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5. 마지막 만찬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 14:22-26
설교일시 202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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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만찬
막 14:22-26
(2022/04/10, 종려주일)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은 모두 그 잔을 마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찬송을 부르고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 지킬 것이 많은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빕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억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개선행렬이 아니라,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을 맞이한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누가복음은 ‘제자의 온 무리’(눅 19:37)가 기뻐하며 노래했다고 전합니다. 마가복음은 ‘많은 사람’(막 19:37) 마태복음은 ‘큰 무리’(마 21:8)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깔고 다른 사람들은 잎이 많은 생나무 가지를 꺾어다 길에 깔고 외쳤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요 12:12)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주님을 맞으러 나왔다고 전합니다. 어느 경우이든 그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것이라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부른 호산나 찬양에서 언급되는 것은 ‘다윗의 나라’,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이스라엘의 왕’ 등입니다. 일종의 흥분상태입니다. 수난과 모욕으로 점철된 십자가 처형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느끼셨을 적막한 쓸쓸함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사람들의 부푼 기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아셨기에 주님은 더욱 고독하셨습니다.

때는 유월절 직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의 뿌리인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드는 시기였다는 말입니다.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을 겪고 살던 이들이지만 이때만큼은 자기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기에 그들은 들뜬 상태였을 겁니다. 로마는 군대를 보내 폭동에 대비했습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민중들이 소요와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은 현상 유지였습니다.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한 말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요 11:49-50)

그럴싸한 명분이지만 이런 정치적 선택에 진리의 자리, 생명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호숫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예수가 민란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을 뿐입니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율법학자들은 특히 예수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전고를 인용하지 않으면서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분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율법학자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처럼 보였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가르침을 ‘~ 하지 말아라’ 혹은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로 요약하고는 매번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며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런 예수를 경쟁자로 여겨 증오했습니다. 주님도 그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 23:23)

대제사장들이 되었든 율법학자가 되었든 그들은 율법의 디테일에 집착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진리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미국의 빼어난 역사자이자 에세이스트인 리베카 솔닛은 자기가 인생 학교에서 배운 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주변부가 오히려 가장 풍요로운 장소일 수 있으며 다른 영역들을 드나들기에 유리한 위치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리베카 솔닛,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김명남 옮김, 창비, p.28). 중심의 자리에만 있는 이들은 변화와 불확실성을 수용하고 다양하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새로움이 늘 변방에서 시작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중심에 속한 이들은 기존질서에 틈을 만들려는 이들을 사회 안정을 깨뜨리는 불온분자로 여깁니다.

• 유월절 전날
예수를 죽일 음모가 착착 진행되는 동안 마가는 문득 우리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 한 여자가 값진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여인은 종교인들, 제자들, 무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아니 보려 하지 아니한 예수의 죽음을 내다보며 예수의 죽음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그 여인을 참된 제자도를 실천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바로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줄 마음을 품고 대제사장들을 찾아갑니다. 마가는 가룟 유다를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그 말을 굳이 한 까닭은 시편의 한 구절을 떠올렸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믿는 나의 소꿉동무, 나와 한 상에서 밥을 먹던 친구조차도, 내게 발길질을 하려고 뒤꿈치를 들었습니다.”(시 41:9) 배신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행하는 것이기에 쓰라림이 더욱 큽니다. 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 서로 신뢰하는 사람이 사기를 치는 법입니다.

