 이용하여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이익을 확보하곤 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에고’를 부풀게 만듭니다. 자기 기준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냉소하도록 만듭니다. 갈라진 틈을 메꾸기 보다는 그 틈을 더 벌립니다. 다리를 놓기보다는 담을 쌓아 올립니다.

교회력이 기다림의 시간으로 시작되는 까닭은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생각과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길을 여쭈어 보라는 뜻일 겁니다. 영어에 ‘unlear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learn‘이 ‘배우다, 공부하다, 익히다’라는 뜻이니까 unlearn은 ‘배운 것을 잊다‘, ‘고쳐 배우다’ ‘잘못된 버릇을 버리다‘라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이들은 자기 생각, 입장, 주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앞서지 않으려는 겸허함 없이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신실하나 쓸쓸한
대림절에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람 가운데 한 분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은 그의 탄생 이전에 벌어졌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합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헤롯 대왕이 유다를 다스리던 때에 아비야 조에 배속된 제사장(대상24:10)의 일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성전 체제는 제사장들을 24조로 나누고, 각 조가 1년에 두 차례씩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론 가문의 후예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지만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삶으로 입증하기보다는 그 영광을 가릴 때가 많습니다.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후의 성전 체제는 타락할 대로 타락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어서 성전 제사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제사장들을 신뢰하거나 존중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손가락으로는 하늘을 가리켜 보이면서도 눈은 온통 이익에 집중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달랐습니다. 누가는 그 두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었고,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부인”(디도1:16)하는 가증하고 완고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경건한 가정에도 근심이 있었습니다. 늙도록 자식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외는 하나님께 자식을 허락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신실하지만 쓸쓸한 삶이었습니다.

아비야 조가 제사장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때가 되었고, 제비뽑기를 통해 사가랴는 분향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분향단에 향을 피워 올린다는 것은 제사장들에게조차 영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경외심을 품고 분향하던 사가랴 앞에 천사가 나타납니다. 거룩의 현존 앞에 설 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놀람과 두려움입니다. 이사야도 환시 가운데 하늘 보좌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외쳤습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6:5). 당연한 반응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하는 순간, 우리 마음과 감각이 마비됩니다. 모든 움직임이 일시에 정지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수록 방어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체험에서 비롯된 두려움과 놀람은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삶의 다른 차원을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설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날 용기를 얻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벌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가 깃들어 있는 곳임을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의 안식일 기도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하루씩 지나가고 한 해씩 사라지건만, 저희는 기적들 사이를 장님처럼 걸어갑니다. 저희의 눈을 볼 것들로 채워주시고, 저희의 마음을 알 것들로 채우소서. 당신의 현존이 마치 번갯불처럼 저희가 걸어가는 어둠을 비추는 순간들이 있게 하소서. 저희가 어디를 바라보든, 떨기에 불이 붙었지만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출3:2, 역자주)을 볼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빚으신 흙덩이인 저희들이 거룩함에 닿게 하시고, 놀라움 가운데 ‘이 얼마나 경외로 가득한 곳인가…‘(창28:17, 역자주) 하고 외치게 하소서.“(마커스 보그, <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 김기석·정준화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14)

‘저희는 기적들 사이를 장님처럼 걸어간다’는 말이 쇠북소리처럼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야 합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맨 처음 한 말은 ‘두려워하지 말아라’입니다. 헬라어로도 두 단어입니다. ‘me phobu‘, 영어로 옮기면 ‘fear not’입니다. ‘do not fear‘나 ‘do not be afraid‘는 그 간명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풀어주십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과 접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줄 텐데, 그 아들이 네게 큰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는 놀람과 두려움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신실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가랴는 그 놀라운 메시지를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의 반응에 상관없이 전해야 할 메시지를 담담히 전합니다. 태어날 아기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라는 말과 ‘큰 인물’이라는 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은 그를 크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평가가 어떠하든 그는 소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길 닦는 사람들
천사는 태어날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선택의 신비, 소명의 막중함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지, 특별히 그가 선택된 때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사야도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사49:5)고 말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몫의 삶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생의 조건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부모, 성, 나라, 피부색, DNA, 시대를 골라 태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숙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뭘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김교신 선생은 동일한 인생의 재료가 주어져도 반응은 제각각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탄 진지 한 공기라도 감사로써 받아서 집사람들까지 위로하는 이 있고 탄내 난다 뿌리치고 온 종일 분노로써 주위에 독 주는 사람이 있다. 감사할 자료에 포위되어 있어도 감사를 발견 못해 마르는 생명 있고 눈물의 사막 같은 골짜기에서라도 수시로 도처에 샘과 계류(溪流)와 화초를 발견하는 눈이 있다. 신경이 있다.”(김교신전집1, <信仰과 人生 上>, 제일출판사, P.358)

하나님 보시기에 큰 사람이란 결국 자기 몫의 생을 한껏 살아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일 겁니다. 태어날 아기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품고 메시야 오실 길을 닦을 겁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보는 세례자 요한은 철저히 자기 한계와 분수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길을 닦는 사람이고, 밭을 갈아 파종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는 표지판입니다. 누가는 그의 소명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그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거의 모든 예언자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따라간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호세아는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호6:1)며 백성들을 독려했습니다. 돌아옴의 징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제 욕심대로 살지 않고 다른 이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로 돌아온 이들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깃들게 마련입니다.

둘째, 그는 “주님보다 앞서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의 길로 돌아서게 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을 마련“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돌아오면 자녀의 마음 또한 부모에게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통하기 어려웠던 이들이 마음을 열어 서로에게 다가서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몰랐던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길을 닦는 일입니다.

좋은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는 사람들을 통해 옵니다.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걷는 곳에 길이 생깁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별명은 ‘그 길을 걷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슬에 젖은 풀밭을 앞서 걷는 이들을 일러 이슬떨이 혹은 이슬받이라 합니다. 그들 덕분에 뒷사람들은 바짓가랑이를 적시지 않아도 됩니다. 요한은 그 역할을 위해 택함을 받았습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도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통로를 열고, 무정하고 사나운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온 세상을 다 바꿀 수는 없다 해도 우리 주변부터 사랑과 이해로 물들이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외로운 이들의 벗이 되십시오. 주님은 어쩌면 벌써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지키실 것입니다. 주님 오실 길을 닦는 마음으로 살 때 우리는 문득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과 만나게 됩니다. 눈물 골짜기를 거닐면서도 샘과 시냇물과 화초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는 한 주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12월 06일 11시 51분 4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