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2. 물 없는 샘
설교자 김기석
본문 벧후 2:17-22
설교일시 20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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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없는 샘
벧후 2:17-22
(성령강림 후 제11주)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입니다. 그들에게는 캄캄한 어둠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허무맹랑하게 큰소리를 칩니다. 그들은 그릇된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사람들을 육체의 방종한 정욕으로 유혹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자기들은 타락한 종이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거기에 말려들어서 정복을 당하면, 그런 사람들의 형편은 마지막에 더 나빠질 것입니다. 그들이 의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속담이 그들에게 사실로 들어맞았습니다.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

• 존재의 변혁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교회력으로는 성령 강림절기 중간을 지나고 있고 24절기로는 입추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음력 칠월 경을 가리켜 맹추孟秋라 합니다. 가을의 초입이라는 뜻입니다. ‘늦더위 있다 해도 절서를 속일소냐‘라고 노래했던 농가월령가의 노래를 실감합니다. “비 밑도 가비업고 바람 끝도 다르도다. 가지 위의 저 매아미 무엇으로 배를 불려, 공중에 맑은 소리 다투어 자랑는고.” 자기 때를 알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활짝 핀 꽃도 아름답지만, 꽃잎을 다 떨구고 꽃대만 남은 꽃도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에는 애잔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가끔 홀씨를 다 날려 보낸 민들레 꽃대(花軸)을 유심히 보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스러지는 것은 추한 것이 아니라 장엄한 생명 세계의 자연스런 흐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열정에 따라 살고 있는지요? 지향을 분명히 하고 있는지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느라 정작 더 본질적인 것은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욕망은 우리를 이끌어가는 활력입니다. 도달해야 할 목표를 분명히 정한 사람들은 불편함과 어려움을 감수하며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가능성들을 일단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올림픽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은 메달을 땄든 따지 못했든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체력과 정신력을 극한까지 밀고 가 본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용기란 불안함 속에서도 불가능한 것을 욕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도 때로는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태도입니다. 승자의 손을 들어주는 패자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느른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큰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에 오른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마음의 평안, 육체의 건강, 물질적 풍요? 이런 것이라면 신앙이 아니라도 거기에 접근하는 길은 더 많습니다. 베드로후서가 제시하는 신앙인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은 ‘정욕으로 부패하는 사람’입니다. 육체적 욕망에 굴복하는 일이 습성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삶처럼 슬픈 게 또 있을까요? 베드로는 성도들이 열심을 다해 몸과 마음에 익혀야 할 덕목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기본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에는 덕을 더해야 하고, 덕에는 지식을 더해야 하고, 지식에는 절제를 더해야 하고, 절제에는 인내를 더해야 하고, 인내에는 경건을 더해야 하고, 경건에는 신도간의 우애를 더해야 하고, 신도간의 우애에는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벧후 1:5-7). 이것을 뒤집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덕스럽지 못한 믿음은 교만에 이르고, 바른 이해에 근거하지 않은 덕은 방종에 이르고, 삼가는 태도를 알지 못하는 지식은 오만하고, 인내를 모르는 절제는 조급증과 원망을 낳고, 경건함이 없는 인내는 권태와 짜증을 낳고, 신도간의 우애가 없는 경건은 사람을 고립시키고, 아가페적 사랑이 없는 신도간의 우애는 불화에 이르기 쉽습니다.

