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3. 길갈
설교자 김기석
본문 수 5:8-12
설교일시 2022-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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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갈
수 5:8-12
(2022/03/27, 사순절 제4주)

[백성이 모두 할례를 받고 나서 다 낫기까지 진 안에 머물러 있었다.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 달 열나흗날 저녁에 여리고 근방 평야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 다음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 날에, 그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 인간 여호수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봄꽃들이 무진장으로 피어나고 있어 초록 세계 심방을 더러 하고 있습니다만 호젓한 기쁨을 마음껏 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 한편이 무지근하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고, 북한은 핵과 장거리 탄도 미사일 실험을 중지한다는 모라토리움 선언을 4년 만에 폐기하고 ICBM(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을 발사했습니다. 이전보다 무기가 더 고도화 되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권 교체기에 긴장을 높여 협상력을 높여감으로 이후에 주도권을 쥐려는 전략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더 커질 것이고, 한반도는 또 다시 위기 속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전에 즐겨 부르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난다 이 모든 인간 고통 괴로움 뿐 그 지겨움 끝없네”. 북한의 도발은 한반도가 여전히 분단국가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정현종 선생의 ‘요격시’도 떠올랐습니다.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마음을 발사합니다//두루미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기러기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폭탄에/도요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하략)”. 시인답게 그는 살상무기와 그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전쟁 기획자들에게도 아름다운 새를 날려 보내고 싶어합니다. 어처구니없다고 외면할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아픔을 드러내는 동시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키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정현종 선생은 앞에서 언급한 새들 말고도 다양한 새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굴뚝새, 뻐꾸기, 비둘기, 따오기, 왜가리, 뜸부기, 먹황새, 물 오이 때까치, 가마우지. 그 이름을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평화에 대한 열망이 우리 속에 솟아오릅니다. 주님께서 부디 이 가련한 나라에 진정한 평화를 허락해주시기를 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탈출 공동체가 마침내 약속에 땅에 진입할 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인 동시에 모세의 의지를 실행하는 주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를 생각할 때마다 양가감정이 듭니다. 그는 궁극적인 샬롬의 세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어둡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전쟁, 징벌, 복수, 살육, 폐허로 변한 도시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심에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그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 이후에 벌어진 아말렉과의 전투 이야기(출 17장)입니다. 그는 군사령관이 되어 아말렉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는 또한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갈 때 모세를 보좌하여 함께 산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출 24:13).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과 만난 후 진으로 돌아가도 여호수아는 장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출 33:11). 바란 광야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낼 때 여호수아도 에브라임 지파를 대표하여 선발되었습니다(민 13:8, 16).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민 27:18)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제사장 엘르아살과 함께 가나안 땅을 분배할 책임을 맡기도 했습니다(민 34:17).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면서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라고 당부하시며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수 1:9) 어려운 도전을 앞둔 이들이 자주 떠올리는 말씀입니다.

• 요단강 도하
마침내 대업을 이룰 때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여리고 성을 잘 살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정탐꾼들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라합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라합을 ‘창녀’(zanah)라고 말합니다. 어쩌다 그런 상황에 몰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성읍에서 주변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라합은 거리를 두고 현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성안의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알아차렸습니다. 그의 고백이 절실합니다.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 위에서, 과연 주 당신들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수 2:11b). 정탐꾼들은 그 땅을 탐지한 후에, 애굽과 광야에서 하신 주님이 하신 위대한 기적들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그 성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고 여호수아에게 보고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싯딤을 떠나 요단 강까지 나아가 그곳에 진을 쳤습니다. 사흘이 지난 후 지휘관들을 보내 백성들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들어서 메는 것을 보거든, 진을 철수하여 제사장의 뒤를 이천 보쯤 거리를 두고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그 때가 추수할 무렵이었기에 물이 제방까지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물 가에 닿자 흐르던 물이 멈췄습니다. 제사장들이 요단강 한 가운데 마른 땅 위에 든든히 서자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고 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넌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시간 속으로의 행군이었습니다.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선대들이 꿈꾸던 자유세계로의 돌입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억압받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불렀던 영가를 우리는 흔히 negro spiritual이라고 칭합니다. 흑인 신학자인 제임스 콘은 흑인영가를 가리켜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는 민중들의 영혼”(제임스 콘, <흑인영가와 블루스>, 현영학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p.53)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흑인영가는 고통의 체험 이상의 것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전율적인 긍정이요, 특유한 미학적 형식으로 표현된 생의 가능성에 대한 전율체험”이기도 합니다.

저는 엊그제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의 음성으로 ‘Deep River’라는 곡을 들었습니다. “깊은 강 나의 집은 저 요단강 저편에 있네/깊은 강, 주님, 나는 저 강을 건너 축제의 마당에 들어가고 싶습니다.Deep river My home is over Jordan/Deep river Lord I want to cross over into campground”. 흑인 특유의 그루브가 살아있는 그 노래는 어떻게 들으면 흐느낌 같고, 또 어떻게 들으면 기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억압을 경험한 적이 없는 이들이 가닿기 어려운 세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그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섰습니다. 그 감격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겁니다.

