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50. 말씀이 비추는 길을 따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119:105-112
설교일시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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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비추는 길을 따라
시 119:105-112
(2020/12/13, 대림절 제3주, 성서주일)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려고, 나는 맹세하고 또 다짐합니다. 주님, 내가 받는 고난이 너무 심하니,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 주님, 내가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기도를 즐거이 받아 주시고, 주님의 규례를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생명은 언제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만, 내가 주님의 법을 잊지는 않습니다. 악인들은 내 앞에다가 올무를 놓지만, 나는 주님의 법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증거는 내 마음의 기쁨이요, 그 증거는 내 영원한 기업입니다. 내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 없이 주님의 율례를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엄마 걱정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불안하고 혼란스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찬양대의 시니어들이 부르고 낭송한 찬양과 말씀이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 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낍니다. 그런데 제게는 이 찬송시가 전하는 경험이 없습니다. 다만 유년 시절의 여름날이면 은하수가 아련하게 흐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 무릎을 베고 옛날이야기를 청하여 듣던 광경이 떠오릅니다. 민담과 전설은 저를 아득한 옛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였습니다. 부모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성경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말씀은 무의식 깊은 곳에 잠복해 있다가, 고단한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문득 떠올라 우리 앞길을 밝혀주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요14:26).

지난 주일 저녁에 ‘KBS 열린 음악회‘를 보았습니다. 빼어난 연주자들이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인 곡들을 불렀습니다. 한국적 정한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한다는 평을 듣는 장사익 님의 노래가 가슴을 울렸습니다. 특히 젊은 날에 세상을 떠난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에 붙인 노래는 기다림의 절기를 지나고 있는 제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쓸쓸하고 적막한 정경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엄마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가셨습니다. 그거라도 팔아야 자식들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도 그 곤고함을 잘 압니다. 아이는 이제나저제나 엄마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하고 무섭기만 합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지고 있지만 엄마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해가 시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어머니가 이고 가셨던 열무와 연결되는 시적 이미지입니다. 아이는 찬 밥처럼 방에 담겨 천천히 숙제를 합니다. ‘찬 밥’은 시간의 경과를 나타냅니다. 방에 담겼다는 말이 참 곡진합니다. 무서워서 문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 담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숙제를 하면서도 귀는 밖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어머니 발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고 무심한 빗소리만 처연하게 들려옵니다. 아이는 혼자 엎드려 훌쩍거립니다. 시인은 그 날의 정경을 떠올리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주 먼 옛날/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하는/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아름답게만 추억할 수 없기에 ‘유년의 아랫목’이 아니라 ‘윗목’입니다.

∙수동과 능동의 통일
기다림의 절절함을 이렇게 듬쑥하게 그려낸 시는 많지 않습니다. 이 시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까닭은 우리 역시 기다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날이 오기를, 좋은 인연이 다가오기를,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리지만, 성취의 시간은 자꾸만 지연되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기다립니다. 분주하게 지내느라, 정신이 온통 다른 데 팔려서 주님을 잊고 산 것은 아닙니까?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주님 모실 공간을 마련하셨습니까? 우리의 사귐 속에 주님을 중심으로 모실 준비가 되었습니까? 사랑과 비폭력과 정의가 우리 사회의 동력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인도하는 빛입니까?

시편119편은 토라 곧 율법에 대한 22개의 노래 모음집입니다. 토라는 흔히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이르는 말이지만 그 기본 의미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을 헬라어로는 ‘nomos‘라고 옮겼습니다. 규범이라는 의미가 더 도드라지는 표현입니다. 사실 토라의 핵심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우리 삶을 한껏 기뻐하며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토라는 우리를 번거롭게 얽어매는 규정집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즐겨 암송하는 시편 1편도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시1:2)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119편을 다 인용할 수는 없지만 33절에서 40절에 나오는 몇 가지 표현이 토라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의 율례들이 제시하는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33)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34)
“주님의 계명들이 가리키는 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35)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36)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를 가르치시고(學), 깨우치시고(覺), 걷게 하시고(行),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向) 해달라고 청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닫고, 걷고, 몰두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 먹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임할 때 비로소 가능한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하나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가능성을 열어주실 때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온 마음을 다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몸에 배도록 익혀야 한다는 말입니다(習).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5:19)는 말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은총이 열어주는 삶을 살아내는 것, 그 옹근 수동과 능동의 통합이 신앙생활입니다.