• 거짓 교사들
이렇게 말하면 일상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사는 이들에게는 그런 목표가 과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만 명심하면 됩니다. 첫째, 아직 우리는 목표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명심하는 것입니다. 교인이 된 연수와 우리 믿음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꼭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의 풍경이 보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분이 좋아하시는 일을 나 또한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으로 여겼고, 세상의 아픔을 당신 속으로 끌어들여 풀어주려 하셨습니다. 유대교가 부정한 것으로 규정한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그들의 더러움을 씻어주셨고,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벗이 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능동적으로 그런 이들을 찾아다니지는 못하더라도, 어떤 계기에서든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정성스럽게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진실함은 특정한 교리에 대한 승인이나 의례 참여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정성스럽게 사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믿음을 특권으로 바꾸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다른 이들을 멸시하는 이들도 있고, 종교적인 권위자임을 내세워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이익에 담백해지지 않는 한 우리 영혼이 성장할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셈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 영혼은 누추해집니다.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이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눅 16:8b)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악한 자들이 우리를 함부로 약탈하지 못하도록 슬기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믿음을 특권으로 바꾸는 사람들, 그 특권을 통해 탐욕을 채우려는 이들은 다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오도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aparneomai) 것입니다. 여기서 부인이란 ‘자기 이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부탁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의 운명에 대해 궁금증을 드러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21:22) 자기 부인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지도자 노릇을 할 때 종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마련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을 본받아서 방탕하게 될 것이니,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게 될 것입니다.”(벧후 2:2)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자기들은 타락한 종이 되어 있습니다.”(벧후 2:19a)

거짓 지도자들은 탐욕스럽고, 들뜬 영혼들을 유혹하여 자기들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사도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물 없는 샘’, ‘폭풍에 밀려 가는 안개’라 말합니다. 물이 솟구치지 않는 샘은 황량합니다. 고인 물은 썩고, 온갖 오물이 그 속에 쌓입니다. 물이 솟구치지 않는 것은 지하수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지 않을 때 우리 영혼은 황폐하게 변합니다. 스스로 캄캄한 어둠 속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인도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릇된 생활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들을 육체의 방종한 정욕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 나중 형편이 더 나빠진 사람들
신앙생활에 부침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갔다가 돌아서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돌이킴입니다. 어긋날 길로 가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 돌아서서 다시 목표를 향해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걸어온 그 거리가 아까워 돌아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이게 바로 노력 정당화 현상(justification of effort phenomenon)입니다. 자기가 한 결정을 정당화 하다 보면 오히려 그 결정에 스스로 확고하게 매이게 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영혼의 굳어짐입니다. 돌이킬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병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린 백성들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돌아섬, 바로 거기에 구원의 문이 있습니다.

처음 은총의 비췸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온 인류를 다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숨결이 우리 속에 깃들 때,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이 나타납니다. 문제는 그 순간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웠던 순간의 기억은 사라지고 권태롭고 무거운 일상만 남습니다. 힘든 노동이 기다리고 있고, 관계의 어려움은 여전하고,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기다리는 차는 오지 않습니다. 그때 옛 삶이 슬그머니 우리 옷자락을 잡아당깁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옛 삶으로 돌아가려는 우리 마음을 붙들어 자꾸만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 영혼은 병들거나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6:4-6)

사도는 더러움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말려들어 죄의 유혹에 굴복하면, 그런 이들의 형편은 더 나빠진다고 말합니다. 이건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판단일 겁니다. 그들은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분쟁을 일으키고 애찬의 암초 구실을 합니다.

• 차라리
사도는 의의 길을 알고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리는 이들은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차라리’라는 부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저리 하는 것보다 이리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음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이 단어 속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습니다. 지긋한 아픔이 깃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가운데 당신을 배신할 사람이 있다면서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마26:2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존재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흉악한 범죄자나 인간 실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볼 때면 우리 마음에도 이런 말이 떠오르는 게 사실입니다.

진리의 길에 접어들었다가 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보며 사도는 그들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서신에는 그 정확한 정황이 나오지 않지만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할까요?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 개나 돼지에게는 억울한 표현이지만, 이 말 속에 담긴 아이러니를 우리는 잘 압니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적은 무신론자나 비기독교인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의 길을 걷지 않는 이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잘 안다고 믿기에 다른 이들을 함부로 평가하고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지도자들의 잘못이 큽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 23:15)

다시 한번 우리 지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사람들(벧후 3:13)입니다. 기다릴 뿐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시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 없는 샘은 슬픕니다. 폭풍에 떠밀리는 안개는 허망합니다. 우리 속에서 생명의 샘물이 솟아나기를 빕니다. 무더위 가운데 가을이 슬그머니 자리잡는 것처럼, 이 냉랭한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8월 08일 11시 53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