그런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제자들은 무교절 첫날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주님께 ‘유월절 음식을 어디에 준비할까요?’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성 안으로 들어가서 물동이를 메고 오는 한 사람을 만날 테니 그 사람을 따라 가라 이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님이 유월절 음식을 드실 사랑방이 어딘지 물으면 그가 안내해 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마치 스파이들의 접선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일종의 발견 모티프라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시켜 아무도 타본 일이 없는 새끼 나귀를 보거든 풀어서 가져오라 이르십니다. 제자들의 행위에 깜짝 놀란 주인이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묻자 제자들은 주님이 쓰시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순순히 나귀를 내줍니다. 구약에서도 이런 사건이 종종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10장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후에 일어난 일을 들려줍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볼의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하나님을 뵈러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들은 각각 염소 새끼 세 마리, 빵 세 덩이, 포도주 가죽부대 하나를 메고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안부를 물으며 빵 두 덩이를 줄 텐데 그것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발견 모티프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 새로운 언약
저녁이 되자 주님은 제자와 함께 가셔서 자리를 잡고 앉으셨습니다. 그날의 식사는 여느 저녁 식사와는 다른 의례적 식사였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행했던 식사를 세데르(Seder, 세이더)라고 부릅니다. 세데르 상에는 ‘엘리야의 잔’이 올라가곤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불병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던 엘리야가 세상의 끝날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의 모든 의문을 풀어준다고 믿었습니다. 가장은 정한 시간에 엘리야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기도 했습니다. 미지의 어둠을 향해 문을 열어놓는 그 의식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을 기대했을 겁니다. 유월절 만찬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주님은 음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넘겨주다’라고 번역했지만 사실은 ‘배신하다’는 뜻입니다. 느닷없는 말씀에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근심에 싸인 제자들은 저마다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구체적인 인물을 특정하지는 않지만 그가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사람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신 다음에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떼다’는 단순히 ‘붙었던 것을 떨어지게 하다’는 뜻으로만 새기면 떡을 떼신 행동의 비장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떼다’라고 번역된 에클라센(eklasen)은 ‘부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는 십자가에서 찢기신 주님의 몸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어 주님은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성찬을 가리켜 ‘유카리스트’라 하는데, 이것은 감사를 드리다는 뜻의 헬라어 ‘유카리스테오 eucharisteo’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잔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안에 포도주가 담겨 있으니 잔이 포도주 잔을 가리킨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마가가 굳이 ‘잔’이라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잔’이라는 단어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자기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했던 야고보와 요한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은 그들 형제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고 물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번민에 사로잡힌 주님은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막 14:36)라고 기도했습니다. 잔은 희생과 헌신과 순종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잔을 건네심으로 제자들을 당신의 운명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힘을 가진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함부로 대하고 마구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나, 모두가 형제의 우애를 나누고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끼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초대입니다.

이탈리아 소설가인 이냐치오 실로네의 <빵과 포도주>는 파시즘이 득세하던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소설에는 무리카라는 젊은이가 나옵니다. 그는 파시즘 정부에 대항해 진실과 우애가 지배하는 사회, 돈 대신 건강한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민병대에 의해 체포되고 고문과 린치를 당한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무리카의 아버지는 빵과 포도주를 권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합니다. “나를 도와, 이 빵을 만든 곡식의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탈곡을 하고 빻은 건 바로 그 앱니다. 이건 그 아이의 빵이에요.” 그리고 포도주를 권하며 말합니다. “나를 도와,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따들여서 이 포도주를 빚은 건 바로 그 앱니다. 드십시오. 이게 그 아이의 포도주요.” 평범한 말이지만 강렬한 저항의 메시지가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어떤 애상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동참했던 피에트로는 그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빵은 많은 이삭의 낟알로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포도주는 많은 포도알로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그것 역시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비슷한 것들이 똑같이 모여 뭉치는 하나의 결합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과 형제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함께 어울려 화목하게 지내는 것들이지요.”(이냐치오 실로네, <빵과 포도주>, 최승자 옮김, 고래의 노래, p.442-3)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됨으로, 진실과 형제애의 세계로 부름 받았음을 깨닫고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닐까요? 아직 그런 세상은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14:2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날, 모두가 함께 기쁨의 잔치를 할 날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 어둠 속에서 부르는 노래
마지막 만찬을 마친 후 주님은 찬송을 부르고서, 올리브 산으로 갔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부른 찬송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리가 흔히 할렐 찬양이라 말하는 시편 113편부터 118편이었을 겁니다. 그 찬양은 인간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냅니다. 할렐 시편은 하나님이 “높은 곳에 계시지만 스스로 낮추셔서,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시 113:5b-7) 그들로 떳떳하게 살게 하시는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얽어 매고, 스올의 고통이 나를 엄습하여서, 고난과 고통이 나를 덮여 올 때에,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간구합니다. 이 목숨을 구하여 주십시오’ 하였습니다”(시 116:3-4). 그리고 믿음 안에 있는 이의 든든함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사람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으랴?”(시 118:6)

우리 현실은 늘 암담합니다. 우리를 절망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 통치를 믿는 이들은 낙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정의의 세상을 정의의 방향으로 이끄시고, 갈등과 폭력이 넘치는 세상을 참된 평화의 세상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찬양은 그런 꿈을 우리 내면에 새기는 행위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부른 그 찬양이야말로 어두운 세상에서 희망의 등불을 밝혀드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우리도 그 노래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아니, 주님이 부르시는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굳은 믿음과 희망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4월 10일 12시 06분 35초