∙主一無適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119:105). 이 말씀은 스스로 길을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는 상투적인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지를 압니다. 어떤 한계상황에 몰렸을 때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사43:19) 하신 말씀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사43:2) 하신 말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던 우리 마음을 건져 올려 새로운 희망의 모험을 감행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인간의 몸에 황소의 머리를 하고 있는 괴물 미노타우르스가 살고 있던 미궁에 들어갔던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르스를 제거한 후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타래를 의지하여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미로와도 같은 삶 속에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일러주는 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꽉 막힌 듯한 우리 시야를 열어주어 더 넓은 지평을 보게 해줍니다. 삶이 암담할수록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삶이 위태롭고 고난이 지속적으로 찾아올 때 우리는 어둠의 장막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 어둠이 짙어질 때가 바로 유혹이 찾아오는 순간입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주님께 악마가 찾아와 유혹했던 것처럼, 중첩된 어려움은 우리가 견결하게 지켜왔던 삶의 원칙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야, 믿음이 밥 먹여주냐?‘,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다’, ‘혼자 깨끗한 척 해보아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전도서에서도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라(전7:16)지 않더냐?‘. 세상은 우리를 이렇게 길들이려 합니다. 우리는 참 많이도 길들여졌습니다.

오늘의 시인이 처한 현실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내 생명은 언제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이 너무 심합니다’라고 탄식합니다.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는 순간 그는 자기의 싸움이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그의 곁에 계심을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한 점 불빛입니다. 어둠은 더 이상 그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는 주님의 규례와 법을 잊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맹세하고 다짐하기까지 합니다. 그가 맞닥뜨렸던 고난이 압도적으로 보였던 까닭은 하나님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님의 생활 태도는 ‘거경궁리居敬窮理‘라는 말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늘 성찰하면서 외경의 마음을 잃지 않는 동시에 사물의 이치를 깊이 궁구하려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선비다운 삶의 자세입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이 그것입니다. 하나를 주로 하고 벗어남이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빌3:8)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하나로 집중될 때 힘이 고이는 법입니다.

∙성성자, 메주자, 테필린
조선 시대의 대학자인 남명 조식은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살기 위해 옷깃에 방울을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짤랑짤랑 울리는 그 방울을 성성자惺惺子라 했습니다. 영리하다, 슬기롭다는 뜻의 ‘성惺‘은 심방 변忄 즉 마음 심心과 별 성星자가 결합된 글자입니다. 마음에 별이 뜬 상태라는 말일까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겠다는 결의가 도드라집니다.

사실 성경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메주자(mezuzah)와 테필린(tefillin)이 그것입니다. 메주자는 유대인들이 자기 집 문설주에 붙이는 성구 상자입니다. 그들은 ‘들어라, 이스라엘’로 시작되는 신명기6장 4절 이하의 말씀을 그 속에 담았습니다. 테필린은 기도할 때 이마와 두 팔에 착용하는 가죽 주머니인데 그 속에는 토라 구절을 적은 종이가 들어 있습니다. 집에 들어갈 때나 나갈 때, 길을 걷거나 멈출 때마다 그들은 토라 백성임을 잊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의 올무가 발 앞에 놓여 있다 해도 주님의 법도를 벗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잠시 동안은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기에 그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평안한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다 이루어준다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 삶을 영원에 접속되게 만들어줍니다. 유한한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영원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을 알기에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님의 증거는 내 마음의 기쁨이요, 그 증거는 내 영원한 기업입니다”(119:111). 십자가는 하나님의 실패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실은 궁극적 승리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겪는 어려움은 더 큰 영광으로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이 무겁고 두렵고 암담해도, 자식이 기다리는 집에 꼭 오시고야 말 어머니처럼, 주님은 우리 곁에 지금도 오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길 삼아 걷다 보면 우리는 마침내 주님이 우리보다 먼저 길을 예비하고 계셨음을, 가장 암담한 시간에도 주님이 우리를 안고 계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감과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의 연약한 이들을 돌보라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처벌하고 혐오하고 배제하는 데 앞장서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고 먹이고 함께 노래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과 지향을 갖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의 달리신 분의 눈으로 이웃을 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꼭 붙들고 살 때 우리를 괴롭히는 세상의 인력은 줄어들고, 은총이 주는 자유가 우리 속에 스며들 것입니다. 말씀이 비추는 길을 따라 모든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을 열기 위해 나아가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12월 13일 11시 51분 1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