• 기억의 매개
여호수아는 열 두 지파의 대표들로 하여금 요단강 가운데서 돌 하나씩 가져다가 그들이 머물 곳에 두게 했습니다. 그것은 그 위대한 사건에 대한 기념물이었습니다. 기념물이란 흐릿해지는 기억을 환기시키기 위한 매개물입니다. 날이 갈수록 생생해지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흐릿해지는 기억도 있습니다. 문제는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 공동체가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전례를 만듭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다양한 절기 혹은 기념일이 그것입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부모님 추도식, 국가 공휴일, 교회력의 절기…. 저의 경우, 이전에는 그 날들을 지키고 기념하는 게 다 부질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그게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새겨진 마디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자주 경험하는 것은 주일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회상하는 동시에 현재화하는 행위입니다.

예배 혹은 전례로 번역되는 헬라어 ‘레이투르기아’는 ‘사람’을 뜻하는 ‘laos’와 ‘일’을 뜻하는 ‘ergon’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고대 로마나 그리스 사회에서 레이투르기아는 시민이라면 마땅히 참여해야 할 공공 활동을 의미”했습니다. 도시의 축제에 참여하여 음식을 함께 준비한다든지, 공공사업과 군대를 위해 돈을 내거나 몸으로 참여하는 일 등이 그것입니다(최주훈, <예배란 무엇인가>, 비아토르, p.51) 이 단어가 신앙공동체에 적용될 때는 그 의미가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함께 참여하고 협력하는 것이 곧 예배입니다.

여호수아는 쌓아올린 돌무더기를 보고 후손들이 이게 뭐냐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셨는지, 요단강물이 어떻게 끊겼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주라고 말합니다. 길갈에 세워진 돌무더기는 여느 돌과는 달리 뭔가를 가리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수런수런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조상들이 경험했던 감격과 기쁨의 순간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는 사람들을 억압에서 자유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입니다. 길갈에 쌓아올린 돌무더기는 일종의 성사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 할례와 유월절
그곳에서 여호수아는 기브앗 하아라롯(Gibeath Haaraloth, the hill of foreskin)에서 출애굽 2세대 사람들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할례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진을 앞에 두고 할례를 행하는 것은 전투력에 심각한 문제를 안길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행한 것은 물론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었지만, 새로운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할례를 받고 다 낫기까지 진 안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여호수아에게 임했습니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수 5:9) ‘없애 버렸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갈랠’(galal)은 ‘길갈’(gilgal)과 뜻과 발음이 유사합니다. 길갈은 ‘바퀴 혹은 구르다’는 뜻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수치를 굴려 없애신 곳입니다. 길갈은 새로운 삶으로의 입구인 셈입니다. 우리의 길갈은 어디입니까?

인간의 삶을 가리켜 계기적 실존이라 말한 이가 있습니다. 계기契機란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원인이나 기회’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평범한 삶이라 해도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변화의 계기가 되는 사건들을 만납니다. 그 계기가 삶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합니다. ‘떠나라’는 명령을 들었던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하고, ‘따르라’는 명령을 들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난 후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가없는 사랑으로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 깊이 자각한 날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수치가 제거된 날입니다. 바로 그 날이 우리의 길갈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달 열나흗날 저녁 여리고 근방 평원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자기들이 언약 백성임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소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볶은 곡식을 먹으며 유월절 의식을 치른 다음 날, 이스라엘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만나가 그쳤습니다. 광야 시대가 끝났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비상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비상한 방식으로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자기들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읽은 본문 다음 대목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갔을 때에 벌어진 일을 전해줍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이 손에 칼을 빼 들고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군사령관이라고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한 다음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이 부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합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너의 발에서 신을 벗어라.”(민 5:14, 15) 이 낯설지 않은 문답은 호렙산의 모세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다른 이들을 제압하거나 홀로 만족하는 것은 성경의 정신과 무관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인습적인 지혜를 해체합니다. 하나님은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짓밟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높아지려는 사람은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기 특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 자기가 받은 삯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는 살아남기 위해 폭력을 써야 했지만, 우리는 비폭력적인 저항을 통해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순절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진 수치와 부끄러움이 벗겨졌는지요? 새로운 삶으로 돌입하기 위해 벗어야 할 것을 벗고 있는지요? 우리는 길갈을 넘어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지향을 잃는 순간 우리는 욕망의 벌판을 헤매는 가련한 신세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단호히 평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의 빛을 받아 살면서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그리고 이 척박한 역사 속에 평화와 정의의 씨를 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3월 27일 12시 09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